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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틀렸다, 덴마크에서 배우자!"

[변방의 사색] <덴마크 자유 교육>

허망한 핀란드 교육 열풍

한동안 핀란드 교육 열풍이 번져가는 것을 보면서 퍽 불편했음을 먼저 고백해야겠다. 외국의 사례에서 뭔가를 배우자고 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차이를 재는' 태도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핀란드 교육 열풍에는 그들이 지금에 이르게 된 역사를 차분하게 조망하는 흐름도 그들과 우리의 차이를 실증적으로 재려는 노력도 없는, 그저 감탄의 릴레이였던 것 같다. 우리에게는 이름조차 낯설었던 핀란드가 이렇게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어쨌든 '국제 학업 성취도 평가(PISA)'에서 연거푸 1등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PISA란 이를테면 무디스가 각 나라의 신용 등급을 평가해서 세계를 금융 자본들의 입맛에 맞게 길들이듯이,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쥐어짜 돈을 뽑아내려는 국제적 흐름을 정착시키기 위한 시도가 아닌가. 각 나라의 고유한 교육적 토양은 이 표준화된 시험과 이로 인한 국가별 서열의 압력 속에서 파괴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핀란드 교육을 띄우려는 이들의 뜻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1등 담론'과 어떻게든 맞서 싸워야만 제자리로 향하는 길을 겨우 더듬어 볼 수 있을 형편에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다'는 식으로 1등 담론에 편승하려는 흐름이 나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핀란드 교육의 놀라운 성취는 결국 '완전 학습 모델'의 성공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리고 핀란드 교육의 그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들의 알코올과 약물 중독자 비율이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높다든지, 핀란드 학생들의 학교 만족도가 다른 북유럽 국가에 비해 현격하게 낮다든지, 학교에서 총기 사고가 일어났다거나 극우 정당이 총선에서 20%에 가까운 지지를 얻는다든지 하는 사실이 말해주는 바에 대해서도 함께 따져보아야 한다.

이야기가 조금 곁다리로 새는 것 같지만, 핀란드의 핵 발전 문제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번 후쿠시마 사고를 지나면서 새삼 깨닫게 된 것이 핵 발전과 민주주의의 명백한 상관관계이다. 핵 발전은 민주주의와 상극일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2005년 우리나라 핵폐기물 처리장 선정 과정에서 드러난 바, 정부는 핵폐기물 처리장 입지 조건을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대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을 것, 학력 수준이 낮을 것, 경제적 생활수준이 낮을 것."

이렇듯 핵 발전은 힘없고 약한 존재들에 대한 경멸과 기만으로 지탱되는 극히 반민주주의적인 에너지다. 그런데 진보 진영이 칭송해마지 않는 핀란드가 후쿠시마 사고 직전까지 유럽의 원자력 르네상스를 이끌던 핵 발전 선두주자라는 사실은 또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핀란드는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이후, 유럽에서는 최초로 핵발전소를 신설한 용맹스런 국가이며, 전체 전기 소비량의 40%를 핵 발전으로 조달하겠다는 목표로 열심히 뛰어 왔다.

그리고 지금 핀란드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만들어진 적 없는 고준위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있다. 10만 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무탈하게 견딜 수 있을지 심히 걱정스럽지만, 여하튼 전대미문의 대실험을 벌이는 용맹무쌍한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핀란드 교육 열풍은 재검토되어야 한다.

덴마크에 놀라다

나는 핀란드 대신 덴마크에서 배우자고 제안한다. 북유럽 국가들은 거기가 거기 같지만, 내 짧은 안목으로 판단하기에 핀란드와 덴마크는 여러 모로 굉장히 다르다. 덴마크는 복지 '국가'가 아니라 복지 '사회'인 것이다. 인간의 행복을 국가가 돈으로써 책임져 주는 것과 사회가 인간관계로써 떠받쳐 주는 것은 하늘과 땅처럼 다르지 않겠는가.

덴마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내가 흠모해마지 않는 충청남도 홍성의 풀무학교 전공부가 덴마크의 '시민대학'(folke heue skole)을 본보기로 하여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덴마크가 국민 행복도 세계 1위라는 사실은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았지만, 1973년 석유 파동 이후에 너도 나도 핵 발전으로 몰려갈 때, 덴마크는 재생 가능 에너지 체제로 전환하였다는 사실은 굉장한 충격이었다.

