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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이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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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이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해방일기] 1946년 12월 28일

1946년 12월 28일

1946년 12월 19일 제1차 베트남 전쟁이 발발했다. 1945년 8월의 일본 항복 이후 베트남의 사태 진전을 한 차례 훑어본다. 이 시기 베트남의 조건과 경험에는 조선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어서 그 비교를 통해 두 나라가 함께 겪던 국제 상황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의 38도선 남북을 미군과 소련군이 점령하게 한 일반명령 제1호는 베트남의 16도선 남북에 영국군과 중국군이 진주하게 했다. 프랑스군의 진주에 미국이 반대한 결과라고 하는데, 유럽 국가들의 식민주의를 혐오하는 미국 여론 위에서 루스벨트의 국제주의 노선에 따라 결정된 방침이었다. 프랑스는 비시 정부의 나치 협력으로 인해 전범 국가의 측면도 가진 나라였기 때문에 종전 당시 연합국 안에서 발언권이 약했다.

베트남에는 조선보다 훨씬 강력한 대일 항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베트민이 대표적 항쟁 세력이었다. 일본 지배가 짧았고 일본군 주둔도 적었으며 대 프랑스 항쟁의 전통이 쌓여 있던 등의 조건 덕분이었다. 베트민 등 항쟁 세력은 8월 초순부터 일본 항복을 예견하여 적극적 작전에 나섰고, 9월 9일 중국군의 하노이 입성과 9월 12일 영국군의 사이공 도착 전에 이미 주요 도시를 장악하고 임시 정부를 선포하고 있었다.

중국은 18만 대군을 베트남에 보낸 반면 영국군은 1개 사단만이 진주했다. 장개석은 애초에 정예군을 보내려 하다가 마음을 바꿔 윈난 성 군벌 루한(盧漢)의 부대를 보냈다. 국내 사정 때문에 정예군을 아낄 필요가 있었던 것인데, 자신을 지지해준 지방 군벌에게 점령의 이권을 포상처럼 내준 셈이다. 군기가 해이한 중국 군벌 부대는 베트남인이 겪어온 프랑스인, 일본인과도 다른 차원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영국군이 주둔한 남부의 코친차이나 지역에서는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북부에 비해 프랑스인의 세력이 강고하고, 베트남 독립 운동 세력에게는 임시 정부의 지도력이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몇 차례 유혈 사태를 겪은 영국군 사령관 그레이시는 진주 후 한 달도 안 되어 점령군의 권한을 프랑스인에게 넘기는 협정에 서명했다. 코친차이나에서는 프랑스의 식민 지배가 회복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노이의 임시 정부는 1946년 1월 총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며 중국에서 돌아온 민족주의자들을 끌어들여 기반을 확충했다. 그러나 중국군의 점령 상황이 정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이 갈수록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결국 호치민은 프랑스를 끌어들이면서 중국군을 철수시키는 방향으로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식민 통치를 회복하려는 프랑스와 지방 군벌의 이권을 위해 주둔하는 중국군, 어느 쪽이 호랑이고 어느 쪽이 여우인지 판단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이 문제를 놓고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중국이 계속 주둔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요? 당신들은 우리 역사를 잊고 있소. 중국은 우리나라에 한 번 들어오면 1000년씩 떠나지 않았소. 하지만 프랑스는 단기간 있을 수밖에 없소. 결국 그들은 떠나야만 할 거요."

"평생 중국인의 똥을 먹는 것보다는 프랑스인의 똥냄새를 잠시 맡는 게 낫지요." (<호치민 평전>(윌리엄 듀이커 지음, 정영목 옮김, 푸른숲 펴냄), 536쪽)

호치민은 세계 정세의 변화 방향과 프랑스의 민심에 깊은 이해를 가진 사람이었다. 프랑스와의 사이에는 반세기 넘는 식민 지배의 원한이 있었지만, 식민 지배가 오래갈 수 없으리라는 믿음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이웃의 대국이며 베트남에도 많은 교민을 갖고 있는 중국의 영향력이 훨씬 더 심각한 문제라고 그는 인식한 것이다.

호치민이 제창한 프랑스와의 화해 노선에 따라 1946년 3월 6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은 프랑스와 임시 협정을 맺었다. 프랑스군을 불러들이는 이 협정에 불만을 품은 민족주의자들은 호치민을 '비엣 지안(越奸, 민족반역자)'이라 부르기도 하고 협정을 선포하는 대중 집회장에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이 집회에서 호치민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에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강대국은 단 한 나라도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프랑스와의 타협은 우리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국제 무대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입장을 강화하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는 자유국가가 되었습니다. 합의서에서 선언했듯이 프랑스군은 점차 베트남에서 철수할 것입니다. 우리 동포는 냉정을 유지하고 규율을 지켜야 하며, 통일과 단결을 강화해야 합니다." (<호치민 평전>, 540쪽)

연설 끝머리에 호치민은 이런 서약을 붙였다.

