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5월 11일
지난 며칠 동안 좌익의 양대 정당인 공산당과 인민당에 큰 충격을 준 사건들이 일어났다. 5월 7일에 조봉암이 박헌영에게 쓴 비판 편지가 공개되었다. 3월에 쓴 편지가 미군 방첩대(CIC)에 압수되어 있던 것을 미군정 측에서 공개한 것이다. 그리고 5월 9일에는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인민당을 탈당했다.
조봉암(1899~1959년)은 한국 현대사에 가장 큰 흔적을 남긴 인물의 하나다. 그는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남한의 토지 개혁을 수행했고,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의 자리를 위협했다. 1958년 1월 국가 변란, 간첩 등 혐의로 체포되어 1심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최종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9년 7월 처형당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의 폭력성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의 하나였다. 죽은 지 52년째인 지난 1월 대법원 재심으로 주요 죄목에 대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6년 당시에도 48세의 조봉암은 주목받는 정치인의 하나였다. 그는 1922년 이후 공산주의 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맡았고, 1932년에서 1939년까지 7년간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4년여 동안 그의 행적에는 논란이 많지만, (그가 활동을 포기했느니, 일본 경찰의 비호를 받느니 하는 비난이 박헌영 측에서 많이 나왔다.) 1945년 1월 지하 활동이 적발되어 다시 투옥되었다가 8월 15일에 석방되었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여운형이 그의 출옥을 직접 환영했다 해서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해방 후 조봉암은 재건된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중요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 서중석은 그가 박헌영과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그는 이승엽이 장안파에서 바로 박헌영 직계로 돌아 조선공산당의 핵심 간부로 활동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중앙에 진출하지 못했다. 다만 건준 인천 지부의 조직 등을 지원하였고, 1946년 2월에 인천시 민전의장이라는 한직을 맡았을 뿐이었다. 박헌영의 조봉암 배제는 1930년대 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대표적 이론가였다가 전향한 바 있는 고경흠이 해방 후 끝내 공산당에 입당할 수 없었던 것과 함께 주목을 받았다. 고경흠은 일제 말부터 여운형을 추종하였고, 해방 후에는 여운형 사거 순간까지 비서 격으로 줄곧 여운형을 수행하였다. 박헌영과 조봉암의 사이는 1932년 이전에도 좋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선공산당의 원로 김철수는 박헌영이 조봉암을 꺼린 것은 박헌영이 개인적 추종자 중심으로 일을 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96쪽)
조봉암의 '편지'는 5월 7일에서 10일 사이에 여러 신문에 실렸다. 조봉암은 이 편지가 본인의 동의 없이 공개되었고 내용 일부가 원문과 다르게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임경석, <이정 박헌영 연대기>, 329쪽) 그러나 큰 조작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산당의 당시 노선과 실태에 대해 조봉암의 위치에서 비판했음직한 방향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폭넓게 보여주는 글이므로 5월 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내용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겨놓는다.
존경하는 朴 동무 내가 붓을 들어서 동무에게 편지를 쓴 것은 1926년 상해에서 동무에게 암호 편지를 쓴 것 외에 이것이 처음인 것 같소.
내가 얼마나 동무를 존경하고 또 과거 10여 년 간 동무가 얼마나 영웅적 사업을 계속했는가 하는 것에 대한 혁명가로서의 순정의 찬사는 아첨이라 생각할까 해서 한 마디도 쓰지 않겠소. 오직 동무의 꾸준한 건강과 건투를 빌 분이오. 내가 8·15 그날부터 오늘까지 인천에 들어박혀서 당·노조·정치 등 모든 문제에 있어서 입을 봉하고 오직 당부의 지시 하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대의 정열을 가지고 정성껏 해 왔소.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나 자신을 위해서 가장 옳은 길이고 옳은 태도라고 믿는 까닭이오. 그런데 오늘 붓을 들어서 무슨 문제를 논의하고 우견을 진술하게 된 것은 결코 이 태도가 달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요. 똑같은 태도와 똑같은 입장에서 오직 당을 사랑하고 동무를 아끼는 마음으로, 아니 쓰려야 아니 쓸 수 없어서 쓰는 것이며, 동시에 나 자신이 좋은 볼세비키가 되는 유일한 방법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늘 바쁘실 동무이니 거두절미하고 요령만 씁니다.
1) 민족 통일 전선 급 대중 투쟁 문제와 그 운영에 대해서 인민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의 조직의 시기의 선택이나 조직 방법이 졸렬했다는 것은 정평인 모양이니까 차치 물론하고 나는 다만 그 운영에 대해서 말하겠소.
