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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한 철학'이 만든 괴물 서남표, 그도 희생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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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한 철학'이 만든 괴물 서남표, 그도 희생양이다!"

[기고] 타살의 대학, 카이스트

서남표 그는 성공한 분이다. 과학자로서 그리고 과학 정책 조언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지닌 분이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그는 1936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1954년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1955년에 MIT에 입학한다. 1963년에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70년 MIT 기계공학과 부교수로 부임하여 같은 대학 생산기술연구소장, 기계공학과 학과장, 석좌교수를 거쳤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산업계와 정부에서도 일하였다. 여러 회사의 이사이며, 회사도 설립했다. 특히 1984년에서 1988년까지 미국과학재단(NSF)의 공학 담당 부총재(대통령 추천 및 상원 인준으로 임명)를 역임하면서 미국 정부의 공학 담당 연구 개발의 총책임을 맡았다.

그것으로 족하다. 그는 훌륭한 교육자는 아니다. 교육은 과학기술과 달리 그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교육은 전문 분야이기 이전에 가장 일반적인 분야이다. 그는 이런 일반적인 분야를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교육 철학에 우려가 있다.

또 그는 빈곤한 시대에 혼자 성공한 분의 장단점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빈곤하기 때문에 포괄적인 문화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성공이라는 하나의 비전을 가지고 그 목적을 향해 일로매진한 사람들은 소통과 교양에서 심각한 결함을 지니게 마련이다.

그가 외친 성공의 철학은 '철학의 빈곤'을 보여준다. 그가 생각한 꿈은 일종의 잘못된 환상이다. 이 환상이 카이스트 구성원들에게는 일종의 폭력이었다.

그의 환상은 1950년대에 전쟁을 방금 치른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 출신으로서 미국 대학 생활에 적응하느라 고생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그는 영어 때문에 고생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학생들이 영어를 더 잘한다면 자기처럼 더 많은 성공을 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이 점에서 그는 솔직한 편이다. 그러나 포괄적 비전과 적극적인 소통 없는 솔직함은 교육 책임자로서는 낙제점에 가깝다. 이것이 문제였다.

▲ 서남표 카이스트 총장이야말로 빈곤한 철학의 희생양이다. ⓒ연합뉴스

그러나 그는 자신도 그 환상의 피해자임을 모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이는 빈곤한 나라에서 자란 그의 빈곤한 철학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의 철학은 성공의 철학이다. 세계 대학의 순위표에서 등수를 올리는 것이다. 이를 대학 경쟁력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글로벌화를 꿈꾼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학은 제국의 대학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를 겪었다. 인도와 필리핀은 영국 식민지였다.

우리는 인도가 부러운가? 우리는 필리핀이 부러운가? 그들에게 영어는 식민지 유산이다. 그 유산이 뭐가 부러운가?

영어가 과연 경쟁력의 원천인가? 경쟁력이라는 말도 일종의 환상 아닌가? 우리나라에서 영어 모른다고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입시와 고시, 취직이나 승진에 필요하긴 하다. 영어가 필요만 사람들만 잘하면 되고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원 시스템을 잘 갖추면 된다.

영어가 뭐가 문제인가? 우리는 영어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영어 필요하면 그냥 하면 된다. 영어를 저렴하게 배울 수 있는 기관을 각 지역마다 만들어 줘서 사교육 받지 않고도 영어 공부할 수 있게 하면 된다. 영어로 소통이나 번역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저렴하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을 만들어 혜택을 주면 되지 않은가? 건강이 필요하다고 해서 모두가 의학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듯이.

대학이나 기업이 영어에 광분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제는 정부까지 난리이다. 그런데 왜 자유무역협정(FTA) 번역은 틀리는지…. 번역 전문가에게 맡기면 됐을 것인데.

왜 우리는 영어에 광분하는가? 영어가 우리 모국어가 아니듯이 우리 대학의 모델은 MIT나 하버드가 될 수 없다. 그 대학들이 참고 사항은 될 수 있다. 좋은 것은 벤치마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대학을 그대로 따라하겠다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하다.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지에서 독립된 이후에도 제국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제국을 그리워하고 닮고 싶은 무의식적 욕망으로 일종의 심리적 질병이다. 우리의 오리엔탈리즘은 영어과 미국화로 표출되고 있다. 서남표 총장이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는 MIT가 특정 언어에 광분하는가?

MIT의 사명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영어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영어로 인용해 본다.

"The mission of MIT is to advance knowledge and educate students in science, technology, and other areas of scholarship that will best serve the nation and the world in the 21st century. The Institute is committed to generating, disseminating, and preserving knowledge, and to working with others to bring this knowledge to bear on the world's great challenges. MIT is dedicated to providing its students with an education that combines rigorous academic study and the excitement of discovery with the support and intellectual stimulation of a diverse campus community. We seek to develop in each member of the MIT community the ability and passion to work wisely, creatively, and effectively for the betterment of humankind."

