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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안철수와 이명박은 샴쌍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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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진실…안철수와 이명박은 샴쌍둥이다!

[기고] "대통령 안철수" 타령하는 우석훈에게 묻는다

이 글은 지난 9월 14일 <프레시안>에 실린 우석훈의 칼럼 "대통령 안철수를 상상해보았는가?"에 대한 반론이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붓을 들었기 때문에 반론으로서 시기를 놓친 감이 있지만 칼럼에서 보여준 '우 선생의 꿈'이 정치의 계절을 맞아 안철수 현상만큼이나 폭발성을 가진 점에서 비판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 우석훈이 꾸는 꿈은 정부 운용과 행정 과정에서 일방주의가 해체되고 그래서 국회나 정부 공청회에서 격렬한 논쟁은 있을지언정, 길거리에서 경찰과 마주서고, 대통령이 경찰청장을 자기 사람으로 앉히고, 그는 충성을 다하기 위해 시민들을 때리는 상황이 없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석훈은 심지어 구한말 나라의 멸망에서 일제시대, 한국 전쟁 군사 정권을 거쳐 이명박의 4대강 사업까지 암울했던 한국 근현대사를 거치는 동안, 안철수처럼 완전체에 가까운 상징을 가진 영웅은 일찍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그는 이런 상징성이 안철수가 우리에게 보여준, 소통을 넘어선 공감의 경지 때문이라고 하면서 그것은 이명박식 일방주의에 환멸을 느낀 70퍼센트의 국민들에게 '과정의 정치'에 대한 상상과 희망을 안겨주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과정의 정치란 일방주의 대신에 토론하고 논의하고 공감대를 넓혀서 같이 결정하는 정치를 말한다.

나는 먼저 안철수가 언제 우리한테 그런 공감의 경지를 보여줬는지 묻고 싶다. 물론, 백신 분야에서 그것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지만 음악가도 화가도 작가도 학자도 사회 활동가도 자기 분야에서 그렇게 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정치 분야로 한정하지 않는 그의 평가는 지나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석훈은 설령 안철수의 이미지가 허상이라 하더라도 그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를 열고 싶은 사람들의 열망은 결코 허상이 아니라고 강조함으로써 자신의 과대평가를 정당화하고 있다.

나는 대중이 열광하는 안철수의 이미지가 허상이며 우석훈의 꿈도 허상임을 이 자리에서 밝히려 한다. 동시에, 허상은 허상일 뿐 제거돼야 마땅하고 그래야만 새 시대가 열린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다. 허상을 미화하는 것은 여론을 오도하는 심각한 사회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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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은 '안철수 현상'이 이명박 식 일방주의에 대한 대중의 반발이라고 진단한다. 나 역시 같은 의견이다. 하지만, 그 반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외면할 경우 이미지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은 압도적인 차이로 당선됐는데, 이때 이명박에 대한 열광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노무현 식 정치에 대한 반발이라고 간단히 처리해버린다면 안철수 현상도 그렇게 대단한 것은 못되지 않을까?

나는 과거 이명박에 대한 열광이 허상에 기초한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이 허상을 이미지라고 부르고 이미지는 사회적 원인을 외면하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현재의 안철수 현상이 과거 이명박 현상과 마찬가지로 이미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본다. 우석훈이 말하는 안철수 현상을 100퍼센트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케팅에서 시장의 요구(needs)와 콘셉트가 중요한데, 이것들은 한마디로 이미지 장사를 위한 핵심 요소이다. 안철수와 이명박은 정치 시장의 요구에 적합한 콘셉트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이때 요구와 콘셉트는 시장의 논리에 입각해 있지 정의라든가 자유라든가 권리라든가 하는 사회적 원인에 서있지 않다. 시장의 논리는 이익의 관점이요 사회적 원인에 대한 탐구는 권익의 관점이다.

자연권은 이익의 관점을 배제한 '자유'의 지평에서 성립한다. 이로부터 이익과는 다른 권익이 출현하는 것이다. 권익이 자연권에 근거함을 보여주는 알기 쉬운 예로 생존권이 있다. 생존권이 이익이 아니라 권익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장의 논리는 생존권을 권익이 아닌 이익으로 취급함으로써 '사회적 원인' 밖에서 선험적으로 주어진 규범적 도덕을 앞세워 자신의 이익을 관철한다.