중앙이나 지방을 물론하고 지금의 인민위원회는 당내에서 중용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구락부요. 중앙인민회 중 활동하는 자로써 비공산자가 몇이며 누군가. 李萬珪 한 사람을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하는 줄을 나도 알며, 내가 있는 인천 인위는 몇 군데 지방에 비해서 제법 세워졌으나 비당원으로는 능동적인 사람이 없는 형편이오. 또 그 구성 요소나 정치 활동으로 보아서 일반 대중은 그것을 공산주의자 집단이니까 그 자체가 행정 연구 단체처럼 보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 실정이오.
이러한 바에는 인위에 들어가 있는 공산주의자들은 차라리 공산당의 이름으로써 정정당당히 아시푸로나 했더라면 당의 이름과 당의 영향이 군중 속에 들어간 정도가 컸을 것이오. 그런즉 인민의 행정기관으로의 구성상의 결함도 컸지마는 운영에 있어서는 더 큰 실패를 했소. 더욱 최근에 있어서 인위를 그대로 정권 접수 기관이 될 것 같은 환상을 가지게 하는 것은 더욱 과오를 거듭하는 것 밖에 아무 것이 아닐 줄로 생각하오.
그러므로 당은 인위에 대한 이러한 흐리멍텅한 정책을 단연 버리고 당 군중과 미조직 대중으로 하여금 청신발랄한 기분으로 투쟁의 길로 용진하게 해야 될 줄 아오.
2) 그 다음 민주주의 민족 전선은 잘 될 줄 아오마는 역시 통일 전선으로서는 우리 당원이 과대히 침투했기 때문에 비당 군중의 능동적 활동을 스스로 제약시키고 있다고 보오. 당이 크고 옳은 전선을 내세운 바에는 대중을 그 길로 나가도록만 하면 족하지 않겠소. '지방에서는 당원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여야 된다.' 등의 지령은 과오로 생각되오.
3) 삼상 회의 지지투쟁에 있어서의 동무의 태도와 방침은 실로 경복하고 절대 지지하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데 있어서 기술적으로 졸렬했던 까닭에 조직 군중에게는 그것을 이해시키기에 많은 시간을 공비했고 미조직 대중을 적의 편에 빼앗기고 회의의 구렁에 빠지게 해서 지금도 그들을 옳은 노선으로 끌기에는 무한한 노력과 시간을 요하리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식해야 될 줄 아오.
정치는 과학이며 동시에 기술이오. 당은 결코 정치 학교가 아닌 줄 아오. 또 서울시 인위의 1월 3일 대회 사건은 정평이 있는 모양이니까 동무가 나보다 잘 알 일인데 거기 대해서 당내에서나 당외 군중에게 석명하지 않고 그 모든 사취사적 잘못을 그대로 뒤집어쓰고 안연하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동무에게 그런 것쯤 대담히 자기비판하게 할 용기가 없을 리는 없는데.
그것 한 가지가 당에 큰 악영향을 끼쳤나 하는 것과 또 그것을 공개적으로 비판치 않은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과오를 거듭할까 하는 점을 생각하면 참으로 송연함을 금할 수 없소. 인천에서도 3·1 기념행사에 있어서 각 단체 군중과 공개적으로 약속한 것을 여지없이 유린했기 때문에 당이 배신자로 낙인을 찍히고 있으니 이것은 1월 3일 대회를 비판하지 않은 과오의 연장이오. 지금도 늦지 않으니 공개적으로 비판할 방침을 피하는 것이 옳은 줄 아오.
4) 당 내사 문제에 대해서(핵심 문제를 강조하고 광범히 포용 등용 문제를 지적할 것)
이 문제는 다른 문제보다도 더 나로서는 논의할 자격도 없고 또 말하기도 어렵소. 그러나 동무에게는 최중요한 문제이니까 다른 것도 불고하고 몇 가지 말하겠소.
첫째, 무원칙하오. 왜 어느 일정한 척도 하에서 등용하지 않았으며 또 인물 능력 본위라면 더군다나 동무의 견식이 천단(淺短)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소. 무원칙하기 때문에 권위를 잃었고 인물이 불능하고 무능(간부진)했기 때문에 당 사업에 능률을 올리지 못했소.
둘째, 종파적이오. 원칙도 없고 인물 본위도 철저치 못했기 때문에 종파적으로 나타났소.
셋째, 봉건적이오. 무원칙하고 인물 본위도 못되고 종파적으로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불합리한 불평이 있는 것은 무슨 때문이오. 친하다는 것, 개인으로 신세를 졌다는 것, 머리를 숙이고 아첨하며 어느 의자를 얻으려고 애쓰는 무리는 모두 등용되고 있다는 사실 이것은 봉건적이오.
