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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여관이 된 학교·괴물이 된 아이, 그 이유는 바로…

[변방의 사색] 학교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생각

고등학생 아이들은 참 많이들 잔다. 이러다가 10~20년 뒤에는 전 국민적인 척추측만증이 만연하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내가 수업 시간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잠들어 있는 아이들을 깨우는 일이다. 새 학년이 곧 시작될 텐데, 기대보다 권태가 엄습한다. 올해는 또 얼마나 아이들의 졸음과 싸워야 할지, 지겨운 싸움의 나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실상 '여관'이 되어 있다.

아이들이 갈수록 글쓰기를 힘들어하고 귀찮아한다. 가르치는 내 정성의 열도가 떨어져가는 것도 있겠지만, 아이들의 글쓰기 능력이 갈수록 퇴화하고 있는 것은 내가 교직 생활을 처음 시작하던 10여 년 전과 비교해보면 뚜렷해 보인다. 아이들은 그저 글쓰기가 귀찮은 것이다. 굉장히 복잡한 문제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아이들이 의견을 묻는 글쓰기 과제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답해버리고 마는 것, 판단에 대한 이유를 물으면 '그냥'이라거나, '그런 것 같다'라고 얼버무리는 것에는, 아이들이 엎드려 자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때워버리거나 흘려버리는 것으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의 무의미함을 잊어버리려는 것과 비슷한 동기가 엎드려 있는 것이다. 요컨대, 아이들의 이러한 무기력과 권태의 뒤편에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대하고 복잡하고 짜증나는 어떤 세계'가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무기력하지만 또한 이 세계와의 대면을 주체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생겨난 현실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변화의 흐름과 폭에 최근 들어 분명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내가 언급한 몇 가지 이야기는 인문계 고등학교, 그래도 중학교 내신 성적 기준으로 50% 내외의 학생들로 채워진 학교에서 체득한 실감이다. 양태는 다르지만, 여러 공간에서 여러 방식으로 아이들의 변화는 뚜렷이 감지된다. 초등학교, 중학교, 전문계고를 포함한 거의 모든 학교들에서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우리 지역 중학교들에서 큼직한 사건들이 벌어졌다. 교사의 체벌에 불만을 품은 아이들이 학교에 불을 지른 일이 있었다. 다행히 큰 사고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초등학교 고학년생, 중학생들이 교사에게 대들거나 위협을 가하는 일은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중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규모의 상납 조직이 적발되고 있다.

교사들이 아이들에게 '치를 떠는' 일들이 생겨난다. 어서 빨리 방학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버티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자기들만의 자리에서는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호소한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교사들은 아이들이 통제가 되지 않고 무엇보다 수업 자체가 너무나 힘들다고 호소한다. 나는 앞서 서술한 인문계 고등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를 지역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타 지역에 강의를 다니면서 특히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들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오늘날 많은 교사들에게 화급한 것은 아이들의 성장을 위한 교육이 아니라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교사로서의 자기 입지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만큼 교실에서 교사의 입지가 위태롭다. 젊은 여교사, 육체적인 완력을 행사하지 않거나, 인간적인 허점을 노출하는 교사들에게 마치 용암이 약한 지반을 뚫고 분출하듯이 아이들이 수업이나 학급 운영에 대한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생겨난다. 비공식 권력이 공식 권력을 제압하는 어떤 계기를 겪은 이후로부터 교실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전문계고는 일찌감치 게토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문계고는 나름의 적응 기제-포기와 인정-속에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다. 전문계고는 숙련된 기능 인력을 배출하는 과업에 거의 실패하고 있지만, 대학 정원이 이들 전문계고 졸업생들까지도 포괄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존립할 수 있었다.

아이들의 이러한 일탈과 저항을 학교는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 학교는 거의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학칙의 처벌 규정을 턱없이 강화하고, 자퇴나 전학을 권고하거나 퇴학시키거나 아니면 아이들을 학교 바깥 기관에 떠넘기는 것밖에는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문계고의 선례를 따라 적극적인 일탈과 저항에 대해서는 교육을 포기하고, 그 나머지에 대해서는 사실상 방관하면서 연명할 가능성이 높다.

