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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두렵기만 한 '마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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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과연 두렵기만 한 '마귀'인가?

[박동천 칼럼] 미국을 어떻게 봐야 하나

1. 이승만-박정희 시절 정권은 미국이 우리의 생명줄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인민에게 주입시키려 애를 썼다. 효과적인 주입을 위해서 지배 계급은 스스로부터 먼저 세뇌당하는 길을 선택했고, 따라서 맹목적인 친미는 오늘날까지도 이 나라 우익의 정치의식에서 중요한 기둥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 이데올로기는 곧바로 열혈 반미주의를 또한 낳고 말았다. 미국을 마치 자비심으로 충만한 천사처럼 그려놓은 교과서를 보고 생성된 초등학생의 감동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자행한 불의와 폭력을 접하게 된 청소년의 맘속에서 격렬한 반감으로 쉽게 전환된다. 베트남에서 한국군 일부가 저지른 폭행을 부끄러워 할 정도의 양심을 가진 청년이라면, 한국 전쟁 때 미군 일부가 양민에게 무슨 짓을 했었는지를 알게 되는 순간, 제국주의의 죄악에 치를 떨게 되고, 당연히 오늘날 제국주의의 원흉으로 미국을 지목하게 된다.

한국인 중에 정치가 지금보다 개선되리라 희망을 가지는 사람 자체가 별로 많지 않은 차에, 그나마 관심이 있다는 사람들끼리도 미국을 어떻게 볼지를 두고 서로 싸운다. 싸워도 심하게 싸운다. 개탄스럽게 흥미로운 것은 두 진영 모두, 스스로 자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지만 명시적 언행 아래 깔려있는 추정을 내 눈으로 헤집어보면, 미국을 무슨 마귀나 도깨비 비슷한 무척 두려운 상대로 본다는 것이다. 한쪽은 그러니까 그저 미국에게는 굴종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쪽은 그러니까 그런 미국과 접촉하는 면적을 지금보다 늘리면 안 된다는 입장이다.

"미국"의 국력이 "한국"보다 엄청나게 더 센가? "미국"이 심술이 나서 "한국"을 응징하고자 한다면, 경제든 군사든 "한국" 정도는 한 방에 날아가고 말 것인가? "미국"과 "한국"이 대등한 조건으로 국제 시장이나 국제 재판에서 붙으면 도저히 상대조차 안 되므로 결과는 미리 정해져 있는가?

이런 질문들을 (따옴표 달지 않고) 이렇게 양자택일로 물었을 때, 답변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 한, "한국"이 "미국"과 한판 붙어볼 수 있다는 대답보다는 "미국"에게 상대가 안 된다는 대답이 훨씬 더 많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위에 쓴 의문문에서 내가 달아놓은 따옴표에 주목해 보자. 특히 그토록 강하고, 보기에 따라서는 "악"하기까지 하다는, "미국"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미국은 강하다"고만 생각하고, "그때 미국은 뭘 가리키는지"를 묻지 않는 풍토병이 한국에는 있다. 이 병은 누구보다도 지식인들이 고쳐야 할 병인데,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도리어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이 병을 퍼뜨리고 악화시키고 있다. "미국"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와 관련해서, 근원적으로 잘못된 각도에서 접근하는 경향을 몇 가지 지적한다.

첫째, 미국은 한국에 비해 훨씬 다원적인 나라다. 물론 미국 사회에 대해서도 "파워 엘리트", "네오콘", "1퍼센트의 지배 계급", "기술 관료제", 등등을 고발하면서, 다원주의를 "신화"로 격하하는 반론은 적지 않다. 이 논쟁 자체는 충분히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와 비교했을 때, 미국이 한국보다 더 다원적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미국 정부의 정책에 미국의 시민 사회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한국의 시민 사회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지보다 넓고 크다.

둘째, 민족 간의 관계를 제로섬으로 바라보는 폐쇄적 보수주의자는 미국에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국제 관계를 논제로섬 상호 이익으로 바라보는 개방적 자유주의자의 비율이 한국에 비해 미국에서 더 높다. 미국이 과거에 한국에 제공한 군사적/경제적 원조는 분명히 자선 사업은 아니었고 자기네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믿음에서 이뤄진 것이 맞다.

