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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부산 영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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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그날 부산 영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변방의 사색] 김진숙의 <소금꽃나무>

이제 김진숙을 읽자!

지난 주말,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를 다녀왔다. 지금껏 수도 없이 집회를 다녀왔지만, 정말 그런 집회가 없었다.

그날 그 야심한 시각에 방방곡곡에서 모여 날밤을 꼬박새운 1000명 넘는 사람들이 도무지 남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크레인 위에서 울려 퍼지는 김진숙의 연설을 들으며 나도 참가자들도 모두 울었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좋았고, 작업복 입고 곳곳에 앉아있는 한진중공업 조합원들을 얼싸안아 주고 싶을 정도로 연대의 정이 뜨거워졌다.

그랬을 것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지켜보는 일이 괴로웠다. 그래도 이곳이 사람 사는 세상인데, 이곳이 정말 사람이 사는 곳이 맞나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않은가. 의로움에 목마르고, 진실에 굶주린 사람들이 그렇게 먼 데서부터 반도의 맨 끝자락으로 모여들었다. 그날 만난, 서울에서 기자 노릇하는 내 친구는 "취재가 아니라, 그저 김진숙 선생께 위로받고 싶어서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도 그와 똑같은 마음이었다. 그날 함께 한 많은 이들이 또한 그랬을 것이다.

새벽 네 시가 다 되었을 것이다. 김진숙의 우렁찬 목소리가 우리들 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 군요~"로 시작하더니 "나의 등허리가 다 벗겨지더라도 꼭 만나게 해 주고 싶었다'던 조합원들을 가리키며 그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었다. 비해고자임에도 이 크레인을 지키고 있는 한상철, 안형백을 기억해 달라고, 잘린 동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함께 싸우는 최승철을 기억해 달라 했다.

귀때기 새파란 용역깡패들에게 내동댕이쳐지고, 언론이 버리고 정치가 버린, 평생 일했던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겨 공사판을 전전해야 할 운명에 놓인 이들의 이름을 그는 하나하나 불러 주었다. "저들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나는 저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백 가지도 넘는" 사람들이라면서. 그리고 우리의 귓전을 뜨겁게 울리던 마지막 외마디 기다란 외침, "투쟁~~~."

그의 연설이 끝났을 때, 나도 우리 주변도 모두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냥, 이 자리가, 그의 연설이, 그리고 함께 모인 우리들 스스로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진실이라는 것, 정의라는 것은 이 땅에서는 언제나 수렁 속에서 출렁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시절에 김진숙은 크레인으로 올라갔다.

2003년, 김주익이 129일을 버티다 끝내 세상을 버렸던 바로 그 85호 크레인이었다. 5년의 용접사 생활과 25년의 해고자 생활로 얼룩진 30년 한진중공업 노동자로서 마지막 결단이었다. 10년간 4000억 원이 넘는 흑자를 내면서도 수백 명을 퇴직시키고, 구조 조정에 관해 체결한 협약을 모조리 어기고, 끝내 170명을 정리 해고하는 회사, 그 170명을 자르면서도 자기들은 174억 원 배당금을 챙겨가는 회사,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회사에서 노동자로 해고자로 버텨온 30년 세월이었다.

1월 6일 새벽이었다고 들었다. 김진숙은 준비해 간 쇠톱으로 세 시간 동안 톱질을 해서 자물쇠를 잘랐고, 바깥에서 들어올 수 없도록 안에서 출입문을 용접해 버린 뒤, 크레인으로 올라가 8년 전 김주익이 목을 매단 바로 그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 위에서 김주익의 129일을 넘어 여섯 달을 버텨냈다. 상황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지만, 이제는 그가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 그에게 받았던 큰 위로를 깊은 감동을 시간이 흐르기 전에 기록해 두고 싶었고, 그가 호소한 연대의 힘이 더 커질 수 있는 길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김진숙의 책을 함께 읽자고 제안한다. 나는 김진숙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가 목숨을 걸고 호소하는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심장한 한 현실을 응시하는 것이 여전히 주저되는 이들에게 그의 책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 펴냄)를 소개한다. 단언컨대, 이 책은 <전태일 평전>만큼이나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자신, 이 책에서 고백하듯, 그의 삶에 던져진 가장 중요한 계기가 바로 <전태일 평전>과의 만남이었듯, 이 책은 <전태일 평전>의 속편으로 읽히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이 당대의 현실은, 그 누구도 이렇게 정직하고 절절한 언어로 채록한 바 없기에 소중한 기록물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현실을 조금도 피해가지 않고 맞서 온,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홀로 맞서고 있는 한 정신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김진숙이 담아낸 당대의 현실