▲ 한 고3 교실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잠들어 있다. ⓒ연합뉴스

이 현실의 밑바탕에 작동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변화

아이들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이 현실의 변화를 설명하는 여러 관점들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두 가지 동인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싶다. 하나는 1990년대 후반 외환 위기 이후로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경쟁 사회로의 재편이며, 다른 하나는 '취업난'으로 표현되는 경제적 불황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테면 '졸업식 알몸 뒤풀이' 같은 일들이다. 올해는 경찰 권력의 유례없는 호들갑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는 했으나, 아이들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선·후배 사이의 먹이사슬과 그들 동아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가학적 유희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졸업식 알몸 뒤풀이 뿐 아니라 지난 시절과 구별되는 숱한 극단적 저항과 일탈에 연루된 아이들이 1990년대 중반, 혹은 후반 출생이라는 점이다. 즉, 그들이 대부분 외환 위기를 전후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내가 글쓰기 수업을 통해 아이들의 부모의 삶과 가족사를 글로써 정리하는 과제를 주었을 때, 굉장히 많은 아이들의 글에서 'IMF'가 등장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을 그만두었거나, 그 이후 어려워진 살림 때문에 부부싸움이 잦아졌다거나, 더러 이혼을 했다거나, 대도시에서 시골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거나 하는 식의 변화 말이다. 물론 IMF 이후로 살림살이가 더 나아졌다는 경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외환 위기로 비롯된 국제통과기금(IMF)의 구제 금융 사태는 말하자면 그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를 뚜렷하게 구분하는 계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교육에 미친 일차적인 영향은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의 양육 패턴이 질적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변화를 어느 칼럼에서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구조 조정, 정리 해고,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들이 이때부터 생겨났고, 생계 비용에 대비한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할 수 없이 맞벌이를 해야 했고, 많은 부모들이 이혼과 별거로 아이들을 홀로 키우거나 시골의 조부모님 댁에 맡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남겨진 아이들이 유소년기의 대부분을 학원과 인터넷, 텔레비전으로 보내며 자라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뛰어놀 수 없었고, '살아있는 세계'와 교섭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아이들의 움트는 그 '정직한 에로스'는 억압되었고, 자폐적이고 파괴적인 놀음의 과정 속에서 '욕구와 충동의 덩어리'가 되었다.

누가 부모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지난 10여 년 사이에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가파른 곡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먹고살려고 몸부림치느라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뒤처지면 곧장 먹잇감이 되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부모는 아이를 학원에 보내야 했고, 그 학원에 다닐 비용을 대기 위해 더 많이 일해야 했고, 그래서 더더욱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없었다. 이 악순환의 시간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IMF 구제 금융 체제 이후에 사교육이 더욱 번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상한 의미가 있다.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생계 비용에 대비한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이 감소되는 시점에서 아이들이 사교육을 시작하는 시점이 더욱 낮아지고, 사교육의 영역과 종류가 더욱 확대되고 다양해졌으며, 가계 경제에서 사교육비의 비중이 더욱 높아진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느 논객은 '우리 안의 이명박'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사교육 학습 노동으로 자식을 내모는 '의식 있는 인텔리 부모'의 이중 심리를 비판하지만, 그것은 부분적인 설명력을 가질 뿐이다. 오늘날 사교육의 번성은 부모의 학력이나 사회의식,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먹고 사는 일이 너무나 강파른 곡예가 되어 버린 현실과 그 개선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부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한 공포감에서 연유한 것이다.

고등학교에 이어 초등학교, 중학교 교실마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 학원과 과외에 시달린 아이들의 정서, 너무나 이른 시기부터 경쟁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그에 따른 해소 충동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어차피 공부는 학원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며, 학교는 재미없고 따분하기만 하다. 새롭게 배울 것도, 재미도 없는 교실에서 아이들은 그저 몸과 마음을 해방시키고 싶어 할 따름이다.

잠을 자든, 떠들고 놀든 어차피 아이들은 학교 끝나면 학원에는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학교는 이제 보육(保育) 시설도 되지 못하고, 보육(保肉) 시설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오늘날 학교의 교육 불가능은 많은 부분 IMF 구제 금융 체제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로부터 발원한다.