그러나 "미국에게도 이익"은 "한국에게는 손해"와 같은 뜻이 아니다. 나는 1945년 이후의 한미 관계는 전체적으로 상호적으로 이익이었지, 한국이 일방적으로 착취당한 "식민지적 종속 관계"였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상호 이익의 관계를 이어가리라고 예상해도 틀릴 위험은 현실적으로 전혀 없다. 앞으로의 관계는 무엇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한국에게 미국이 중요한 정도에 비해 미국에게 한국이 중요한 정도가 훨씬 낮다. 한국의 외교 통상 상대국 목록에서 미국은 거의 고정적으로 수위를 차지한다. 반면에 한국은 미국의 목록에서 유럽, 중국, 중동보다 확실히 다음이며, 일본, 러시아, 인도, 라틴아메리카 등과는 경우에 따라 앞서기도 하고 뒤지기도 한다. 무슨 뜻이냐면, 미국은 1948년부터 지금까지 한국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수립된 어떤 장기적인 계획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

넷째, 미국의 정책은 전대에 확립된 어떤 금과옥조나 이념적 원칙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기보다는 주어진 상황에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는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될 때가 많다. 실용주의/공리주의의 정치의식이 한국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분포하는 때문이기도 하고, 정치 제도가 다원주의적/절차주의적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다섯째, 그러므로 미국과 한국이 총력전을 벌이면 이길 가망이 없다는 이유로 미국인 몇 사람의 이익과 한국인 몇 사람의 이익이 경쟁할 때에도 미국 측을 이겨낼 가망이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는 논리적인 오류일 뿐만 아니라, 지난 60년간의 경험과도 전혀 부합하지 않는 잘못이다.

2. 김기협은 서중석의 <6월 항쟁>(돌베개 펴냄)을 평하면서, "서중석의 미국 역할 경시는 균형을 벗어난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련 기사 : "1987년 6월 전두환은 왜 군을 출동시키지 못했나")

나는 김기협의 이 평이 전혀 공정하지 못하다고 본다. 그리고 위에 열거한 미국의 네 가지 특성을 김기협이 간과하고 단순히 "미국은 강대국"이라는 이미지에만 매몰된 탓에 공정성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서중석은 미국의 태도가 전두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미국 말고도 전두환에게는 여러 변수들이 영향을 미쳤다는 얘기일 뿐이다. 군부의 성향에 대한 불안감, 광주 학살 및 그 여파에 대한 기억, 이한기와 고건 등 관료들의 태도, 사생결단으로 대드는 시민 사회, 보수적 기독교와 가톨릭의 분위기 등이 그것이다.

김기협은 서중석의 이러한 주장을 두고 "미국 역할 경시"라고 불만스럽게 여긴다. 그렇다면 미국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했어야 균형 잡힌 역사 서술로 김기협을 만족시킬 수 있었을까?

첫째, 가령 미국이 전두환에게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경우를 한 번 상상해보자. 상상력을 조금만 더 발휘해서 두 갈래를 가정해 보자. 우선 미국이 "미군을 동원해서라도 진압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군을 출동 안 시키면 너는 끝"이라는 식으로 협박까지 했다면, 전두환은 틀림없이 군을 출동시켰을 것이다.

미국이 전두환을 이와 같은 식으로 (일시적으로) 움직일 영향력은 당시에 분명히 보유하고 있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김기협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한국의 인민이 조용히 진압당했으리라고는 결코 단언할 수 없다. 나아가 미군이 출동했다면, 모르긴 몰라도 미국 내를 비롯해서 전 세계 도처에서 미국 제국주의에 반발하는 폭동이 발생했을 것이다.