그것도 정부의 핵 발전 추진에 맞서서 풀뿌리 민중들이 합의회의라는 거점을 통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토론해서 모아낸 힘을 바탕으로 이루어냈다는 사실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이런 나라가 있을 수 있다니. 덴마크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덴마크 자유 교육>(송순재·고병헌·카를 에기디우스 엮음, 민들레 펴냄)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다.

덴마크와 '자유'

▲ <덴마크 자유 교육>(송순재·고병헌·카를 에기디우스 엮음, 민들레 펴냄). ⓒ민들레
덴마크의 공교육 제도는 다른 유럽 국가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굉장히 독특한 흐름이 있다. 대안 교육이 공교육의 커다란 한 축으로 자리 잡고 있다.

교육과 관련해서 모든 것이 굉장히 자유롭다. 의무 교육 기간인 9년 동안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기초학교(folke skole)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대안 학교에 보내면 된다. 아무런 제재나 불이익이 없다. 큰 결단이 요구되지도 않고, 경제적 부담을 질 필요도 없다. 대안 학교에도 공교육 학교와 거의 똑같은 지원을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자유학교(frie skole)가 전체 학생의 13%를 포괄한다. 우리처럼 여덟 살부터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좋든 싫든 12년간 쉼 없이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된다. 14세부터는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 동안 공교육 트랙에서 빠져 나와 음악, 스포츠, 미술, 목공을 거의 전문가적인 수준까지 가르쳐주는 학교에서 생활할 수 있다.

바로 자유중등학교(efter skole)이다. 이 학교는 기숙형이어서 생활을 스스로 꾸려가는 법을 배우고, 풍부한 대화와 상호 작용을 통해 예민한 청소년기의 자아 형성에 대단히 소중한 역할을 한다. 핀란드 청소년 세 명 중 한 명은 이 학교를 거쳐 간다. 어른이 되어서도 시민대학(folke heue skole)에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분야에 대한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다. 이들 학교에 국가는 공공 재정으로 75%의 수준의 교육비를 보조해 주지만, 일절 간섭하지 않는다.

덴마크 교육은 자유롭기 때문에 다양하고 풍부하다. 공교육 학교도 대안 학교도 마음에 들지 않고, 아이의 지적 성장을 원하는 부모라면 실업학교(real skole)로 보낼 수 있다. 예술과 영성 교육을 원하는 부모라면 발도르프 학교에 보낼 수 있다. 그리고 이슬람계 이민자 학교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소수자 학교가 있다.

종교 기관과 노동조합, NGO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얼마든지 학교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받고 있다. 신나치주의자들의 학교 설립도,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가르치는 학교도 어쨌든 설립과 운영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덴마크 사회의 수준을 생각하게 된다.

신나치주의자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사회가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의 자신감이다. 그들은 나치즘을 인정하는 것이, 나치즘을 두 번 다시 살아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효율적인 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덴마크 교육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주제어가 있다면 그것은 '자유'이다. 자유란, 150년 전,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비옥한 국토를 잃고 비참에 빠져있던 덴마크를 일떠세운 사상가 니콜라이 그룬트비(1783~1872년)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나아가는 삶', '참된 삶의 바탕으로서의 자유'. 바로 이 자유가 덴마크의 오늘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룬트비와 최제우

이 책을 읽으며 나는 덴마크와 한국 사회의 아득한 거리를 생각하면서 내내 마음이 저렸다. 돈 몇 푼 쥔 것 말고는 도대체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그러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좋은 16년의 시간을 온통 지옥 같은 경쟁의 트랙을 질주케 하는 한국 사회의 야만과 비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시험에 대한 걱정도, 탈락과 배제에 대한 공포도 일체 없이, 학교에서 늘 이야기하고 이야기 듣고, 함께 노래 부르고, 아주 작은 일도 대화와 토론으로써 문제를 풀어나가며, 육체노동과 공동생활로써 자신의 몸과 감성을 일깨운 아이들의 삶이란 우리에게는 참으로 눈물겹도록 그리운 것이다.

