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등화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상적이라고 하는 사회는 두려움에 기초하고 있다. 서민들은 부자가 된다는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는 소수 부유층을 제외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최면에 지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은 높은 연봉을 받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더 이상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정반대의 걱정을 해야 한다.
우선 확률적으로 그럴 경우가 훨씬 높다.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경우라면 복권에 당첨되는 확률보다 그다지 높지 않다. 직장이 없어서 걱정, 할 만한 사업이 없어 걱정, 직장이 있어도 얼마 안 돼 그만두어야 하는 걱정, 진급 걱정과 같은 걱정에 정신없이 열심히 일해야 한다.
이러한 걱정은 이른바 성공했다고 하는 큰 회사의 중역들도 지니고 있다. 한국에서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몇 안 되는 그런 사람들 역시 불안하다. 그리고 자신이 바닥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자식들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더욱 불안하다.
두려움에 기초한 사회 건설
그래서 차등화에 기초한 차등화 성장을 강조하는 다수의 성장주의자들은 두려움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셈이다. 이미 현재 한국 사회는 이들의 논리가 만연되어 있으며, 그 두려움은 사회 구석구석까지 퍼져서 우리 주위에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다.
두려움에 기초한 사회에서 주위를 돌볼 겨를도 없이 일만 열심히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사회는 기업의 이윤을 위해서는 바람직한 사회이다. 기업의 이윤, 특히 단기 이윤은 일을 많이 시키고, 급여를 줄이면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개별 기업에 이익이 된다고 해서 꼭 그 사회에 이익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사회의 안정이나 공동체 의식의 결여는 그 사회의 전체적 생산성 저하를 불러올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그 사회에 있는 기업체들 자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차등화로 인한 피해는 바닥에 떨어진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고, 그 바닥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보통 사람들도 본다. 그리고 차등화 전략의 핵심은 바닥에 떨어진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차등화 성장 전략이 먹혀들어가기 위해서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본보기가 되고 채찍이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업에서 낮은 임금에 더 많은 일을 시켜도, 근로 조건이 더 나빠져도, 조용히 참고 감수해야만 한다. 이러한 두려움은 부모들이 자녀들만큼은 꼭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을 갖게 하여 입시 경쟁이라는 과도한 희생을 유도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경제적으로 별 문제 없이 살고 있으며 낙오자는 절대 아니다. 게다가 내 자녀들은 공부를 잘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서 앞으로 잘살 수 있을 것이다. 왜 내가 약자를 보호하는 데 동의해야 하나?' 맞는 말이다. 대부분은 낙오자가 아니며, 대부분 아이들은 낙오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약자를 보호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단지 약자에게만 도움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약자가 아닌 일반적인 사람들을 위해서도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미래에 약자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덜어내자는 것이다. 두려움에 바탕을 두고 두려움으로 몰아가는 사회에서 일반적인 사람들 역시 결국 피해자가 되기 때문이다.
자신과 아이들이 약자는 아니더라도, 그들을 위해서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들부터 구해야 한다. 과도한 경쟁 사회의 피해자라 할 수 있는 아래 두 가장의 자살의 사례를 보도록 하자.
생계 곤란 비관 가장 가족 살해 후 자살
생계 곤란을 비관한 30대 가장이 부인과 자녀 2명을 살해한 뒤 자신도 목을 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일 오전 9시쯤 대구시 달서구 도원동 가람아파트 109동 김 모 씨는(36·이동카센터 운영) 집에서 김 씨와 부인 허 모(34) 씨, 아들(8)과 딸(7) 등 일가족 4명이 숨져 있는 것을 김 씨의 동생 용성(34) 씨가 발견했다. 동생 용성 씨는 "같은 아파트에 사는 형이 11일 저녁부터 연락이 안 돼 직접 찾아가 보니 작은 방에서 형수와 조카들이 가지런히 누운 채 숨져 있었고 형은 구석 서랍장에 노끈으로 목을 매 숨져있었다"고 말했다.
