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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ISD 결사 반대한 홍준표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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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ISD 결사 반대한 홍준표가 옳았다!"

[한미 FTA와 ISD·1] 벼랑 끝에 몰린 공공 정책

한국 국회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 동의안 처리가 임박하면서 투자자-국가 분쟁 해결 제도(ISD, 나는 이를 '투자자-국가 소송제'로 부르는 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맨 아래 상자에 그 이유를 명시했다)가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한미 FTA 협상이 개시된 2006년부터 ISD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었고, 심지어 2007년 5월에는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의 홍준표 대표도 CBS 시사자키와의 인터뷰에서 ISD가 "한국의 사법 주권 전체를 미국에 바치는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한 바 있다. (☞바로 보기)

5년이 더 지난 2011년 다시 ISD를 둘러싼 논란이 커지자 외교통상부는 10월 31일 '한미 FTA의 공공 정책 자율권 확보 현황'이란 제목의 보도 자료를 내 "ISD로 인해 우리 정부의 공공 정책이 무력화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라고 진화에 나섰다.

ISD로 인해 공공 정책이 무력화될 수 있다는 주장과 그렇지 않다는 외교통상부의 해명, 누구 말이 옳을까? 내가 보기에 외교통상부가 발표한 공공 정책 자율권 확보 주장은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정작 해야 할 설명은 빼먹은, 그래서 우려를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ISD에 대한 우려에 대한 정부의 해명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ISD는 국제 표준이다. 둘째, 우리 기업의 해외 투자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써 ISD가 필요하다. 셋째, 공공 정책 재량권을 충분히 확보했기 때문에 ISD로 인해 공공 정책이 무력화되지는 않는다.

이 해명이 타당할까? 그렇지 않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정부의 해명을 역순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정부 해명의 마지막 부분 즉, 공공 정책 재량권 확보 여부는 ISD 논란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아래 표를 보자.

ⓒ남희섭

ISD는 한국이 협정문 제11장(투자)의 의무를 위반하였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자가 손실 또는 손해를 입은 경우에 제기될 수 있다(11.16조). 협정문 제11장에는 투자 보호를 위해 모두 7가지 의무를 열거하고 있는데, 위 표의 첫째 열은 이를 나타낸다.

위 표에서 첫째 행은 공공 정책의 대표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5가지(공공질서 유지, 사회 서비스, 환경, 보건의료, 교육)를 예시하였다. 표에서 녹색 칸은 유보된 의무를 말하고(O로 표시), 격자무늬 칸은 유보되지 않은 의무(X로 표시)를 말한다. 맨 아래 열은 유보된 의무라 하더라도 여기에는 각종 제한이 따른다는 점을 보여준다. (제한 사항은 너무 많아 표에 넣지 못했다. 자세한 것은 뒤에서 설명한다.)

이 표를 통해 한 눈에 알 수 있듯이, 공공 정책에 대한 유보는 ISD 적용 대상이 되는 7가지 의무 중 일부 의무에 대해서만 적용된다. 나머지 의무에 대해서는 유보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공공 정책이라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조치로 인해 손실을 입었다고 판단하면 미국 투자자는 얼마든지 ISD를 제기할 수 있다. ISD가 공공 정책을 무력화하는 첫 번째 경로는 바로 이곳이다. 그런데 정부의 발표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여태까지 정부는 공공 정책이 포괄적으로 유보되어 있다고만 했을 뿐, 유보하지 않은 의무가 있다는 점은 설명한 바가 없다.

지금까지 막연하게 '유보'란 용어를 사용해 왔는데, 정확하게 어떤 내용이 유보되었는지는 협정문의 <부속서>를 보아야 알 수 있다. 한미 FTA에서 유보는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현재 유보'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 유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재 유보는 협정문의 <부속서 I>에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시행하고 있는 공공 정책 중 협정상의 의무와 합치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유보를 했다는 말은 협정상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보류했다는 의미이므로 현재 유보에 기재되어 있는 공공 정책은 한미 FTA가 발효되더라도 그대로 시행할 수 있다. 다만 현재 유보에 기재되어 있는 공공 정책은 규제를 한 번 풀면 이를 되돌릴 수 없다는 제한(이른바 '역진 금지(ratchet)')이 따른다. (이런 점에서 한미 FTA의 역진 금지가 우리 정부가 취하는 어떠한 조치에도 다 적용되는 것처럼 설명하는 것은 틀렸다.)

역진 금지가 적용되는지 아닌지는 <부속서 I>의 현재 유보 내용을 보아야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현행 '영진법(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은 "영화 상영관 경영자는 연간 대통령령이 정하는 일수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바로 스크린쿼터인데, 영화 상영 서비스에 진출한 미국 투자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시장 접근을 제한하는 조치로 협정 위반이다.