▲ <소금꽃나무>(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외람되지만, 그는 글솜씨('솜씨'라고 표하는 결례를 용서해 주시길)가 참으로 훌륭하다. 이 책 2부에는 그가 쓴 인물 르포가 실려 있다.

그가 부산노동자연합의장이던 시절, <연대와 실천>이라는 노동 운동 기관지에 현장 노동자들을 취재하여 소개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섬세한 관찰력도 그렇고, 문장에 강건한 힘이 있다. 적절하게 맺고 끊어가면서 핵심으로 육박해가는 솜씨가 훌륭하다.

참혹한 공장 시절에도 책꽂이에는 이상과 김춘수를 꽂아놓았다던 왕년의 "문학소녀"였던 그가 옮겨놓은 노동자들의 언어에는 판소리 사설 같은 펄펄 뛰는 구어 감각이 살아있다. 대우조선 노동자 권동기 씨의 이야기를 옮겨놓은 대목을 보자. 그러고 보니 정말, '노동자 판소리' 같다.

나 말이 고 말이랑께. 우린 밀가루 개떡도 못 주는디 회사에선 자꾸 찰떡을 갖고 눈앞에서 흔들어 쌍께 언 놈이 우리 뒤에 줄을 슬 것이요. 속궁합 잘 맞는 새신랑 새각시 배꼽 맞추대끼 조합원허고 집행부 허고 딱 딱 맞아떨어져야 아그도 겁나게 맹김시로 진 밤 짜른 밤 날 새는지 몰를 것인디, 못된 시엄씨가 가운데 딱 낑기 갖고 손도 한나 못 잡게 혀 붕께 참말로 환장을 혀 불제. 오신 짐에 저 시엄씨나 논바닥에 피 뽑대끼 싹 잠 뽑아 가 불씨요이. (…) 인자 에지간한 건 다 물어봤지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딱 허고 싶은 건 대우조선 노존 꼭 일어슨다. 그라고 이 권동긴 대우조선에서 뻴쭝맞은 사람이 아니라 표준이다. 요말만 딱 쓰시요이. 딴 말 다 빼 불고. 인자 나 말 끝. 딸꾹.

난 이 책을 읽으며, 노동 운동가이기 이전에 탁월한 작가 김진숙을 생각했고, 비슷한 시절 비슷한 체험을 그려낸 작가 신경숙과 김진숙의 결정적인 엇갈림을 생각했다. 전라도 정읍에서 서울 구로공단으로 갔던 신경숙과, 강화에서 부산 영도조선소로 온 김진숙은 그 방향의 엇갈림만큼이나, 끝내 그들 두 사람의 삶의 방식도 언어도 극단적으로 엇갈린 것 같다.

대체로 그 시절의 삶을 우리 문학은, 이 당대의 언중들은, 신경숙과 같은 방식으로 '정리'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느꼈다.

어둡고 슬픈 가계, 청춘

그의 가계는 어둡고 슬프다. "딸년이 빨갱이가 되어 있다'는 기관원들의 엄포에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열 시간 넘게 걸려 딸을 찾아온 아버지와 부산역 대합실에서 마주앉은 장면은 슬프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고, 아버지의 손은 거북이 등껍질 같고, 마른 장작개비 같다. "다친 데는 없냐", "밥 굶지 마라" 딱 두 마디 하신 아버지는 다시 아픈 다리를 끌고 다시 강화로 돌아갔고, 얼마 뒤 쓰러졌고, 몇 년간 자리보전하다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하나에 딸만 줄줄이 나온 집안에서 그래도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을 아들은 연이은 실패 속에서 몸과 마음이 망가져버렸고, 노숙인이 되어 쪽방에서 소줏병을 끌어안고 죽었다. 가출에서 돌아온 조카는 몸과 마음이 이미 망가져 있었다. 동생이 죽어 가족들이 모였을 때, 강화 외포리 차부에서 점방을 하는 언니는 엄마를 대신해서 가게를 보던 딸이 전화로 "엄마 와사비 얼마야?"라고 물으면 통곡하다 말고 "큰 거? 짝은 거?"라고 묻고는 "짝은 건 820원" 대답하고는 다시 운다. 슬픈 가계, 우리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평균치를 밑도는, 어둡고 슬픈 가계도이다.

