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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공산주의자는 개다" 외친 사르트르에게 카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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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공산주의자는 개다" 외친 사르트르에게 카뮈는…

[프레시안 books] 로널드 애런슨의 <사르트르와 카뮈>

개인의 삶은 자신의 의지와 아무런 상관없이 시대적인 상황에 의해 쉽게 급류에 휩쓸린다. 그 급류가 전쟁과 같은 대대적인 폭력일 때, 개인의 도덕적인 판단과 그에 따른 행동은 급작스럽게 방향을 바꿀 수 있고, 심지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그 반대로 그동안 드러내지 않았던 순종적인 굴욕의 태도를 드러낼 수 있음은 물론이다. 요컨대 집단적으로 강박되는 한계 상황 속에서 각자는 자신의 노골적인 존재 방식을 나름대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940년대 프랑스가 그러한 상황이었다. 파시즘의 정치 군사적 극치인 히틀러의 제3제국이 프랑스 대부분을 장악했고, 그에 따라 단순히 부당한 침략과 점령에 대한 저항뿐만 아니라, 각 개인의 삶을 전체적인 집단적 광기 속으로 몰아넣는 파시즘 자체에 대한 저항이 문제로 등장했다. 이럴 때 지성인들이 과연 어떻게 대응하는가 하는 점은 사회 역사적인 삶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든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지성인이란 항상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가치를 궁구하고, 그 의미와 가치가 실제의 현실과 어떻게 조화·대립되는가를 미세하게 살펴, 언제든지 삶과 대립하는 현실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태도를 취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1940년대 프랑스에서 문학 및 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 두 인물을 들자면 사르트르와 카뮈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카뮈는 1942년 소설 <이방인>을 출간함과 동시에 레지스탕스 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시작했다. 1943년 지하 방에서 비밀리에 발행되는 레지스탕스 신문 <콩바>의 편집장으로서 온갖 위험을 무릅쓴다. 이 당시 사르트르는 정확하게 정치적인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 대신 1938년 문제가 된 소설 <구토>에 이어서 1943년 프랑스 실존 철학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존재와 무>를 출간해 일약 최고의 지성으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로널드 애런슨 지음, 변광배·김용석 옮김, 연암서가 펴냄). ⓒ연암서가
카뮈는 <이방인>을 통해 냉담하기 이를 데 없는 부조리한 존재인 '뫼르소'라는 인물을, 그리고 1947년 <페스트>를 통해 그러한 부조리한 냉담함을 지니면서도 일체의 이데올로기적인 강압을 벗어나 함께 연대함으로써 부조리하기 이를 데 없는 사회의 현실에 저항적으로 참여하는 존재인 '리외'라는 인물을 그려냈다.

사르트르는 카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하고 탁월한 철학서 <존재와 무>를 통해 절대적 우연성에 입각한 존재론을 펼쳐 보이면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존재론적인 욕망에 시달리는 현존적인 인간의 존재를 그렸고, 1960년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통해 사회 역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혁명적 개인으로 거듭나며, 그 혁명적 정신을 통해 어떻게 혁명적인 집단을 형성할 수 있는가를 그려냈다. 그런가 하면, 전쟁 이후 해방된 프랑스에서 카뮈는 계속 <콩바> 일을 하고, 사르트르는 새롭게 프랑스 지성을 향도하는 잡지 <현대>를 창간하여 책임을 지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두 지성인의 사상적인 행보가 엇비슷해 보이고, 그래서 항간에서는 둘 모두를 '실존주의'의 거장으로 그리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두 사람은 함께 술도 마시고 정치 상황을 의논하기도 하고, 때로는 엇갈리는 애정 관계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프랑스 공산당에 대해서도 둘이 공조하여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결국 사르트르와 카뮈는 특히 공산주의, 스탈린의 소련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과 관련하여 서로 완전히 대립되는 입장을 취한다. 그것은 특히 사르트르가 급선회했기 때문이다.

그 중심 문제는 '폭력'이었다. 카뮈는 공산주의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대대적인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다고 하여 완전히 반공주의 입장을 취했다. 카뮈는 정치적 폭력 일체를 거부했고, 공산주의를 문명의 질병이고 현대의 광기로 여겼다. 심지어 카뮈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신념도 대화도 믿지 않는다"라고 아예 선언해버렸다. 그 바탕에는 카뮈의 견결한 도덕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카뮈는 오로지 혁명이 아닌 '반항'만을 주장한다.