숨진 김 씨는 장모와 어머니 앞으로 "평생 남의 돈으로 살아온 것 같다. 아내만 혼자 남겨두고 내가 죽으면 아내에게 너무 커다란 고통을 주는 것 같아 데리고 간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경찰은 숨진 김 씨의 아내와 아들, 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색된 점과 현장에서 극약을 담은 것으로 보이는 포도주 병이 발견된 점으로 미뤄 김 씨가 부인과 자녀들에게 먼저 극약을 먹여 숨지게 한 뒤 자신은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은 숨진 김 씨가 이동 자동차 정비 차량을 운영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느껴왔다는 동생과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 따라 생계 곤란을 비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고 정확한 사망 경위를 조사 중이다. (<연합뉴스> 1998년 3월 12일자)
어느 기러기 아빠의 자살
"여보 집에 가자, 집에 가자."
2일 오전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 전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남편 정모(50·서울 송파구 방이동) 씨의 영정 앞에서 강모(47·여·캐나다 거주) 씨는 남편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오열했다. 정 씨 부부는 딸(20)과 아들(17) 교육 문제로 2001년 8월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갔다가 몇 달 뒤 정씨만 다시 귀국했다.
현지 생활비와 자녀 교육비 등 가족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에서 해오던 사업을 정리할 수가 없었기 때문. 지병인 고혈압 때문에 가족들은 혼자 떨어져 지내야 하는 정씨의 건강을 염려했지만 정 씨는 적당한 운동과 식이요법 등으로 잘 이겨냈다. 아내와 아들, 딸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긴 했지만 자녀의 방학 때 등을 이용해 만나는 것으로 달랬다.
독일제 금속 기계 제품을 수입, 국내 업체에 소개하는 사업도 불경기 영향을 다소 받긴 했지만 순조로웠다. 하지만 올해 들어 고혈압 증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두통이 심했고 몸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우울 증세가 심했고 결근도 잦아졌다.
정 씨의 남동생(42)과 직원들은 "올 초부터 부쩍 '몸이 아프다'고 하고 우울한 기색을 보였다"고 전했다. 결국 정 씨는 지난 1월 아내에게 전화해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안 아픈 데가 없다"며 "당신이 좀 들어와야 겠다"고 말했다.
서둘러 귀국한 강 씨는 남편의 건강이 나빠졌다고 판단, 곁에서 돌보기 위해 3월쯤 정 씨와 함께 캐나다로 떠나기로 했다. 담당 병원에서 300일치 혈압약도 짓는 등 주변 정리를 했다. 하지만 정 씨는 온 가족이 함께 둘러앉은 모습을 꿈으로만 간직한 채 눈을 감았다. 3·1절 휴일을 맞아 모처럼 바람을 쐬러 처가 식구들과 가까운 산에 올랐다가 먼저 귀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계일보> 2005년 3월 3일자)
경제적으로 볼 때 한 사람은 경쟁에서 성공한 가장이고, 또 한 사람은 실패한 가장이다. 차등화 성장주의자들의 눈으로 보자면, 차등화가 잘 이루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경쟁에 실패한 가장은 더 이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그러나 또 한 예는 실패한 가장뿐만 아니라 성공한 가장 역시 극심한 경쟁 사회에서 피해자가 된다는 걸 보여 준다. 그는 자식의 미래의 경쟁을 위해 모든 걸 바쳤다. 결국은 그 사람과 그의 가족 역시 경쟁 사회의 피해자가 된 셈이다.
이제 경쟁의 최종 결과만을 보고 판단하는 승자와 패자라는 구분을 떠나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패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야 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는 것들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승자와 패자 모두가 과도한 경쟁 사회에서 과도한 비용 지불을 하기 때문에 승자 역시 결과적으로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 패자가 될 수 있다.
차등화 성장주의자들이 지향하는 사회에서는 약자는 능력이 없거나 일을 열심히 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한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 그래서 도와줄 필요도 없고, 도와서는 안 된다. 게으른 사람들을 도와서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잘산다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은 뭐냐고 억울해 하기도 한다. 일을 하지 않고, 놀고, 먹고, 사회에 폐를 끼치는 그런 사람을 돕는 것은 안 된다는 말이다. 그와 함께 패배자를 멸시하는 풍조까지 생겨난다.