"나 호치민은 평생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동포들과 함께 싸웠습니다. 나는 조국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호치민이 추구한 프랑스와의 타협안은 베트남의 즉시 완전 독립을 주장하지 않고 '프랑스 연방' 안의 제한된 주권을 가진 국가로 출발해서 점진적으로 완전 독립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에도 이 방침을 지지하는 만만찮은 여론과 정치 세력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의 정치 분위기가 좌우를 오가며 흔들리고 있어서 확고한 결정을 얼른 내리기 힘들었다. 드골은 대(大)프랑스에 집착했다. 그는 베트남의 위상에 대해 '독립'은커녕 '자치(autonomie)'란 표현까지 거부했다. 1945년 11월 드골 정권이 물러나고 좌파 정권이 들어섰다가 1946년 6월 우파로 넘어가고 11월에 다시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다. 프랑스의 대 베트남 정책 결정이 늦어지는 동안 식민지 유지에 이해관계가 걸린 식민주의 세력은 대결 상황 심화를 계속해서 획책했다.

베트남과 프랑스가 평화로운 관계를 맺을 기회는 1946년 7월 6일부터 두 달간 파리 근교에서 열린 퐁텐블로회담이었다. 호치민은 대표단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회담 기간 동안 프랑스에 체류하며 회담의 성공을 위해 힘을 쏟았다. 회담이 무위로 끝나고 대표단이 귀국한 직후인 9월 14일 호치민은 회담의 완전 결렬을 피하기 위해 잠정 협정에 서명했다. 무력 항쟁이 진행 중이던 코친차이나의 휴전이 10월 30일 발효하게 하고 이듬해 1월부터 협상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새벽 3시에 회담을 끝내면서 호치민은 프랑스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방금 내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습니다." (<호치민 평전>, 563쪽)

양보만 하고 소득이 없었던 데 대한 한탄이었다. 귀국하면 '비엣 지안' 비난이 쏟아질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귀로의 호치민은 비행기 편을 거절하고 군함을 택해 9월 18일 프랑스를 떠나서 10월 20일 하이퐁에 도착했다. 이 긴박한 시점에서 그가 귀로에 시간을 끈 이유는 아직까지도 석연히 풀리지 않고 있는 의문이라고 한다.

근 5개월간 호치민이 떠나 있는 동안 임시 정부에서는 연합 세력이 약화되고 강경파 베트민의 주도권이 강화되어 있었다. 호치민은 귀국을 늦추고 있는 동안 이 변화가 진행되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퐁텐블로회담의 실패로 이제 독립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그가 내린 것으로 보인다.

어느 전쟁에나 그렇듯 제1차 베트남 전쟁을 놓고도 "누가 먼저 쐈나?"를 많이 따진다. 1946년 12월 19일의 무력 충돌은 베트남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베트남군의 공격을 직접 불러일으킨 것은 협정을 어긴 프랑스군의 군사 행동이었다.

12월 17일 프랑스의 장갑차들이 하노이 시내로 진입하여 베트민 병사들이 그때까지 세워놓은 보루를 부수기 시작했다. 외인부대원들은 요새에서 공항으로 가는 길의 폴 두메르 다리까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프랑스 측은 시내에 다시 장애물을 세우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날 오후에 발표된 두 번째 최후통첩에서는 20일부터 프랑스 부대가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겠다고 선포했다. (<호치민 평전>, 585쪽)

그렇다고 프랑스 쪽에 모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12월 17일 프랑스군이 파괴한 하노이 시내 바리케이드는 프랑스군과의 대결을 위해 베트남군이 설치한 것이기 때문이다. 퐁텐블로회담이 실패로 돌아간 이상 호치민도 더 이상 강경파의 불만을 억누르고 프랑스와의 화해 노선을 계속 추구할 여유가 없었다. 최선의 전략을 짜는 길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에 이르기까지 호치민의 노력에서 무엇보다 두드러진 것은 그 현실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유연성이다. 인도차이나공산당을 해산하고(1945년 11월) 폐위된 바오다이 황제를 임시 정부 수석 고문으로 모시며 계급 투쟁이 아니라 민족 해방이 당면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미국의 역할을 끌어들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숙적인 프랑스의 현실적 위치를 인정함으로써 중국 등 다른 세력이 끼어들 위험을 없애고 프랑스와의 사이에서 갈등을 점진적으로 해소해 나가기로 한 결단이 놀랍다.

그런 식견과 노력, 그리고 그 지도력을 옹립한 베트남인의 단결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로부터 당시 아시아 약소민족에게 주어진 국제적 환경이 얼마나 엄혹한 것이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조선에게 주어진 환경도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인용한 신문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로 가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바로 가기 :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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