그런 반면, 사르트르는 늘 견지해 오던 철저한 반자본주의적인 입장을 바탕으로 특히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인 1952년에 이르러 공산주의적인 대의명분에 동의를 천명하면서 "반(反)공산주의자는 개다"라는 극적인 표현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사르트르는 1954년 12월 불소친선협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면서, 소련과 중국에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카뮈가 현실주의에서 개인적 도덕주의로 돌아선 반면, 사르트르는 개인적 도덕주의에서 사회적 현실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급기야 1956년에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에서 민족해방전선을 중심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 카뮈는 프랑스 국기 아래에서 두 민족이 동등한 입장으로 살아갈 수 있는 화해를 주장하면서 알제리가 추구하는 민족의 독립을 열정적인 문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 사르트르는 알제리의 민족해방전선의 폭력적인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알제리에서 자행되는 프랑스인들의 폭력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카뮈의 생애 최고의 오류였다.

사르트르와 카뮈, 종전 이후 전 세계적으로 지성적인 일반 대중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작가이자 철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사람은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을 준다는 데도 거부했고, 카뮈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이 과연 평생 동안 서로 어떻게 사상적인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들을 주고받으면서 화해·대립의 길을 걸었는가를 자세하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한 두툼한 책이 국내에 번역되어 최근에 출간되었다. <사르트르와 카뮈 : 우정과 투쟁>(변광배·김용석 옮김, 연암서가 펴냄). 지은이 로널드 애런슨은 미국에서 사르트르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한 시대의 역사가 숨 가쁘게 전개될 때, 진정 뛰어난 사상가들이 그저 골방에 갇혀 자신만의 세계를 구상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현실적인 상황의 구도가 어떻게 크게 바뀌는가에 따라 자신의 사상을 변경하기 마련이다. 심지어 목숨을 걸기도 한다. 물론 많은 경우, 자신의 사상을 떠받치는 기축은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상적인 기축을 바탕으로 급변하는 현실을 분석·진단해 내는 입장만큼은 바꿀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그런 만큼, 제3자로서 뛰어난 사상가들의 사유와 입장, 그에 따른 행동에 대해 그 함의를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분석해 낸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당시 상황을 거시적으로뿐만 아니라 미시적으로 알려주는 여러 문헌들을 샅샅이 섭렵해야 하고, 그 상황에 관련해서 해당 사상가가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대한 문건들을 일일이 검토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해당 사상가가 교류하고 있는 혹은 반목하고 있는 여러 다른 사상가들에 대해서도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하물며 이 책의 기획처럼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걸출한 사상가에 대해 그 관계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파악해서 평전을 쓴다는 것은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애런슨은 이 어려운 일을 자임하면서 그 과제를 충분히 의미 있게 수행하고 있다. 두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이 펴낸 저서와 문건을 일일이 다 읽고, 또 그 문헌들에 대한 세간의 비평을 최대한 검토한 뒤, 저자 나름의 최대한 공정한 입장에서 그 함의들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는 관련 문헌들의 주요 대목들을 가능한 한 길게 인용함으로써 독자 스스로 그때의 격렬한 상황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 수 있도록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저 사상적인 측면과 현실 정치와의 관계만을 살핀 것이 아니다. 여러 에피소드들을 곁들이고 있고, 상당히 현실감이 넘치는 문체로 표현을 하기 때문에 마치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쓰는 나는 때때로 왜 한국에는 사르트르나 카뮈와 같은 탁월한 작가 내지는 사상가가 드문가를 자문해 보기도 한다. 특히 철학 쪽에서는 이들이 보인 사회 참여적인 깊이 있는 글들을 쓰는 경우가 거의 없다. 철학을 전공하고 있는 나부터 부끄럽기 짝이 없다. 철학적인 사상은 현실의 역사에서부터 자양분을 얻지 않으면 결코 성숙할 수 없다. 심지어 나름의 존재론적인 기초를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애런슨의 <사르트르와 카뮈>는 특히 사회 참여적인 현실의 사상을 일구어내는 데 미력하기 짝이 없는 한국의 철학계에 일종의 경종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나름의 길잡이 역할을 하리라 여겨진다. 이 책의 번역자와 출판사에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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