나는 좌파를 자처하는 우석훈이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익의 관점에 서있다고 본다. 따라서 나는 안철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안철수 현상을 극렬 옹호하는 우석훈의 견해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 안철수 서울대학교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원장은 2008년 5월부터 현재까지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 직속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이다. 2009년 3월 23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4차 미래기획위원회 회의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과 안철수 원장.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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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은 안철수에게 희망을 보는 사람들이 정당 정치를 혐오하는 면에서 무당파의 성격이 강할 수는 있어도 탈정치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당 정치에 대한 혐오가 탈정치적 의식 상태 위에 서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탈정치는 정치를 혐오하는 현상과 무관심한 현상으로 갈려 나타난다. 이미 우리는 후자가 대세를 이루는 민주 정부 10년을 경과한 뒤 이명박 정권에 의해서 전자가 대세를 이루는 현상을 경험하고 있다.

우석훈의 다음 말을 들어봐도 민주화와 국민 소득 2만 달러 시대를 맞아 무관심한 형태의 탈정치 현상이 한국 사회에 나타난 게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보통 국민 소득이 높아지면 점점 더 정치에 관심이 없어지게 되고 투표율도 낮아지게 된다. 사실 국가가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면 누가 통치하든지, 약간의 정책적 방향은 바뀌어도 사회적 근간은 바뀌지 않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내가 보기에 탈정치 현상은 대의 민주제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왜냐면, 대의 정치에서는 일반 대중들이 수많은 사안별 정책에 직접적으로 여론을 형성할 역량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전문가들에게 위임하기 때문이다.

사실 말이지 우석훈의 꿈인 "정부 운용과 행정 과정에서 일방주의가 해체되고, 그래서 국회나 정부 공청회에서 토론하고 논의하고 공감대를 넓혀서 같이 결정하는 '과정의 정치'가 이루어진다" 한들 그게 일반 대중의 진정한 참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라'는 일방주의가 해체될 수 있을까? 이 또한 온건한 일방주의가 아닐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프레시안>에 "유언비어의 사회학"이란 제목으로 상세히 기술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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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치에 대한 혐오는 마치 그릇된 종교가 사회의 차별과 부조리, 모순의 해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외려 사회 현실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겨 피안의 환상을 불어넣음으로써 몸을 살찌우듯이 그러한 목적을 가진 자들에 의해 조장된다.

그자들은 누구인가? 정치에 대한 불신에 비례해서 재벌, 거대 언론, 권력가들의 활동 폭이 넓어지고 그에 따라 세력 또한 놀랍게 비대해진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이 일을 할 엘리트들을 생산하고 앞세운다.

이 하수인들은 현실에 발을 담그지 않고 구름 위에 앉아서 도덕적 비난을 일삼는 자들로, 좁게는 오피니언 리더들, 넓게는 지식 엘리트들이다. 이들은 서양 중세 사회의 이데올로기 담당자들인 성직자들에 비유할 수 있다. 정치에 대한 혐오는 실제로 정치인보다는 이 하수인들이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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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은 지금 안철수에게 환호하거나 지지를 보내는 사람들은 박정희 망령과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박정희의 아바타와 박정희의 딸만 있는 선택지, 그리고 절대로 그들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아 보이는 무기력한 민주당 후보들, 그 속에서 70퍼센트에 가까운 국민들이 지난 4년 동안 가졌던 절망과 무기력증, 그게 안철수라는 심지를 만나서 활활 타오른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우석훈이 말한 사람들이다.

과연 그런가? 내 판단으로는 그 70퍼센트가 박정희의 망령과 싸우기는커녕 최소한 이들 중 반 이상은 역대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를 가장 훌륭하다고 꼽을 것이고 나머지 상당수도 박정희가 경제를 일으킨 대통령으로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박정희와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자신의 처지와 싸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다수가 4년 전 이명박에 열광한 이유는 자신의 경제적 처지가 상승하기를 원해서였을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릇된 종교에 현혹당한 신자들처럼 피안의 세계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 피안이 이들이 이미지로 열광하는 예비 정치인 안철수란 콘셉트이다.

