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증후군이라는 것이 있다.
<페미니즘 사전>(리사 터틀 지음, 유혜련 옮김, 동문선 펴냄)에 나온 설명을 보면, "성차별이 존재하고, 여성이 그것으로 고통 받고, 페미니즘(즉 그것과 닮은 것이나 될 수 있으면 다른 호칭을 갖는 것으로서)이 필요한 것을 자각하나, 페미니스트라는 딱지가 붙여지면 추하고 유머도 알지 못하고, 교조주의적인 남성 혐오를 갖는 레즈비언으로 생각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심리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즉, 페미니즘의 이슈에 대해 공감하거나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페미니스트'라는 딱지가 붙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나 두려움 때문에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을 덧붙인다는 것이다. 하기는, "꼴페(꼴통 페미니스트)", "페미년" 등 페미니스트를 비하하거나 페미니스트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들을 보면,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인정하는 건 일종의 "커밍아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도대체 왜, 무엇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마치 하나의 낙인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을까?
페미니즘 윤리학과 관련된 주제로 석사 논문을 준비하던 시기에 종종 듣던 질문이 바로 "너, 페미니스트였어?"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도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증후군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주제가 재밌고 중요하다고 생각되니까 이걸 공부하는 거야"라는 식으로 대답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다 점점 궁금해졌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페미니즘이 대체 무엇이기에? 어째서 나는 "맞아, 나 페미니스트야"라고 대답하지 못했던 걸까?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럼 너도 분리주의자야?" 내지는 "그럼 너는 여성 우월론자야?" 맙소사! 나는 여성 우월론자도 아니고, 분리주의자도 아니다. 정말이지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모든 사람들이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질문은 계속 들어온다. "그럼 왜 페미니즘을 공부하는 건데?" 그야 당연히 "조화로운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어떤 문제가 있고,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페미니즘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설마, 나에게 질문을 던졌던 그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문제제기야말로 오히려 불화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러니 그냥 닥치고 이대로 조용히 살라고 얘기하고 싶었던 걸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반드시, 그리고 기꺼이, "문제를 일으키는" "페미년"이 되고 말 테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이런 얘기를 종종 들었던 것 같다. "여자애라서 안 돼." "여자애라 별 수 없구나." "계집애가 어딜!" 혹은 "여자애가 여성스럽지 못하게 그게 뭐니?"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여성스럽게" 행동하면 여자라서 어쩔 수 없다고 비난받고, 반대로 행동하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비난받는다. 어려서는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와 다를 게 뭐가 있냐며,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여자아이도 남자아이처럼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던 어른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나에게 "여성스러울 것"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넌 남자가 아니잖아. 여자애는 그렇게 행동하면 안 돼.
"여성스러움", "여자다움", 이런 것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성다움의 표본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 도대체 "여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시몬 드 보부아르에 따르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타고난 기질이나 성향에 의해 "여성스럽게" 자라는 것이 아니라, "여성스럽도록" 길러진다는 것이다.
몸의 표식에 의해 어떤 아이는 태어나면서, 혹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공주님"으로 불리고 어떤 아이는 "왕자님"으로 불린다. 공주님이나 왕자님으로 지칭되는 바로 그 순간, 길러지는 방식이 결정된다.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옷을 입히고, 남자아이에게는 하늘색 옷을 입힌다. 남자아이가 무척 개구쟁이일 경우엔 씩씩하다고 칭찬받지만 여자아이가 개구쟁이일 경우에는 너무 나댄다느니, 얌전하지 못하다느니 하는 꾸중을 듣는다.
반대로 얌전한 남자아이에게는 좀 더 활동적일 것을 요구한다. 몸짓, 태도, 말씨 하나하나까지 여자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남자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가르친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여자는 이러이러해야 하고 남자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젠더의 가면을 쓰도록 길러지는 것이다. <젠더 트러블>(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에서 주디스 버틀러의 의문도 바로 이 점에서 출발한다.
유아가 인간이 되는 것은 이러한 질문, "남자아이인가 여자아이인가?"에 대답이 주어지는 순간부터이다. 어느 쪽 젠더에도 맞지 않은 몸의 형태들은 인간됨의 외부로 나가떨어지고 사실상 탈인간화 영역과 비체(abject)의 영역을 구성한다. 인간됨이라는 것 자체는 이런 탈인간화와 비체 영역에 대립되는 것이다. 젠더가 인간됨의 자격이 무엇인지 미리 결정하면서 언제나 거기 있는 것이라면, 마치 젠더가 무슨 추신이나 문화적 후기라도 되듯 그런 젠더로 만들어지는 인간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293쪽)
▲ <젠더 트러블>(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
버틀러는 여기에서 섹스와 젠더의 경계 자체를 허무는 데까지 나아간다. "섹스와 젠더는 아무 차이가 없으며 '섹스'의 범주는 그 자체가 젠더화된 범주이고 전적으로 정치적으로 부과된 것이며, 자연화되어 있지만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다." "'섹스'란 몸에 대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해석이기 때문에, 전통적 계보의 섹스/젠더 구분이란 없다. 젠더는 섹스로 만들어지고, 섹스는 처음부터 젠더였음이 입증되는 것이다."