김진숙은 열다섯 살에 가출을 했다. 가난한 살림과 청춘의 방황이 모두 도졌을 것이다. 입학식날 교복을 못 입고, 육성회비를 제 날짜에 못 내고, 송아지가 아파 학교를 못 갔지만, 그보다 힘들었던 것은 그 누구도 자신에게 "그래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열다섯 살, 제까짓 게 외로움이나 패배가 뭔지 알겠나 싶은 그 나이에, 극렬히 외로웠고 번번이 시시각각 무참히 패배했다. 그때 외로웠노라는 말보다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그때 전교조 선생님이 한 분이라도 계셨더라면, 나 같은 것도 어쩌면 한 날쯤은 빛나는 날이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 구절이 내게 콱 박혀온다. "전교조 교사". 나를 포함한 지금의 전교조가 그의 기대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말고도, 유년의 외로움과 패배의식에 대하여 "전교조 교사"들에게 기대를 거는, 사회 변혁에 대한 순정어린 희망에 마음 뭉클하다. 이것이 또한 김진숙이다.

이 깡마른 영혼의 소녀에게 남은 최후의 유일한 꿈은 결국 제 힘으로 돈을 버는 것이었고, 그래서 부산으로 왔다. 하얀 벽 위로 새카맣게 기어오르던 빈대에 물어뜯기는 기숙사에서 살았다. 해운대 백사장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가 태풍으로 쫄딱 망하기도 했고, 아침과 저녁에는 신문배달을 했고, 낮 시간에는 다방을 돌며 땅콩과 주간지를 팔았다. 귀찮도록 달라붙는다는 소리 들어가며. 우유 배달, 샴푸나 세제 외판원도 했다.

언제나, 하루 종일 걸었다. 한겨울에도 연탄불을 못 피운 방에서, "이불 하나로 한 자락은 깔고 한 자락은 덮어가면서" 3년을 살았다. 얼마나 악바리였는지, 친구 만나서 마시는 커피 한 잔 값도, 새우깡 한 봉지가 아까워 만나는 친구 하나 없이 20대를 보낸 사람이 김진숙이다. 그러나 그 나이의 처녀가 책꽂이에 이상과 김춘수를 꽂아 놓기도 했던 문학소녀가 그렇게 강퍅한 심사로 버틸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점심시간, 줄 서 있다 어쩌다 한 번씩 하늘과 눈이 마주치면 갑자기 편도선이 부은 것처럼 목울대가 뻣뻣하게 아파서 밥이 잘 안 넘어간다든지, 집에 편지를 쓴다고 화창한 일요일 기숙사 창문 아래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 아버지 보세요' 한 줄만 써 놓고는 편지지에 눈물 콧물 칠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든지, 그럴 때는 뭔지 모르게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이 치밀고는 했다.

한진중공업에 들어가 처녀 용접사로 살던 시절, 산업재해를 당할 뻔한 순간이 있었다. 가용접해 놓은 철판이 터져버린 것이다. "이제 죽는다"는 직감 속에서 그 섬광 같은 찰나에 "이제 놓여난다는", 죽음에 대한 확신이 주는 편안한 느낌이 있었고, 또 하나 스쳐가던 그림이 있었다.

버스 안내양하던 시절, 배차 주임, 기사, 정비사들 따위 담배를 꼬나문 짐승들 앞에서 알몸 수색을 당하던 기억이다. 그 기억이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다. 버스 안내양이 있던 시절, 그들에게 자행된 악마적인 관행이었다. 나는 이 글을 두어 번 읽었지만, 읽을 때마다 목이 멘다.

