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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 먹여 살린다'는 그 천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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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명 먹여 살린다'는 그 천재는 누구인가?

[공작의 꼬리 경쟁·12] 차등화를 통한 분배의 양극화

차등화(불균형) 성장 : 차등화를 통한 분배의 양극화

차등화 성장의 주장은 보상 동기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보상 동기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차등화의 간극을 높여야 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잘 사는 사람을 더 잘 살게 하고, 가난한 사람을 더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함으로써 더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그 성장의 혜택을 본다는 것이다.

과연 현재의 강도 높은 차등화가 경제 성장에 얼마나 기여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한국의 근래에 악화된 양극화 현상이 보여 주듯이 가난한 사람들까지 성장의 혜택이 골고루 분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차등화는 분배의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저임금자, 실업자, 가난한 은퇴자나 노인과 같은 약자들에 대한 사회적 배려의 약화나 무관심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한다.

양극화에 기여하는 차등화

차등화의 강화가 과연 경제 성장의 증가분에 얼마나 기여를 했을까 하는 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북유럽 국가들은 다른 나라에 비하여 차등화보다는 복지 증가를 통한 균등화를 강조하였다. 오히려 그 국가들이 높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듯이, 차등화를 해야 성장을 빨리 한다는 논리는 현실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

차등화가 성장에 기여하는지에 대한 논란과 함께 논의 되어야 할 중요한 점은 차등화 결과로 나타나는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다. 한국에서의 차등화가 강도 높게 도입된 이후 약 10여 년을 보면, 소득의 양극화 현상이 뚜렷하며, 부의 증가가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부자들에게 집중되어 간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국의 중산층은 계속 감소 추세에 있으며, 또 빈곤층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중산층은 1997년 51.5%에서 2007년 43.7%로 감소했다. 그래서 차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장뿐만 아니라 차등화로 인한 부의 재분배 역할 역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부익부빈익빈의 논리로서의 차등화의 역할 말이다.

ⓒ프레시안

차등화는 대체로 두 경로를 통해서 결정된다. 첫째는 시장에서 결정되는 보수의 차별에 의해서 결정되며, 둘째는 정부의 재분배 정책을 통해서이다. 정부가 소득을 평등하게 재분배한다면 소득의 차별에 의한 차등화는 약화될 것이다. 그래서 차등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의 차등화뿐만이 아니라 부자 감세나 복지 지출의 축소와 같은 정부의 재분배 단계에서의 차등화 역시 강조한다.

첫째, 시장에서 결정되는 차등화는 직장인과 기업 사이의 이익의 분배와 함께, 직장인들 간의 보수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 보통 양극화의 중요한 원인인 자본 소득과 노동 소득의 차이는 직장인과 기업 사이의 몫이 어떻게 분배되는지에 의해서 결정된다. 차등화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직장인의 몫을 줄이고 기업의 몫을 늘려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직장인들을 쉽게 해고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노동의 유연성이라 이야기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기업 입장에서는 이윤 창출의 아주 유용한 수단으로 쓸 수 있다.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같은 조건에 일을 많이 시킬 수 있다는 것과 같다. 해고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으면 열악한 근로 조건을 감수하거나 추가 근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또는 같은 임금에 더 고급의 노동을 고용할 수 있다. 이러한 불안감은 직장인들로 하여금 자신의 여가를 희생하여 노동의 질 향상을 위하여 정상 근무 외에 남는 시간에 독학을 하거나 학원에 다니며 기술 습득이나 외국어 습득의 노력을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낙오될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경로로서의 차등화 강화는 세금과 정부 지출을 줄여 재분배를 약화함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는 저소득층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사회 복지나 실업 보험, 건강 보험 등에 쓰이는 지출 등을 줄이거나, 또는 부유층이 상대적으로 많이 부담하는 세금을 낮춤으로써 실현된다.

통계청의 자료는 한국은 과거 10년 동안 빈부격차가 꾸준히 상승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소득 불평등의 척도 중의 하나인 지니계수는 계속 악화되어 외환 위기 이전 0.26 수준에서 2007년은 0.32를 기록한다. 지니계수가 0.3 이상이면 소득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으로 보고, 0.4가 넘으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단계로 본다.