우리말로 번역을 하자면 "MIT의 사명은 21세기 국가와 세계에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는 과학, 기술 그리고 다른 학문 분야들에서 지식을 발전시키고 학생들을 교육하는 것이다. 우리대학은 지식을 만들고 퍼뜨리고 보존하는 일과 다른 사람들과 작업하여 이 지식을 세계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적용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우리 대학은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교육을 제공하는 데에 헌신한다. 그 교육이란 다양한 캠퍼스 공동체의 지원과 지적 자극을 함으로써 엄격한 학문적 연구와 발견의 흥미를 혼합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대학 공동체의 각 구성원이 인류의 더 나은 상태를 위해 현명하고 창조적이고 효과적으로 작업하는 능력과 열정의 개발을 추구한다."

MIT의 사명 어디에도 영어 몰입이라는 단어는 없다. 더군다나 그가 사모하는 MIT는 실용성을 강조하는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풍부한 인문학과 사회과학 및 예술 분야의 학부도 갖추고 있다.

실제 MIT와 그가 본 MIT와 얼마나 다른가? 이 정도면 마음의 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병이 그만이 걸린 병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지도층도 걸린 병이라는 것입니다.

오렌지는 "아륀지"로 발음해야 된다고 주장한 전 숙명여대 총장이나 영어 공영화론을 외친 복거일이라는 작가나 영어 몰입 교육을 외친 현 이명박 정부의 사례도 이 병이 얼마나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진 병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영어 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은 우리 스스로가 만든 울타리에 스스로 갇힌 격이다.

대학은 MIT 사명이 보여주듯이 자유에 기반을 둔 학문적 활동과 미래의 우리 사회의 리더를 키우는 것이다. 리더를 키우는 곳이기에 자율적 행동을 장려해야 한다.

대학은 단순히 이익 지향의 인간형을 키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대학생은 미래의 리더이기 때문에 공적인 역할도 요구된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스폰서 검사는 이런 교육 철학의 빈곤과 한계를 얼마나 잘 보여주는가?

우리나라의 은밀한 모델인 일본의 관료들이 이번 지진 사태와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관련해서 얼마나 관료적인지를 잘 보여줬다. 일본의 관료들이 영어를 못해서 이런 사태를 낳은 것인가?

100% 영어 강의를 하지 않은 일본의 대학은 영어도 못하면서도 노벨상을 타는 과학자를 10명 이상 키워냈다. 영어를 잘했으면 더 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나타났을까?

현대 사회에서 기업의 역할과 관련해서 단기 이익 지향적 기업보다는 사회 책임형 윤리적 기업이 21세기의 기업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기업의 리더도 단순히 성과 지향적 리더가 아니라 소통 지향적 리더가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이것이 애플과 삼성전자의 차이이리라!

대학을 기업화하려는 움직임을 우리는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일본 대지진 이후 지진 해일보다 더 큰 충격과 고통을 주고 있는 방사능 문제를 일으킨 도교전력의 문제점은 민영화가 주원인이었다. 민영화로 인해 안정성이라는 공익성보다 수익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생겨난 인재(人災)라고 규정할 수 있다.

공기업의 민영화도 이런 큰 문제점을 야기하는데 공기업보다 훨씬 더 공익성을 추구해야 되는 대학의 민영화는 더 큰 문제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는 이런 면에서 다시 한 번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대학은 그 학문 발전을 위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대학의 지식이 국가와 세계에 기여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기여하기 위해서라도 자유의 공간이어야 한다.

어떻게 대학의 다채로운 활동이 어떻게 해서 성공/일등 지향이라는 하나의 가치로 수렴될 수 있는가?

성공한 재미 동포 과학자로서의 서남표가 내세운 카이스트를 MIT로 만들고 싶은 외로운 투쟁은 잘못된 방향을 잡은 투쟁이다. 그의 일류화의 모델은 미국 대학의 짝퉁이다.

과학도 문화적 활동의 일부이다. 과학도 단순히 산업화의 역군이나 국부의 증진 도구만이 아니다. 대학은 더구나 문화적 공간을 창출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대학이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로부터 고립된 공간이 아니다. 우리나라 토양에 맞는 대학을 만들면 된다.

괴테는 말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고.

카이스트에 필요한 것은 영어가 아니라 교양이다. 우리나라의 미래의 과학기술의 리더들에게 인문학적 상상력과 사회과학적 현실성을 익히며 예술적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 훨씬 더 긴요하고 중차대한 카이스트의 사명이리라.

카이스트에 진정 필요한 것은 통섭이다. 영어라는 눈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이 더 필요하다. 카이스트 구성원들에게 현재 벌어지는 있는 일련의 자살은 철학과 교양의 빈곤을 조장한 우리 일부 지도층의 잘못된 환상으로 인한 타살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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