덴마크의 오늘은 그룬트비뿐 아니라 시민대학, 자유중등학교, 자유학교의 원형을 헌신적 실천으로 일구어낸 크리스틴 콜(1816~1870년) 같은 어버이들의 존재에 크게 빚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이런 큰 스승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여기의 삶', '나 자신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이야기하며 농민들의 각성과 민족적 재건을 설파한 그룬트비를 보면서 나는 동학을 생각했고,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이 강파른 조선의 근세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우리에게 그룬트비 같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종교적 각성 이후, 남은 짧은 생애를 농민 계몽과 헌신적인 교육 실천에 바친 크리스틴 콜을 소개하는 글을 읽으며 나는 새삼 도산 안창호와 남강 이승훈, 무교회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김교신과 함석헌, 그리고 그들의 제자로 풀무학교를 창립한 이찬갑 같은 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룬트비는 성공했지만, 수운과 해월은 왜 실패했는가. 콜의 죽음 이후 그의 학교를 본보기로 삼은 학교가 우후죽순 생겨났지만, 왜 오산학교와 풀무학교를 잇는 학교는 만들어질 수 없었던 것인가. 덴마크는 운이 좋았다. 근대 150년을 온통 식민지와 분단, 전쟁과 독재 속에서 보내야 했던 우리와 달리,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5년 정도 독일에게 점령당한 때를 제외하면 이 시간을 온통 자신의 사회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데 바칠 수 있었다.

그 경험의 차이가 확연하다. 그러나 이런 진단은 별 의미가 없다. 흘러간 세월을 어찌 하겠는가. 다만, 우리가 지금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은, 덴마크에서는 중세가 몰락하던 시기에 풀뿌리 민중들이 국가와 자본에 밀리지 않고 스스로 주도권을 행사하면서 사회 변화를 이끌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정부나 관청이 움직이지 않으면 덴마크 민중들은 곧바로 주도권을 행사했다. 민중들은 국가를 통하지 않고 스스로 교회를 만들었다. 수많은 낙농협동조합과 도축협동조합, 소비조합을 만들어 근대적 시장 경제의 풍랑으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지킬 수 있었다. 그들은 지식과 암기 위주의 공교육 학교를 미더워하지 않았고, 여기에 반기를 든 농민들이 직접 학교를 만들었다.

물론 여기에 그룬트비가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고, 콜이 훌륭한 본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힘입어 수많은 학교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덴마크 곳곳에 박혀 있는 자유중등학교, 자유학교, 시민대학들이 오늘날 덴마크 복지 사회의 바탕이며, 높은 수준의 민주주의와 시민적 교양의 버팀목인 것이다. 이 모든 변화에 근본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바로 민중의 자기주도적인 힘이다.

이행기의 정신

우리가 덴마크로부터 배워야 할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 또한 덴마크로부터 이행기를 살아갈 지혜를 배우자는 것이다.

이 시대는 단연코 거대한 전환의 시기가 되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이 비참과 야만에도 말기적인 징후가 느껴진다.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돈 놓고 돈 먹기 야바위판인 오늘날 금융 경제에도, 지난 20여 년간 세계를 뒤흔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이 가혹한 입시 경쟁 교육에도 황혼이 오고 있다. 이 모든 자멸적 상황을 가능케 했던 경제 성장이 한계에 부딪쳐 있기 때문이다.

학벌이라는 상징적 기제를 제외하면, 공교육 16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물질적 유익이란 별로 없다. 입시와 취업을 향한 경쟁 때문이든, 일탈과 반항과 무기력 때문이든 초·중·고등 교육은 '불가능'이라는 표현으로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이행기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우리가 덴마크를 배우자는 것이다. 그룬트비와 콜, 두 사람을 본받자는 것이 아니라, 덴마크가 이행기를 살아냈던 지혜, 아래로부터, 지배 체제의 외곽에서 시작된 풀뿌리 민중들의 자발적인 실천을 배우자는 것이다. 풀뿌리 민중들이 스스로 만든 학교, 스스로 만든 협동조합, 그렇게 구축된 사회적 협동의 체제, 그것을 가능케 한 교육의 힘과 높은 수준의 시민적 교양, 풀뿌리 민주주의,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덴마크로부터 배워야 할 핵심인 것이다.

한 명의 천재가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그 한 명이 나머지 9만9999명을 먹여 살리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갈 지혜를 가르치는 학교는 누가 만들 것인가? 2012년, 혹은 2017년 집권해서 그때의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덴마크가 걸어갔던 길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민중들 스스로, 지배 체제의 외곽에서, 누군가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아니, 지금 이 땅에도 수많은 그룬트비와 콜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덴마크 자유 교육>을 읽으며 나는 거의 한계에 다다른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운동을 생각했고, 새삼스럽게 공교육 체제 바깥에서 고된 실천을 이어가는 수많은 공간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한 땀 한 땀, 고통스럽게 전진하는 이 땅의 모든 대안 학교, 공부방, 지역아동센터와 학습 모임의 일꾼들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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