이미지는 신체에 찍힌 자국, 흔적 혹은 인상일 뿐으로 사유 개념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사유는 문제에 대한 사회적 원인을 찾을 때 일어난다. 이미지로서의 안철수는 지지자들의 신체적 욕구에서 오는, 즉 이들의 절박한 처지에서 오는 혼란한 관념일 뿐이다. 정치는 이 혼란한 관념을 적실한 관념으로 바꾸어내는 힘이다. 그것은 오직 혼란한 관념에 사회적 원인을 찾아주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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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은 이미 안철수가 우리에게 충분한 것을 주었다고 말한다. "안철수는 상상 속의 혹은 무의식 속의 금제를 깨고,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미래를 상상하고 희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상상의 힘이 현실 권력이 되는 그런 달콤하고도 황홀한 현실을 우리는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상상'은 흔히 이야기되듯 그렇게 멋진 것이 아니고 정신이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일컬을 뿐이다. 상상이 사회적 원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그 다의성(多義性)은 백화점에 진열된 다양한 상품들과 같은 것으로 소비자가 아닌 판매자에게 이익을 줄 뿐이다. 반면에 상상이 사회적 원인과 조화를 이루면 구체적 진실이라는 일의성(一意性)을 확보하게 되고 상상하는 자의 권익에 힘을 준다. 이 경우에 한해 '상상력이 권력이다'라는 68 혁명의 오래된 구호가 빛을 발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상에 사회적 원인을 찾아주는 것이 새 시대의 정치적 비전일 텐데 그러려면 토론이 아니라 현장의 구체적 요구가 대리인의 매개 없이 직접 표출될 수 있는 출구가 마련돼야만 한다. 정당이 이 출구 역할에 진력함으로써만 우석훈이 말하는 진정한 공감 혁명의 정치가 실현될 것이다. 언제나 사람은 자기 이야기를 자기가 하면서 함께 공동의 문제를 풀 수 있을 때 이미지가 아닌 실제적인 해결을 볼 수 있고 사회의 공감력 또한 가장 높아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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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은 안철수 현상을 보면서 한국에서 박정희 시대는 다시 오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다. 지금 20대~30대가 문화적으로 그런 카리스마 통치와 일방주의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 세대에게 지나친 기대를 하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세대별로 볼 때 20~30대는 탈정치 현상을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고 있다. 이는 이들이 이미지 세대라는 것과도 무관할 수 없다. 성급한 기대에 앞서 이 세대가 사회적 원인을 직시하고 거기서 해결의 방도를 찾는 정치적 대화와 활동에 더 힘쓰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우석훈이 이명박 식 일방주의의 종식과 과정의 정치를 희망하는 것은 시대의 대세다. 다만, 내가 제기하는 것은 이를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실제의 정치로서 풀어가자는 것이다.

정치는 정치가들만이 하는 게 아니다. 정치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 속에 존재한다. 대의 정치란 편의상 일반 시민들의 직접 정치를 정치가가 대행하는 것에 불과하다. 주권자가 시민이란 불가침의 진실이 무너질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정치가 썩었다면 우리 생활이 썩은 것이기 때문에 신기루 같은 인물의 이미지에서 희망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직접 나서서 썩은 정치를 개선해야 한다. 이명박 식 공포와 연쇄된 안철수 현상의 '희망'은 미신임에 틀림없다. 그 희망이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없게 포로로 사로잡기 때문이다. 마치 그릇된 종교가 사랑과 행복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등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정치는 이러한 미신을 타파하는 적극적인 행위이다.

현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사회적 원인을 제거하지 위해서는 소통과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이야말로 정치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포와 연쇄된 희망'의 정체—'미신'—를 폭로하는 것이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자리에서는 이것만을 말하겠다.

우리가 정치를 허상에 파는 일을 부지불식간에 행하고 있다는 자각이야말로 안철수 현상이 우리에게 주는 진정한 교훈이다. 허상을 통해 거대한 이익을 독점하는 세력과 대결함으로써 우리는 만신창이가 된 정치를 다시 살릴 수 있고 동시에 우리의 고통을 기쁨으로, 우리의 무기력을 비전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이 21세기의 새로운 정치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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