그리고 2007년 통계청 조사는 하위 20%의 월 평균소득 85만5900원이고 상위 20%의 평균소득은 742만5100원이다. 그리고 성균관대학교 이성림의 중산층 분류에 따른 변화를 보면, 중산층은 1997년 51.5%에서 2007년 43.7%로 감소하고, 같은 기간에 고소득층 비중은 28.6%에서 30%로 소폭 늘어났으며, 저소득층 비중은 19.9%에서 26.3%로 급격히 증가했다.

부자들을 더욱 잘 살게 하는 것이 더 큰 성장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불균형 분배를 정당화하는 수단이며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논리로 볼 수 있다. 정부의 복지 지출이나 소득 재분배 역할의 약화와 함께 기업이 직원들의 몫을 줄이는 데에 그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차등화는 소수의 전문가들의 고수익을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다수의 직장인들의 일하는 조건의 악화와 열악한 급여나 후생을 정당화하는 구실도 제공한다. 소위 차등화에 의해서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지 않았거나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낮은 급여나 열악한 근로 조건 등은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 논리로써 쓰이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더 일을 열심히 하거나 능력이 있으면 더 많은 보수를 받을 수 있으므로, 보수가 높고 낮은 것은 그들의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저임금에 대한 모든 책임은 노동자들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차등화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리에 따르면 소득의 양극화는 필요불가결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복지 정책이나 소득의 재분배를 통하여 완화해서는 안 된다. 결국 차등화의 강조는 소득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여러 사회 문제들을 무시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복지 정책과 같은 사회의 안전장치가 미미한 상황에서 차등화의 강화는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고통을 외면하게 만들고, 많은 사람들을 실업의 불안에 떨게 할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실업의 불안은 직장인들의 몫을 줄이고, 기업의 몫을 늘리는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다. 결국 차등화 성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업과 직장인 사이의 분배에서 기업 이익을 대변하고 사회 양극화에 기여함을 인식해야 한다.

차등화와 천재의 사회 기여론

▲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업적에 상응하는 금전적 보상을 받지 않았다. 또 그는 금전적 보상 때문에 물리학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joysf.com
흔히 차등화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로는 똑똑한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고 한다. 인재가 경제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 말이다. 천재의 사회 공헌도와 함께 천재의 보수나 대우도 그에 상응해야 할 것이라는 의미 역시 자연스럽게 유출할 수 있다. 여기서는 (천재의) 사회 공헌도와 그에 따른 보수의 차등과 양극화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한다.

이 말은 경제에 천재가 큰 기여를 하며, 그 기여에 대하여 시장은 높은 보수로 그 공헌도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한다는 또는 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즉, 시장에서 높은 보수를 받는 것은 사회 공헌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재미있지만 모순 된 말이다. 시장 가격에 의한 임금의 차등화를 옹호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누가 누구를 먹여 살리는 서로 돕고 돕는 공동체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각 개인의 이기적 이해 추구에 기초한 시장 논리와 상반되는 발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결정되는 임금이나 상품의 가격은 사회 공헌도와 상관이 없다. 예를 들자면, 담배의 가격이 사회 공헌도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듯이 어느 한 직장인의 임금 역시 사회 공헌도의 평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이가 높은 연봉을 받는다고 하여 그의 사회 공헌도가 다른 사람보다 크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그가 낮은 연봉을 받으면 그의 사회 공헌도가 작다고 할 수 없다.