넷째, 무기력이오. 종파적이오, 봉건적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버티었어야 할 터인데, 말썽만 부리면 한 깃 주는 태도 이것은 무기력이오. 항간에서 '朴憲永에게 자주 찾고 곱게 보여라 그렇지 않으면 말썽을 부려라'하니 얼마나 놀랄 일이오? 그리고 당내 어느 요인의 소위 죄과(수년간 휴식 일본에 협력등)을 물어서 말했더니 그는 자기비판문을 내게 내었기 때문에 좋다 했다니 그 관용의 태도는 대단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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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작심하고 쓴 글이다. 이 편지의 공개를 계기로 조봉암은 공산당과 민전을 떠나고 반 공산당 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어디까지가 미군정 측의 좌익 분열 공작이고 어디까지가 조봉암 본인의 의지였는지는 앞으로 진행을 더 살펴보겠다. 단, 지금까지 미군정의 좌익에 대한 이해 수준을 보면 효과적인 분열 공작을 펼칠 능력이 의심스럽고, 본인이 공산당과 선을 긋고 싶던 차에 "울고 싶은데 빰 때려준 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으로서는 편지의 문면 그대로를 보며 공산당의 문제점에 대한 시각을 넓히는 것으로 만족한다.
5월 9일 여운홍의 인민당 탈당도 조봉암 편지 공개가 일으킨 충격의 여파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呂運亨을 당수로 한 조선인민당 내부에는 일찍부터 여러 가지 모순과 상극을 내포하고 있던 바 동당 呂運弘은 9일 아침 7시 반 서울중앙방송국 마이크를 통하여 인민당의 현상과 지금까지 극좌적 정치 노선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폭로하는 동시에 탈당 성명서를 대략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근일 각 신문에 발표된 조봉암 서신으로 말미암아 조선공산당의 극좌적 오진의 모략은 드디어 폭로되었다. 인민당은 그 독자성을 상실하고 완전히 공산의 모략에 빠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당을 탈당하는 동시에 새로이 사회대중당을 조직할 준비를 진행하는 중에 있다."
(<동아일보> 1946년 5월 11일자)
(☞바로 보기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이틀 후인 11일 10여 명 간부를 포함한 94명의 인민당원이 연명으로 여운홍의 뒤를 따랐다. 그 이튿날 인민당은 김오성 선전부장의 담화로 "30만의 당원을 옹한 본당에 있어서 94명이 탈당했다는 것은 아무런 놀라운 사실도 아니며 (…) 이들의 脫黨은 本黨의 정치적 앞길에 아무런 영향도 가져오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운형 친동생의 탈당은 상당한 타격이었을 것이다. 서중석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여운홍의 인민당 이탈은 미군정이 벌인 좌익 분열 공작의 또 하나의 산물이었다. 미군정에서는 1945년부터 여운형과 박헌영의 분열 공작을 집요하게 펴왔다. 버치 중위는 여운형이 공산당한테 약점을 잡혔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하고, 많은 기록을 찾아보았다고 한다. 버치는 이 문제로 조선총독부 고위 관리와 면담하기 위해 일본으로 사람을 급파하기까지 했으나 여운형이 일제와 협력한 기록은 찾아내지 못했다. 미군정의 공작은 여운홍 등 부동하는 세력을 인민당에서 탈당시키는 정도의 성과밖에 올리지 못했다. (<한국 현대 민족 운동 연구>, 497쪽)
여기에서 레너드 버치 중위의 모습이 나타난다. 1946년 초 한국에 도착한 버치는 하버드 출신 변호사로서 계급에 어울리지 않는 역할을 군정청에서 맡으며 스스로 "세상에서 제일 신분이 높은 중위"를 자임했다. 1946~1947년의 좌우 합작 운동을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이끌다시피 큰 역할을 맡은 그를 커밍스는 "아마 군정청에서 한국 정치와 정치인들을 가장 잘 이해한 인물"로 꼽고 그와의 인터뷰를 연구에 크게 참고했다.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94, 534쪽)
앞으로 버치의 모습을 많이 보게 될 것이다. 하지와 아놀드, 그리고 그들의 미국인 고문들뿐 아니라 한국인 고문들보다도 훨씬 더 합리적이고 현명한 그의 자세를 보며 "미군정에 저런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단계의 좌익 분열 공작에서는 별로 신통한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른 군정청 관계자들보다 뛰어난 점을 잘 음미하면서도 '외부인'으로서 그의 한계도 엄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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