"갱찰 부리까?" 하는 사감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쟈는 겡찰 불러야겠네. 단다히 꼬불칬는갑다." "겡찰서 저나하까요? 겡찰서가 멫 번이고?" "빙시야. 멫 번은 멫 번이고? 일릴리 누질리고 여게 도둑 잡았심니다, 하마 오지."

김진숙은 부들부들 떨고 있다. 열아홉이었다. "가방끈 짧고 생쥐 콧구녕에 틀어박을 돈도 없는" 아이가 홀홀단신 객지에 나와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일인지 나름의 산전수전을 겪은 뒤에도, 마주쳐야 했던 끔찍한 시간. 끝내 그들의 요구를 따라야했던 그는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들을 용서할 수가 없는 게 아니라 나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고.

전태일과의 만남, 극적인 반전

김진숙이 이 지옥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이었고, 거기로 나 있는 외나무다리의 이름은 '공부'였다. 그는 정말 악바리였다. 남정네들도 견뎌내기 쉽지 않은 조선소 용접사가 되어 40킬로그램이나 되는 용접 홀더를 매고,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백척간두에 서서, 뇌수가 라면발처럼 흩어져 나뒹구는 주검을 지켜보며, 용접 불똥으로 구멍이 숭숭 뚫리는 작업복을 테이프로 덕지덕지 막아가며 건너가고자 했던 '공부'라는 외나무다리.

그 열망을 안고 찾아간 야학에서 그는 전혀 뜻밖에도 전태일을 만나게 된다. 그가 갈급했던 것은 영어 단어, 수학 공식이었는데, 그런 건 가르쳐 주지 않고 "근로기준법이니 노동조합이니 하며 뭔가 불순한 냄새가 나던 그 강학이라는 것들을 경찰에 신고할까 망설이기도 했던" 반공 처녀에게 던져진 것이 하필이면 <전태일 평전>이었다. 그 이후로부터 벌어진 김진숙 삶의 반전은 또한 너무나도 극적이기에 그가 전태일을 만나던 순간을 서술한 대목을 그대로 옮겨 보려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 꺼이꺼이 지리산 계곡처럼 울었다. 가슴에 큰 산 하나가 들어앉아 그 산에서 돌덩이가 와르르 쏟아져 양심에 돌팔매질을 해대는 그런 느낌이었다. 내가 살아온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산 사람. 그러나 그 삶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끌어안고 뒹굴었던 사람. 난 뭘까. 그의 삶에 비한다면, 내 삶은 뭘까. 똥구덩이 같은 현장에서 혼자 비단신을 신고 내내 똥을 탈탈 털고 있었던 넌 뭐냐. (…) 나와 함께 일하고, 나와 같이 뒹굴며 그러나 끝내 내가 되지 못하고, 내가 그들이 되지도 못한 채 흘러갔던 수많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나와 함께 뒹구는, 아무데서나 오줌 누고 욕을 달아야만 말이 되는 이 아저씨들…. 세상을 새로 보게 되었다.

그가 전태일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쯤은 작은 아파트 한 채에 승용차 한 대쯤은 굴리는, 퇴근 후에는 가끔 백화점 문화 센터에서 하는 창작 합평회를 들락거리기도 하는 주부가 되었거나, 자식들 과외비 학원비에 뼛골 빠지며 잔업에 특근을 자청하는 억척스런 아줌마 노동자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는 전태일이 자신을 향해 던진 양심의 돌팔매를 조금도 피하지 않았다. 온전히 다 맞았다. 그는 그 이후로부터 24년 동안 모리배들의 소굴이었던 어용노조를 바꾸는 일에서부터 대공분실 세 번, 부서 이동 두 번, 해고, 머리채가 한 움큼씩 빠지는 출근 투쟁까지 이어지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당장 복직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여전히 그는 가난했고, 배가 고팠다. 그 시절을 묘사하는 글에서 눈물이 핑 도는 구절, "새벽 유인물을 뿌리러 달려다가다 어느 집 대문간에 내 놓은 사잣밥을 주워 먹으며 전날 진종일 굶은 허기를 메우던 날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들이 있었다. "만원이 생기면 짝짝이 신발을 신고 다니던 동지의 운동화를 먼저 사고, 천원이 남으면 순대 한 봉지에 젓가락 여덟 개가 꽂히던" 그 가난한 사귐 속에서, 우정 어린 동지애 속에서 그는 살아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20년을 싸우고도 그는 복직하지 못했다. 마지막 남은 두 사람, "영제 형, 정식이 형"마저 2006년 복직했지만 그만 남게 되었다. 그의 복직을 한사코 반대한 것은 한진중공업이 아니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였다. 그 사이 그는 대한민국 총자본들의 "공동의 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이 그는 세 명의 동료를 떠나보냈다.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 2003년 가을, 김주익이 끝내 세상을 버린 뒤로부터 지금까지 그는 한겨울에도 냉골에 불을 넣지 않는다. 지독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그 마음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 김주익의 죽음 이후 무렵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비겁하고 무력했던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혼자 있으면 울었고, 모이면 술을 마시고 급하게 취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때, 높은 곳에 서면 뛰어내리고 싶었고 낮은 곳에 앉으면 그대로 묻혀버리고 싶은 욕망이 시시각각 꿈틀거리던 그때.