소수의 천재가 사회에 대한 공헌도에 의한 보상으로 부자가 되듯이, 다들 사회 공헌도가 높아서 부자가 되었을까? 다시 말해서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은 그에 대한 보상으로 부자가 되고 그리고 부자는 사회에 기여한 사람들인가? 그리고 이러한 '사회 기여론'이 과연 양극화로 나타나는 부의 불균형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인류의 사회, 문화, 과학, 예술의 발전에 기여한 천재들이 부자가 되었을까? 아니면 부자가 되기 위해서 그러한 기여를 한 것일까? 콜레라, 광견병, 탄저균의 백신을 발견한 파스퇴르는 수많은 생명을 구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의 사회 공헌도를 따지자면 아마 세계 최상의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는 그 결과에 상응하는 부를 축척한 것도 아니며, 그 역시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고 백신을 연구 발전시킨 것이 아닐 것이다. 천재 아인슈타인 역시 그의 인류에 대한 공헌으로 큰돈으로 보상받지 않았으며 그 역시 그러한 금전적 보상 때문에 그의 일생을 바쳐 연구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보상이 적다고 해서 사회 공헌도가 작다고 할 수 없으며, 시장에서 큰 보상을 받는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회 공헌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경우 세계 금융 시장의 혼란을 초래한 큰 은행의 경영인들의 높은 보수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리먼 브라더스의 최고 경영인 리차드 펄드는 2007년 34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리먼 브라더스는 그 이듬해 서브프라임 사태로 파산을 하게 되면서, 세계 금융 위기와 경제 침체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규제 풀린 금융 시장에서 리차드 펄드와 같은 월가의 전문 경영인들의 이윤 우선의 기업 경영은 결국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게 되는 경제 침체로 연결되는 금융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그들이 똑똑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이 받은 보수와 사회 공헌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인류에 대한 기여와 돈 많이 받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었으며, 오히려 인류에 큰 기여를 한 사람들은 금전적 보상과 상관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보수가 높다고 하여 그들의 사회 공헌도가 높다는 논리 역시 성립하지 않으며, 사회 공헌도에 의한 부의 편중 논리는 양극화를 옹호하는 논리로 남용 될 수 있다.

자선 행위는 성장의 적

우리는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여 다른 사람을 돕는 뉴스를 종종 접한다. 예를 들면 20년 동안 떡볶이를 팔아온 어떤 할머니는 자신은 최소한의 생활만을 하면서 모아온 전 재산 1500만 원과 전세금 800만 원을 기부했다는 보도도 있다. 미국의 빌 게이츠가 많은 재산을 기부하여 그 부인과 함께 자선 사업을 한다.

그리고 워런 버핏이라는 부자 역시 그 사업에 많은 돈을 기증하였다. 우리는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기부금을 내고, 약자를 도우려고 크고 작은 자선 사업이나 봉사 활동에 참여함을 본다. 그들이 베푸는 사랑과 약자를 배려하는 정신은 사회 구성원의 유대를 강화시키며 공동체로서 존재를 공고히 한다.

앞에서 보수와 사회 공헌도의 (반)비례 관계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자선 행위는 사회 공헌도와 보수와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자선 행위를 많이 하면 할수록 자신의 보수(몫)가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몫이 커지게 된다. 그러나 차등화 성장 위주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자선 행위는 차등화 정책에 역행하는 것이다.

즉, 자선 행위와 같은 약자를 보살피는 사회적 행위가 확대되고 그래서 그들의 몫이 커지면 강도 높은 차등화가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직장인들이 항상 불안해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바닥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위협 역시 그 효력이 약화될 것이다. 차등화 실현을 위해서는 성공한 소수가 당근으로 필요할 뿐만 아니라, 채찍으로서 사회의 패자인 바닥에 떨어진 사람들의 존재 역시 필요하다.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정점에 달했던 빅토리아 시대에는 이런 자선의 논리를 죄악시하는 풍조가 있었다. 차등화에 역행을 하기에 자선은 게으름을 부추기고, 나태와 타락의 온상이 된다는 논리였다. 진정으로 사람들이 나태해지고 타락하는 것이 두려워 자선을 죄악시했을까? 이는 열악한 상황에서 사는 사람들을 외면하게 하는 편리한 합리화였을까?

이는 가난한 자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사회에서 그 사회가 갖는 분배 불균형으로부터 발생하는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개선하기보다는,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논리이다. 그래서 빈부 격차를 외면하는 사회 구조적 결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차등화 주장은 보상 논리로 분배의 불균형을 전제로 한다. 그 논리에 따르면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이 받아야 하는 당연한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책임이 가난한 사람 자신에게 있는 것이지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이다. 문제가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니, 양극화를 초래하는 사회 구조적 문제와 양극화로 생기는 부정적 측면을 직시하고 해결하려는 논의를 외면하게 한다.

현재 한국의 양극화 문제와 함께 그 해결을 위한 어떠한 사회적 노력이 있나 생각해보자. 양극화의 심각성에 비교하여 그에 대한 대책은 기껏해야 지엽적이고, 근본적 대책은 진지하게 논의되지 않는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현재 경험하고 있는 천재의 사회 기여론과 같은 차등화를 정당화하는 논리의 팽배는 양극화의 원인과 책임을 각 개개인에 지우는 역할을 하고, 양극화 문제의 사회적 해결책 모색을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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