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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동아시아 '동네북' 한국, 지금도 똑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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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동아시아 '동네북' 한국, 지금도 똑같네!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

연암, 중화주의의 틀을 넘지 못하다

18세기 말, 이 땅에는 중화의 세계 밖으로 눈을 돌리려는 시도가 있긴 했으나 그걸 새로운 발전의 토대로 삼으려는 발상은 존재하지 못했다. 연암 박지원은 건륭제 생일 축하 사절단의 일원으로 본래 연경에 갔다 오면 되는 것이었으나 열하로 방향이 바뀌어 그곳까지 다녀온 기록을 남긴다. <열하일기>가 바로 그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조선조 말기에 이르는 시대적 조류의 변화를 감지한 한 지식인의 고투를 읽게 된다.

명을 숭상하고 주자학 외에는 눈길을 주지 않았던 조선의 지식인에게 그는 청으로부터 배울 바가 있다고 역설했으나, 그 역시도 청의 경계 밖에서 몰아쳐오는 새로운 역사의 조짐에 대해서는 절감하지 못했다. 연암 역시도 안타깝지만 중화의 틀에서 사고한 인물이었을 따름이며 그 뒤를 잇는 실학파 지식인들 역시도 청에 대한 자세 교정을 통해 북벌(北伐)이 아닌 북학(北學)의 의미는 새겼을지언정 서학(西學)의 진원지가 어떤 문명사적 변모를 일으킬 것인지는 내다볼 수 없었다.

그건 물론 시대적 한계가 작동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을 추월한 것은 동학을 가슴에 이고 역사의 한 복판에 뛰어든 농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 역시도 국제 관계의 삼엄한 힘의 역학 속에서 무너져 갔다. 동아시아의 중세를 떠받치고 있던 일체의 토대는 여지없이 붕괴해가고 있었고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은 지구사 전체의 맥락 속에 충격적으로 소환당하고 있었다.

화이질서, 조공책봉 체제의 동요

내륙 아시아와의 관계를 안정시키면 청의 미래는 든든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청조는 광동에서 북상해오는 서구의 해양 세력이 어떤 국가적 위기와 맞닿아 있게 될 것인지 여전히 둔감했다. 중화의 세계에 갇힌 채 동아시아 근대의 중심을 뒤흔들 변화의 힘을 가볍게 여긴 탓이었다. 중화의 경계선 주변에 처해 있던 일본의 경우에는 중화주의와 주자학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이유도 있었겠지만, 네덜란드를 통한 서구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축적은 이후의 대응 방식에 다른 나라와 차이를 가져왔다.

청을 중심으로 하는 화이질서(華夷秩序)와 이를 근거로 하는 조공책봉(租貢冊封) 체제는 더는 유지될 수 없었고, 동아시아 3국은 근대라는 격류에 빨려 들어간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어느 나라가 보다 빠르고 명확하게 지구사 전체의 흐름에 민감했으며 그에 대한 장단기의 대응과 사유를 할 수 있었는가에 있다. 역사를 되짚어 읽게 되면, 다시 확인하게 되는 바이지만 우리의 경우에는 실로 처참한 지경이었다.

▲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미타니 히로시·나미키 요리히사·쓰키아시 다쓰히코 엮음, 강진아 옮김, 까치 펴냄). ⓒ까치
"어른들을 위한 근현대사(大人のための近現代史)"가 원제인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미타니 히로시, 나미키 요리히사, 쓰키아시 다쓰히코 엮음, 강진아 옮김, 까치 펴냄)는 일본, 조선, 중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본 학자들의 수년에 걸친 연구회의 성과다. 이들은 근대사에 대한 역사적 기억이 대체로 자국 위주의 시선과 사고에 갇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동아시아 전체 공통의 경험과 시각으로 근대의 의미를 검토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 지식과 이해는 대단히 넓고 깊다. 뿐만 아니라 일본 자신의 역사에 대해서도 냉정하다. 그 냉정함은 다른 나라의 역사 전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동아시아 3국의 근대 경험상의 차이를 이들은 이렇게 설명해놓고 있다.

"최근의 연구는 이들 한역서(서양인들이 편찬한 한역서)에서 사용된 한어(漢語)가 메이지 일본에서 서양 개념의 번역어를 고안할 때 영향을 미쳤음을 지적한다. 동아시아와 동아시아 해역에 성립된 네트워크를 통해서도 일본은 근대를 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조적으로 베이징은 남중국해 북쪽에 위치하여 근대와 접촉하고 있던 광둥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광대한 내륙을 포함한 중국 전체를 통치하는 베이징의 시야가 이미 광둥에 축적된 근대를 파악한 것은 훗날 몇 차례의 위기를 겪고 난 다음이었다. 마찬가지로 육로로 베이징과 통하고 있던 조선의 근대와 만나는 길 역시 아직 멀리 있었다."