그러나 그는 김주익의 죽음 이후로부터 나 같은 이에게도, 진실과 정의에 주린 이 땅 많은 이들에게 스승이 되었다. 그는 수없이 강연장에 섰고, 쫓겨난 이들, 기댈 곳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 억울한 죽음이 있는 곳에서 제일 먼저 찾는 동지가 되었다. 그는 갈수록 강퍅해져가는 이 노동 현실을 잊으려는, 힘없고 약한 이들의 고통을 외면하려는 한국 사회의 정신적 기류를 향하여 가장 매서운 언어를 내리꽂는 논객이 되었다.

그의 강의를 들은 아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오늘날 대학이 김진숙 같은 이를 얼마나 미워하는지를 모르는 순진한 아이들이 입시철이 되어 대학에 제출하려고 준비하는 자기 소개서에 '김진숙'이라는 이름 석 자가 등장할 때, 김진숙으로부터 알게 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현실이 등장할 때 나는 서둘러 그 대목을 수정해주면서도 번져가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다. 정말, 선생하는 보람을 느꼈다.

우리가 김진숙과 연대해야 할 백 가지 이유

그는 글 속에서, 그리고 연설할 때에 그가 사랑하는 이들의 이름을 자주 불러준다. 그리고 그들이 지금 처한 구체적 현실의 편린들을, 그들의 소박한 꿈의 목록들을 길게 나열한다. 그가 김주익의 이름을 부를 때, 그의 비통한 넋은 투혼이 되어 부활한다. 그가 김주익이 남긴 아이의 이름을 부를 때, 그 아이는 우리가 함께 키우고 지켜주어야 할 우리 모두의 아들이 된다.

그가 조합원들을 버릴 수 없는 이유가 백 가지가 넘듯, 우리가 그와 연대해야 할 이유가 또한 백 가지가 넘는다. 이 싸움만은 정말, 꼭 이겼으면 좋겠다. 한진중공업 같은 자본이 어디 거기뿐이겠는가. 이 어이없는 자본의 전횡 속에서도 노동자들의 삶은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내가 기르는 아이가 이 야만의 이빨 앞에서 결코 무사할 리 없다.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이 땅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망한다.

지금 우리에겐 자신감이 필요하다.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므로 한 번의 승리가 갈급하다. 그날 하룻밤 사이에 1000명이 넘는 낯선 얼굴들이 하나가 되었듯, 이웃을 발견하는 기쁨, 그들과 어깨 걸고 나아가는 낯선 행복감, 거기서 솟아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공유하자.

잠시 인터넷을 끄고, 김진숙의 글을 함께 읽자.

<소금꽃나무>(김진숙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이미 2008년 여름, 국방부가 이 책의 가치를 알아봐 주었다. 그가 김주익이 죽어 내려온 그곳에서 끝내 살아 이겨서 내려오는 그 순간, 우리 모두 모여 그의 연설을 듣자.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군요." 그의 연설을 들으며, 이 싸움에 어깨를 걸었던 우리들 모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자.

아름다운 김진숙, 힘내라 김진숙! 그와 우리들 모두의 승리를 위해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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