그런데 <부속서 I>에서 "대한민국 내 영화 상영관 경영자는 각 상영관에서 연간 73일 이상 한국 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유보를 달았기 때문에, 비록 협정 위반이지만 한국은 스크린쿼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다만, 협정에서 유보한 73일을 현행 법령에서 50일로 줄이면 다시는 73일로 되돌릴 수 없다(바로 역진 금지 조항 때문이다).

현재 유보와 달리 미래 유보는 역진 금지가 적용되지 않고 한미 FTA에서 약속한 의무를 앞으로 이행하지 않아도 되는 분야를 열거한 것으로 모두 44개 분야가 <부속서 II>에 기재되어 있다. 다시 위 표로 돌아가서, <부속서 II>에 기재되어 있는 44개 분야 중 대표적인 5개 분야만 살펴보더라도, 협정문 제11장(투자)의 7개 의무 중 2개, 많아야 4개 의무만 유보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분야에서도 유보되어 있지 않은 대표적인 의무 2가지가 바로 11.5조(최소 기준 대우)와 11.6조(수용 및 보상)의 의무이다. 대부분의 ISD 사건에서 투자자는 이 의무 위반을 근거로 삼는다.

가령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따른 ISD 사례를 분석해보면, 아래 표로 정리한 것처럼, 2010년 10월 1일 현재 알려진 중재 청구 66건 중 투자자가 어떤 이유로 ISD를 제기했는지 알 수 있는 56건에서 '최소 기준 대우' 위반을 주장한 ISD가 모두 45건(80퍼센트)에 달한다. (이 통계는 Michelle E. Gray, 'Broadening NAFTA Article 1105 Protections: A Small Price for International Investment', Houston Law Review Vol. 48 (Spring 2011), 418-420면과, Canadian Centre for Policy Alternative, "NAFTA Chapter 11 Investor-State Dispute (to October 1, 2010)를 통해 내가 분석한 것이다.)

ⓒ남희섭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최소 기준 대우'와 '수용 및 보상' 의무는 유보를 하지 않을까? 정부는 이런 의무는 성질상 유보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최소 대우 기준'이란 "외국인의 대우에 대한 국제 관습법상 최소 기준"으로(협정문 제11.5조 제2항), "외국인의 경제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모든 국제 관습법상 원칙"을 말한다(부속서 11-가).

'수용 및 보상' 의무란, 쉽게 설명하면, 국가가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고 외국인 투자자의 재산권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하면서, 미국 투자자에게 국제적으로 인정되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대우할 수 없다거나, 미국 투자자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의무는 원래 유보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정부 주장의 골자다.

나도 이 주장에 동의는 한다. '최소 대우 기준'과 '수용 및 보상'은 그 의무의 본질상 이를 포괄적으로 다 유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기준이 만들어진 역사적 배경을 보면 정부의 설명처럼 그 본질이 순수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헌법을 들여다보면 과연 '최소 대우 기준'과 '수용 및 보상' 의무의 유보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의문이 생긴다.

'최소 대우 기준' 의무를 중심으로 이 의문을 풀어보자.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최소 대우 기준'은 외국인의 경제적 권리와 이익을 보호하는 모든 국제 관습법상의 원칙을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른 의무를 준수하는 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말이 좋아 '국제 관습법상의 원칙'이지 이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관습법이란 말 그대로 별도의 법 규정이 존재하지 않고 막연히 관행으로 굳어져 인정되는 법규이다. 관행으로 굳어져 인정되는 법규가 무엇인지는 누군가의 해석을 통해 확인이 되어야 비로소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수도를 서울로 한다는 관습 헌법이 존재한다는 점이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있은 다음에야 확인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다.

ISD의 경우 국제 관습법을 확인해주는 사람은 바로 통상법을 전공한 법률가들이다. 이들이 해석을 통해 확인하는 국제 관습법은 때로는 법을 새로 만드는 입법 기능에 이르기도 한다. ADF 사건에서도 중재판정부는 "최소 기준 대우는 정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대적 맥락에 따라 변천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다. (ADF v. United States, ICSID Case No. ARB(AF)/00/1 (NAFTA) (판정일: 2003년 1월 9일) 단락 180.)

ⓒ뉴시스

둘째, 한미 FTA와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우리 헌법에서 추구하는 공공 정책들이 과연 국제 관습법상 최소 기준을 만족한다고 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가령 우리 헌법 제123조 제3항은 "국가는 중소기업을 보호·육성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그리고 경제 민주화 조항으로 불리는 헌법 제119조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 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 중소기업 보호 조항과 경제 민주화 조항에 따른 법률로는 유통법(유통산업발전법), 상생법(대·중소기업 상생 협력 촉진에 관한 법률)이 있다.

