이미 100만 관객이 넘게 이 영화를 보았다니까 세간의 관심이 어지간한 모양이고, 사실과 허구의 관계를 중심으로 웬만한 사람들이 말도 하고 글을 써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겠다 싶다. 그런데도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건 1월 29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변호사 금태섭의 글을 읽고 난 후의 개운치 않은 느낌 때문이다. (☞관련 기사 : "영화는 영화일 뿐 '오버'하지 말자!")
그 전에 내가 이 영화를 한번 보자고 생각했던 건 문화평론가(혹은 시사평론가) 진중권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남긴 신중치 못한 글들 때문이었다. 진중권은 "김(명호) 교수 개인의 돈키호테적 망상에, 박훈 변호사의 운동권적 서사가 결합하고, <도가니>의 흥행으로 확인된 사법부에 대한 대중적 불신에 편승하려는 감독의 욕망이 적절히 합쳐져 사실과는 다른, 180도로 다른 자칭 '법정 실화극'이 탄생한 거죠"라고 했다. 나는 우선 영화를 보고난 뒤 진중권이든 누구든 그들의 언설이 정말 가치 있고 생산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가 확인해 보고자 했다. 영화를 보고나서의 결론은 진중권의 가벼움에 크게 실망했다는 점이다.
김명호가 소위 석궁 사건을 일으킨 계기는 직접적으로는 그의 교수 지위 확인 소송 담당 재판부에 대한 '불만'이지만, 애초의 불씨는 대학별 고사에서 잘못 출제된 문제를 지적한 그의 '용기'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학교의 명예 운운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덮으려는 이들에 맞서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던 김명호의 '고지식함' 때문이었다.
▲ 영화 <부러진 화살>. ⓒ프레시안 |
여기까지의 글에는 '사실'과 나의 '판단'이 혼재되어 있다. 그러니 어떤 사건, 곧 사실을 두고 그것을 판단하는 시선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우선 우리는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진중권은 대체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을, 영화라는 허구적 서사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 당사자인 김명호와 변호사와 감독에 휘둘리는 형편없는 이들로 한데 묶어 꾸짖고 있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무엇보다 김명호의 일련의 행위를 두고 "돈키호테적 망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거의 폭력 수준이어서 진중권의 의식은 물론 그의 인격이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왜냐하면 대학별 고사에서 잘못 출제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지적해서 바로잡으려는 김명호의 처신은 용기 있는 행위이고 따라서 '정의'에 속하는 것이지 결코 돈키호테적 망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1990년 5월 당시 감사원 감사관이었던 이문옥은 재벌의 비업무용 땅의 보유 실태를 폭로하면서 양심선언을 했었다. 재벌들의 탐욕도 문제지만 그것을(감사 결과를) 덮으려는 윗선들의 집요함에 맞서 그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감사원의 독립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문옥은 스물세 개 재벌 계열사의 비업무용 토지 보유 비율이 43퍼센트로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업계의 로비에 따라 상부의 압력으로 감사가 중단됐다고 밝힌 그 폭로와 관련하여, 공무상 누설 혐의로 구속되었다가 60일 만에 보석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다음해 1월 공직에서 파면되었다. 그리고 6년간의 긴 법정 투쟁 끝에 1996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고, 이후 파면 처분 취소 청구 소송에서도 승소했다.
나는 김명호나 이문옥의 경우 둘 다 공익을 위해 자신의 불이익을 감당하면서도 정의롭게 행동했다고 믿는다. 그런데 진중권이 보기에 이문옥의 경우는 어떠할까? 그의 사고대로라면 이문옥의 양심선언과 이후 기나긴 법정 투쟁이 돈키호테적인 망상의 소산일까? 물론 이문옥은 법정 투쟁 과정에서 판결에 불만을 품고 판사의 집에 석궁을 들고 찾아가지는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김명호를 그렇게 매도할 근거와 자격이 진중권에게 있지는 않다. 만약 진중권을 비롯해서 우리가 김명호를 책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석궁을 들고 판사 집에 쫒아간 그 행위에 대해서 일 뿐, 그 이상이어서는 안 된다.