그러나 많은 젊은이들은 능력도 있고 성실하지만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이들이 쉽게 도태되는 그런 사회에서는 도태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사람들 또한 그 희생자가 된다. 경쟁의 잣대로만 판단하여 도태된 자들을 외면할 것이 아니라, 따뜻한 동료 의식을 갖는 것은 패자뿐만이 아니라 승자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따뜻한 사회는 승자가 될지 패자가 될지 모르는 우리의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이제 일 안 하고, 게으르고 못난 낙오자들은 당연히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차가운 마음은 버리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그 낙오될지 모른다는 공포의 화살은 우리 자신 모두를 향할 것이다. 위의 두 가장의 슬픈 죽음이 말해주듯이, 크게 경제적 학문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도 그 화살의 피해자가 되는 것을 종종 본다. 오늘의 성공한 사람들도 내일에는 실패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다. 당장 내일 보험도 들지 않은 차에 치여서 보상도 받지 못하고, 일도 할 수 없어 가족과 함께 하류 인생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보호는 그런 우리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다. 성공한 사람의 자식이라 해서 내일의 실패자가 되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지나친 경쟁과 차등화는 결국 우리 자신과 미래 세대를 향해 쏘는 화살이 될 것이다.
▲ 학생들이 잇따라 자살한 카이스트(KAIST)에서 대책을 마련하고자 학생들히 총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
최소한의 삶의 보장과 인간의 권리
차등화는 우리와 항상 함께 존재해왔으며 또 앞으로 존재할 것이다. 평등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국가에도 차등화는 존재했다. 중요한 점은 차등화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그 정도이다. 그래서 차등화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극단적인 차등화에만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결코 차등화가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며 적절한 차등화는 어쩌면 그렇게 이루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이 받는 고통과 그로 인하여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통하여 볼 때 현재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의 미명 하에서 이루어지는 차등화는 구성원들에게 폐해가 큰 극단적인 차등화이다. 자동차도 페달을 너무 세게 밟으면 바퀴가 헛돌아 가듯이, 너무 강하게 너무 빨리 밀어붙이는 차등화는 오히려 그 역효과로 피해를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주는 이득보다는 오히려 그에 지불하는 비용이 더 큰 극단적 차등화의 강화는 거절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한 사회는 일반적으로 인간이 갖는 기본적 권리의 존중과 그의 확장에 그 가치를 둔다. 다시 시민 사회의 태동인 때로 돌아가면 '인간의 권리'에 대한 주장들이 나타난다. 이는 왕과 귀족, 그리고 성직자뿐만 아니라 다른 보통 사람들도 삶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봉건 사회라 이르는 동양의 봉건 사회에서도 이 백성들의 온전한 삶을 누릴 권리는 그것이 비록 형식적일지라도 존중되어 왔다. 이제 시민 사회를 이룩한 지금에 있어서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라도 수긍해야만 하는 일이다. 이는 최고의 법률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지고한 권리인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 권리는 단지 윤리적이나 도덕적 차원만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권리의 약화는 그 사회의 불안정으로 연결될 것이고, 결국 경제 성장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신자유주의로 인한 경제 논리의 강화로 이런 인간의 최소한의 권리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기업의 논리와 자본의 논리가 팽배해 있지만 '인간이 인간다움을 실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경시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기초한 차등화 강화로 인간의 기본적 권리가 신장되기보다는 오히려 훼손된다면, 이러한 차등화는 이미 득보다 실이 더 큰 차등화다. 아이들이 장래에 최소한의 삶마저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갖는 사회가 아니라 그들이 실패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간 권리가 존중되는 사회를 위해서는 시민 의식 또는 사회의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이기적 논리의 강조는 지양되어야 한다. 그리고 '최소한의 삶'과 '최소한의 차등화'를 위해서 제도와 경제 정책을 재검토해야 할 시기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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