유통법에 따르면 시장, 군수, 구청장은 전통 상업 보존 구역 내에는 대규모 점포가 입점하지 못하도록 제한할 수 있고, 상생법에 따르면 대기업의 사업 확장으로 인해 중소기업의 경영 안정에 현저하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경우 중소기업청장은 대기업의 사업을 축소하거나 사업 진출을 연기하도록 권고·명령할 수 있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도 있다.

이처럼 기업을 대기업과 중소기업으로 둘로 나눈 다음 대기업에 대해서는 입점을 못하게 제한하고 사업을 축소하도록 명령하는 제도가 과연 국제 관습법으로 인정될까? 내가 아는 한 이런 국제 관습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구나 사업 조정 명령에 대해 형사 처벌까지 하는 것은 국제 관습법에 따른 최소 대우라고 보기 어렵다.

만약 미국 투자자가 한국 대기업의 사업에 투자를 했는데, 상생법에 따른 한국 정부의 조치로 인해 사업 진출이 막힌다면 미국 투자자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하여 이 조치를 무력화할 수 있다. 한미 FTA가 보장하는 '최소 대우 기준'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면, 한국 정부는 협정 위반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의무는 처음부터 유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소 대우 기준' 유보를 통째로 포기하면, 한국에 진출한 미국 투자자는 우리 헌법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결과가 생긴다. '최소 대우 기준'을 투자 협정에 집어넣고 ISD 대상으로 삼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투자자는 투자 유치국의 국내법을 따르지 않기 위해서 그 의미와 내용이 애매한 '국제 관습법에 따른 대우'라는 조항을 만들었던 것이다. (계속)

ISD는 소송이 아니다!

흔히들 ISD를 '투자자-국가 소송' 또는 '투자자-국가 제소'라고 부르는데, 이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ISD는 소송과는 전혀 다른 사적 분쟁 해결 제도이기 때문이다. 영문 ISD(Investor-State Dispute)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투자자-국가 분쟁'이다. 이 분쟁을 해결하는 방식은 소송이 아니라, 중재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중재'란 '제3자가 분쟁 당사자 사이에 끼어들어 분쟁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이다. '중재'와 '소송'은 2가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첫째, 중재는 당사자가 선택하는 사적 분쟁 해결 방식이기 때문에 중재 판정부를 분쟁 당사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구성한다. 한미 FTA에 들어있는 ISD에서도 중재 판정부를 구성하는 3인의 중재인 중 한 명은 투자자가 임명하고 다른 한 명은 당사자인 국가가 임명한다. 마지막 한 명이 의장 역할을 맡는데, 의장 역시 양 당사자가 합의하여 임명한다(협정문 제11.19조).

이처럼 중재 절차에서는 중재 판정부를 당사자가 임의로 구성하는 것과 달리, 소송에서는 당사자가 재판부 구성에 관여할 수 없다. 법원의 판단은 공권적 판단이기 때문이다. ISD에서 중재인을 당사자들이 정하도록 했지만 아무나 중재인으로 임명할 수는 없고 중재인 명부에 등록된 사람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 현재 세계은행 산하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ICSID) 절차에 따른 ISD에서 당사자들이 임명한 중재인 중 48퍼센트가 서유럽인이고, 23퍼센트가 북미인이다. 아시아 태평양 출신 중재인은 8퍼센트에 불과하다.

둘째, 중재는 사적 분쟁 해결 방식이기 때문에, 분쟁 당사자들이 소송이 아닌 중재 절차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기로 합의를 해야만 절차가 시작된다. 소송을 제기하면서 피고가 될 사람과 미리 합의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중재와 소송의 차이점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중재는 내가 합의하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는 절차이다. 그런데 한미 FTA는 이 합의 권한을 박탈했다. 국가는 투자자가 요구하는 중재 절차에 동의하지 않을 재량권이 없다는 말이다(협정문 11.17조).

이건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미국 투자자가 한국을 상대로 ISD를 제기하면, 한국은 일단 분쟁 절차에 끌려가야 한다. 한국 정부가 아무리 공공 정책을 위한 조치라고 주장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모든 결론은 중재 판정부의 손에 달려 있다. 결국 공공 정책의 운명은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의 3인의 중재인에 의해 판가름 난다.

이처럼 공공정책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으로 중재 절차가 진행되기 때문에, 절차로만 보면 협정에서 공공 정책에 대한 예외나 유보를 둔 것과 두지 않는 것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결과가 생긴다. 원래 ISD에서도 중재 합의에 대한 국가의 권한을 보장하고 있었는데, 이를 박탈한 최초의 FTA가 바로 1994년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고 한미 FTA는 바로 NAFTA를 모델로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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