금태섭은 "영화는 영화일 뿐 '오버'하지 말자!"고 썼다. 앞의 진중권, 금태섭과 내가 같은 점은 영화는 허구라는 점을 인정하고 있는 점이다. 다른 점은 영화를 비롯한 서사체(소설 등 이야기 문학을 포함하여)가 허구이기는 하지만, 그 허구라는 개념에 진중권과 금태섭은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매달리고 있는 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서사체가 기본적으로 허구라 했을 때의 그 '허구'는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일을 개연성 있게, 그러니까 그럴 듯하게 쓴 이야기를 말한다. 그러니까 진중권과 금태섭은 '허구'란 그럴 듯하게 꾸면 쓴 이야기라는 점에 목을 매고 있지만, 꾸며 쓰되, 현실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를 쓴다는 부분은 아마 모르고 있거나 모른 척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금태섭은 법률 전문가니까 아마 정말 모를 수 있고, 진중권은 미학을 전공했으니 그쯤은 알 텐데도 김지하의 말처럼 공부가 덜 돼서 모르는 건지 모른 척하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여하튼 다시 문제는 영화나 소설이 허구인 것은 맞지만 그 허구의 성격이 특히 사회 문제를 다루는 경우 대체로 사실을 바탕으로 쓰인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진중권이 미리 병풍을 쳤듯이 영화 <도가니>의 경우 허구면서도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게 아니냐고 따지진 않겠다.
금태섭의 경우 이 <도가니>를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대신 다른 문학 작품들(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 필립 딕의 <높은 성의 사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을 예로 들어 서사체의 본질이 '허구'임을 강조하고 있으니까. 김훈의 역사소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은 역사적 사실보다 허구에 더 기울어져 있지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다룬 '허구'이되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언급도 별 의미가 없겠다.
그래서 나도 내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문학 작품을 예로 들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는 백인 여성을 강간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장애를 가진 흑인 남성에 대한 백인들의 집단적 분노와 처벌이 어떻게 행해지는가를 여덟 살 난 어린아이의 관점으로 이야기한다.
여기에서 흑인이 실제로 범죄 행위를 저질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흑인이 백인 여성과 연루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범죄행위이다. 그러나 더욱 용인될 수 없는 흑인의 범죄는 그로 인해서 백인의 권력 구조와 기득권에 대한 새로운 담론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백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담론의 시작은 기득권에 대한 도전이며, 자신들이 구축한 질서 체계의 파괴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백인의 관점에서 피부색의 차이는 곧 우열의 근거이며, 기득권의 정당성은 이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1931년에 일어났던 스코츠보로 재판 사건에서 착안을 얻은 것임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앨라배마 주로 가던 화물차 안에서 흑인 청년과 백인 청년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흑인 청년들은 체포되고 백인 여성은 거짓으로 흑인 청년들이 자신들을 강간했다고 주장한 나머지 무려 20년이나 법정 공방이 계속된 이 유명한 사건이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배경이라는 점은 다시 영화나 소설과 같은 서사체가 허구이되, 결코 작가가 거짓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그럴듯하게 써낸 이야기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중권이나 금태섭은 영화 <부러진 화살>이 꾸며낸 이야기로서의 허구, 즉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말할 게 아니라, 영화일 뿐이지만, 그 내용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 사건의 전모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요구된다고 했어야 더 옳지 않았겠나 싶다.
당사자인 김명호는 경우 결코 석궁을 쏘지는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고(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혈흔 감정과 피해자 증인 심문도 변호인의 요구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무어보다 김명호가 교수직에서 쫓겨난 경위가 납득할 수 없는 게(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사실이니까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쓸데없는 소리할 게 아니라, 한국 사회의 기득권에 대한 새로운 담론의 시작을 열어가는 데 일조해야 옳지 않겠는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진중권의 한없는 가벼움과 금태섭의 부화뇌동에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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