지정학과 문명사의 전개

지정학의 차이는 문명의 거리와 비례했고, 그로써 이후의 역사 전개의 방식도 달리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중국이나 조선에도 동시대에 서양의 학문이나 사상이 유입되었지만 유력한 학파로 정착되지는 않았다. 과거 시험에 필수적인 주자학의 정통성이 너무도 강했고, 통치자인 지식인들은 다른 학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꾸로 일본에서는 학문이 권력과 직결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인들은 다양한 학문을 접할 수 있었다. 난학이나 국학이 그 예로 기독교나 정치에 직결되지 않는다면 서양 학문도 수용했던 것이다. 완성된 '동아시아적 근세'의 변경에 위치한 것이 오히려 서양적 근대에 끼어들어가는 것을 도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논의는 물론 서양의 제국주의 팽창권에 접수되고 있던 동아시아의 비극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논점은, 문명권의 변모에서 하나의 고정관념에 그대로 묶여 있을 경우 어떤 퇴락이 스스로에게 강요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구사적 연동 관계의 관점

이 책에서는 러시아와 영국 그리고 미국의 동아시아 접근 또는 확장 정책도 눈여겨 관찰하고 있는데 이를 단선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사적 연동 관계(global linkage)"를 놓고 이해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편전쟁과 청의 대응, 그리고 일본의 동향, 러시아와 영국의 중앙아시아에서의 대립과 동아시아에서의 역학 변화, 미국의 포경 산업의 발전과 동아시아의 접근, 이에 대한 청의 대일관계 변모 등이 포괄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동아시아 외교사 부문에 대한 우리의 출간 사정은 빈곤하기 짝이 없다. 일본의 경우, 동아시아 외교사 또는 근현대 동아시아 국제 관계사에 대한 책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편인 것과 비교하자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우리의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관점의 양적 초라함은 충격적이기 조차 하다. 청일 전쟁 당시 조선 반도의 운명에 깊숙이 관여한 무쓰 무네미스의 <건건록> 같은 외교 비망록이 널리 읽혀지고 있지 못하며 이에 대한 학문적 논전마저 보기 드물다.

그런 판국에 하물며 100년 이상의 과거에 조선조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일 자체가 무리다.

"1874년 8월 청이 조선 정부에 보낸 의견서가 도착했다. 의견서에는 일본이 타이완 출병 이후 조선에 병사를 보낼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프랑스와 미국이 일본을 도울 것이므로, 조선은 미리 프랑스 및 미국과 조약을 맺어 일본을 고립시켜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조선 정부는 이 말에 놀라서, 프랑스와 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쪽이 아니라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쪽을 택했다."

청이 제공해주는 국제 정보에 의존하고 있는 조선조, 그리고 이후 결국 이루어지는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 체제도 청이 주도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에서 동아시아의 격동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던 우리의 역사적 자화상이 다시 슬프게 읽혀진다. 이건 지금 미국을 청에 대입해놓고 보면 과연 얼마나 변했을까 싶다.

아직도 오리무중의 동아시아 이해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적 역학을 결정적으로 변모시키는 청일전쟁에 대한 우리 사회의 연구와 대중적 이해는 일본과도 비교된다. 중화적 국제 체제의 결정적 붕괴와, 조선조 봉건 체제의 파멸을 가져오는 청일전쟁은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의 근대 국가의 성과와 이어지는 국제 역학의 복잡한 전개를 모두 압축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청일전쟁 이후의 동아시아 세계를 검토하면서 그 의미를 짚고 있다. 우리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좀체 보기 힘든 역사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 내부의 사정에 대한 여러 해석을 과감히 내놓기도 한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화 과정은 논리적 모순으로 가득 찬 것이었다. 이 모순이 반영됨으로써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반응 역시 복잡하게 뒤엉킬 수밖에 없었다. (…) 자력으로 청이나 러시아에게서 독립을 달성할 수 없게 된 이상, 일본에게 주권의 제약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친일파'라고 매도할 수도 없다. 예를 들면, 병합(倂合)으로 멸망하는 것만은 피하기 위해서, 보호국 상태를 유지한 채 근대화에 힘써서 실력을 키운 뒤에 독립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다. 또 친일 단체로 알려진 일진회(一進會)의 합방 성명(合邦 聲明)은 일본에 의한 흡수 합병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회피하기 위해서 스스로 나서서 일본과 "합방한다"고 제창하여 일본과 보다 대등한 형태로 합방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것은 모두 '독립'의 여지를 남기기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볼 수도 있다."

결코 간단치 않은 논의다. 간단히 넘길 논의가 아니라는 뜻과 함께 칼로 베듯 근대사의 대목 하나하나를 해석하고 규정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아직도 지구사적 변동의 현실에 무지한 바가 적지 않다. 정보는 많아졌고 지구적 이해도 깊어졌다고 여기고 있지만, 100년 전 동아시아의 역사적 전개의 과정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하고 측량하면서 대응 방책을 내놓는데 실패했던 것과 그리 다르지 않게 지금의 우리도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이 부지기수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동아시아의 지난 세월을 짚고 있는 동안에 우리는 동아시아의 근대사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전망하게 되었을까?

아직도 국민적 상식이 되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는 무수한 근대사의 지식들에 대한 점검과 해석은 오늘날의 현실과 미래를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절실하다. <다시 보는 동아시아 근대사>가 바로 그런 지점에 놓이면서 우리 안에서도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싶다.

분단의 틀을 넘어서서 동아시아 전체의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일은 이런 노력이 쌓이는 가운데서도 가능해지는 것 아니겠는가? 이 책에서 사용된 "19세기 말 글로벌화가 가져온 공통의 체험"이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서구 제국의 침탈과 그걸 본 따 일으킨 유린이 아닌, 동아시아 전체에게 "공통의 체험"이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할 수 있게 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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