섹스는 처음부터 젠더였다. 그러나 성에 대한 담론은 섹스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명명하면서 그것이 문화적·정치적으로 구성된 것임을 은폐시킨다. 버틀러는 섹스와 젠더의 경계를 허물면서 성의 범주가 정치적으로 구성된 범주임을 폭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이 정치적으로 구성된 범주라면, 또한 성이 언제나 젠더였다면, 젠더는 반드시 여성적인 것을 지칭하거나 남성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어야 하는가? 버틀러는 젠더가 남성/여성만을 지칭하도록 만든 것은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을 구별하는 성 범주는 "재생산적 섹슈얼리티라는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특정한 자연 범주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용례"라는 것이다.
이성애만이 재생산이라는 목적에 부합한다. 이성애는 남녀를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애의 규범은 인간의 몸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눈다. 이런 측면에서 성이 정치적으로 구성된 범주라는 것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남성'과 '여성'은 정치적인 범주일 뿐,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버틀러는 "성의 범주와 그것의 근원인 강제적 이성애 체계" 둘 다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의 범주와 당연시된 이성애 제도야말로 구성물이며, 사회적으로 제도화되고 규정된 환영물이거나 '페티시'이다. 이들은 자연스러운 범주가 아니라 정치적인 범주이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자연스러운' 것에 의지하는 것은 언제나 정치적이라고 입증된 범주이다. (323쪽)
이처럼 성이 정치적으로 구성된 범주라는 것이 드러나면 젠더의 수행은 남성/여성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어떤 내적 전복력이 될 수도 있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여성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지만, 이 과정은 결코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남자로도 여자로도 진실하게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트러블러가 되자!!!
어떤 사람에 대해 평가할 때, "여자보다 더 여자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거나 "양성의 좋은 특성을 두루 갖춘"과 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를 종종 본다. 이러한 표현들은 젠더 정체성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은 정치적으로 구성된 범주이며, 젠더는 강제적 이성애의 규범으로 인해 남성/여성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이다. 젠더는 고정된 명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의미를 획득하는 동사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젠더 정체성 역시 수행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다. 젠더는 "양식화된 행위의 반복을 통해서 시간 속에 희미하게 구성되고, 외부 공간에 제도화되는 어떤 정체성이다. 젠더 효과는 몸의 양식화를 통해 생산되고, 따라서 이 효과는 몸의 제스처, 동작,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양식들이 안정된 젠더 자아라는 환영을 구성하는 일상적 방법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어떤 날은 예쁘게 화장하고,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태도도 다소곳하게 하며 한껏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어떤 날에는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아무렇게나 묶고, 헐렁한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실제 사이즈보다 약간 큰 운동화를 신으면서 "여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먼" 듯이 행동하기도 한다. 여성스러움을 흉내 내거나 흉내 내지 않는 것, 이런 "연기"를 한다는 점에서 젠더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는 사회적 규범을 반복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규범을 비트는 것일 수도 있고, 규범을 넘어서는 것일 수도 있다. 젠더의 수행은 "고정된 정체성이라는 환영적 효과가 정치적으로 빈약한 구성물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한다."
버틀러의 말을 빌리면, "젠더의 속성과 행위들, 몸이 자신의 문화적 의미를 보여주고 생산하는 다양한 방식들이 수행적인 것이라면, 어떤 행위나 속성이 재단될 수 있는 선험적 정체성이란 없다." 여성스러움, 여성스러운 것, 이런 것은 어떤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 이성애의 규범이 만들어 낸 허구일 뿐이다. "본질적 섹스와 진정하거나 고정된 남성성 혹은 여성성의 개념 자체도 젠더의 수행적 성격을 감추는 전략의 일부로서 구성된 것이며, 남성의 지배와 강제적 이성애라는 규제적 틀 바깥에 있는 젠더 배치를 증식시킬 수행적 가능성을 감추려는 전략의 일부로 구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허구적" 정체성을 전복시키는 것 역시도 반복된 의미화 실천의 내부에서만 가능하다. 트러블러로서 나는 규범을 반복하지만 동시에 규범을 비틀고, 그렇게 함으로써 규범의 억압적 구조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렇게 문제를 일으키면서, 조화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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