다음, 미국이 "군을 출동시켜도 우리는 묵인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면 어떨까? 나보고 말하라고 하면, 나는 이 경우 전두환은 "묵인"의 의미가 뭘지, 그리고 여전히 군이 출동한 다음의 후과가 어떨지를 가지고 상당히 고민했으리라고 본다. 서중석이 (내가 보기에 훌륭하게) 열거하고 있는 여러 가지 변수들은 모두 그 경우에도 전두환이 마냥 무시만 할 수 없었을 테지만, 특히 군부가 전면에 나섰을 때 자기가 여전히 그 군부의 지도자일지 아니면 숙청 대상이 될지는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즉, 이 정도만 되어도 전두환에게는 미국 말고도 고려할 변수들이 많았을 거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는 내 생각이고, 김기협은 아마도 생각이 다를 것 같다.

둘째, 방금 상정한 가정들은 현실성이 없는 얘기다. 즉,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에 대고 저렇게 노골적인 의사를 표현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국의 영향"을 논할 때에는, 미국 정부가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가운데 작용하는 영향력을 논해야 한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 정부가 많은 경우에 모호한 태도를 취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미국이 다른 나라의 정정을 사전에 예측해서 미리 입장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두고 보면서 기회주의적으로 대응한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가정해 보자. 릴리가 6월 19일에 전달한 레이건의 친서에 무슨 말이 적혀있든지 간에, 미국이 군 출동을 원치 않는다는 메시지는 여러 경로로 표현된 바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전두환이 군을 출동시켰다면 미국은 어떻게 나왔을까? 미국이 주한 미군을 동원해서 전두환 파의 군대를 저지했을 리는 만무하다.

공식적으로는 물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행한 사태에 심각한 우려" 따위 성명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조치는 별로 취하지 않고 관망하다가, 한국 안에서 누가 승자로 떠오르는지를 지켜봤을 것이다. 그리고 1963년 박정희 정권, 1980년 전두환 정권, 1998년 김대중 정권, 2003년 노무현 정권을 승인했듯이, 국내적으로 승자로 떠오른 권력을 승인했을 것이다.

무슨 뜻이냐면, 1987년 6월에 미국은 한국의 정정을 주도하기 위한 각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한국 내부의 세력 균형을 주시하면서 상황론적으로 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중석이 여러 가지 변수를 열거하는 까닭은, 미국이라는 변수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고도 말하지 않고 "가장" 중요했다고도 말하지 않는 까닭은, 미국의 태도가 다른 행위자에게 영향을 미친 만큼이나 다른 행위자들이 미국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기 때문이다.

내가 편역한 피터 윈치의 <사회과학의 빈곤>(모티브북 펴냄)에 상세하게 규명되어 있듯이, 나는 사회과학이라는 발상이 역사 서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사회과학적 프레임에 국한해서 생각하더라도, 전두환의 결정에 작용한 변수는 여러 가지고, 그 여러 변수들은 상호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서중석의 시각이 맞는다고 나는 판단한다.

미국의 영향이 여러 변수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했다든지, 또는 나아가 "결정적인" 변수였다고 주장하려면, 단순한 의심을 넘어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3.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거론한다. 이 글에서 내가 전개한 맹목적인 반미주의에 대한 비판은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한미 FTA를 찬성한다는 뜻으로 연결될 수 없다. 한미 FTA 문제에 대한 최선의 해법은 비준을 미루고 재협상을 시도하는 데 있다고 본다.

"재협상이 불가능하다"는 소리는 어불성설이다. 김종훈은 노무현 정부 때도 재협상은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이명박 정부 들어 미국 측이 요구한 재협상에는 순순히 응했다. 조약에 대한 국회의 비준 절차는 헌법 규정이고, 한국 국회가 비준하지 않는 조약은 발효될 수 없다.

단, 반대하는 측의 입장에서 한나라당이 강행 처리할 경우에 육탄으로 저지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가는 뒤통수를 맞기 십상이다. 한나라당 내에서 충분한 소수가 만에 하나 재협상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을 때, 또는 "날치기"의 후폭풍으로 내년 선거에서 민주 진보 연합이 집권에 성공했을 때, 그리하여 정국 주도권이 넘어왔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지금부터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

그때 다시 조건부 협상파와 원천 반대파가 안에서 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엉뚱한 세력이 어부지리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뒤통수"고, 내가 가장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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