취업난

그러나 아직까지 학교는 학력을 인증해줄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관이며, 따라서 상급 학교로 '진학'시킬 수 있는 권능을 여전히 독점하고 있다. 오늘날 학교는 결국 학벌이라는 증서를 획득하여 노동 시장으로 진입시켜주는 기능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취업이라는 최종의 '출구'가 서서히 막혀가고 있다. 이 부분은 좀 더 면밀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지만, 우선 내 개인적인 체험을 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재작년 무렵의 일이다. 교무실로 한 졸업생이 인사를 하러 왔다. 그 친구는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잘해서 많은 선생님들이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방 국립대학교 중에서 손꼽히는 대학의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그 학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내신 성적이 3년간 평균 1.5~1.8등급 이내에 들어야 하고, 수능 성적 역시 언·수·외·탐 평균 2등급 이내여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 9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발령받기 전에 인사를 드리러 왔다는 것이다.

그 친구가 다녀간 뒤, 선생님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학과는 졸업생들은 예전에는 행정고시를 보거나, 아니면 7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서 적지 않게 합격하던 명문학과였는데, 그새 눈높이가 많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그 친구는 9급 공무원 시험에서도 70대 1의 경쟁을 뚫었다고 한다.

작년 여름 무렵, 나는 교원대학교 학생들의 초대를 받아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 국어교육과 학생이 와 있기에 뒤풀이 자리에서 내가 쓴 국어 교육 관련 책을 선물해 주었다. 그 책은 주로 언어 교육, 인문 교육에 관한 내 체험을 정리한 것인데, 제목을 굳이 '삶을 위한 국어 교육'이라고 정한 것은 현장 국어 교사나 그 친구 같은 국어교육과 학생들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말이, 국어교육과 학생들은 이런 책을 읽을 여유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자기 과 친구들은 대부분 2학년 때부터 교원 임용 시험 준비를 시작해서 4학년 때까지, 방학 때는 노량진까지 올라가서 공부를 하는데, 졸업할 무렵에는 한 학년 30명 중에 겨우 5명 내외가 합격한다는 것이다. 임용 시험 경쟁이 치열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교원대학교 국어교육과는 고3 담임을 해본 내 경험으로는 거의 'SKY' 대학에 들어갈 정도의 수능과 내신 성적이 되어야 입학할 수 있는, 굉장히 우수한 아이들의 집단이다. 그런데 그 학과에서도 국어 교사가 되기 위해 다른 대학 생활 전부를 희생시키고 시험을 준비해도 합격률이 20%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런데 그 합격률도 다른 학과와 비교하면 상당히 높은 수치라는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9급 공무원, 중등 국어 교사라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는 데에도 이 정도로 엄청난 경쟁을 뚫어야 하는 것이다. 상위권 대학이 이 정도이니 지방 사립대학교나 전문대학들의 상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얼마 전, 내가 3학년 때 담임을 했던 아이 몇 명이 학교를 찾아왔다. 군 입대를 앞둔 대학 2학년생들이었는데, 셋 중에 두 녀석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고 있었다. 이 친구들은 모두 지방 전문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학과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취업 전망이 어두워 계속 다녀야 할지 말지 고민이 되어 일단 휴학을 했다고 한다.

입대 전에 돈을 좀 모아보리라 생각하고는 함께 몇 달간 일을 했다고 한다. 말투에서 서울 쪽 억양이 느껴지기에 어디서 일했냐고 물었더니 경기도 어디 공장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여름날 고된 노동으로 눈에 띄게 검어진 낯빛에 말투도 서울 쪽 억양으로 변해버린 아이와 마주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아팠다. 결국 군대를 다녀와도 녀석은 이렇게 세상에서 떠돌아야 할 것이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이런 취업난은 이제 대학 교육 뿐 아니라 초·중등학교 교육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선 경쟁이 갈수록 극렬해진다. 거의 총력전 체제라고 표현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것은 물론 역대 정권의 적극적인 교육 시장화 정책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앞선 사례들처럼 '교육을 통해 먹고 살 만한 지위를 얻기가 더욱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등교 마감 시각이 되어 학교 교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하면, 그 이전까지 천천히 걷던 아이들도 선 안에 들어가기 위해 질주를 시작하듯이, 안정적인 삶으로 나 있는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하면서 경쟁은 더욱 극렬해지고 경쟁의 출발 시점도 갈수록 낮아진다.

나는 이것이 일시적인 경제 하강 국면에서 생겨나는 취업난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이것은 대단히 구조적인 문제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세계 경제가 사실상 공황에 준하는 수준으로 주저앉고 있는 현실의 반영이다. 1930년대의 공황을 제2차 세계 대전을 통해 돌파한 세계 자본주의는 전쟁 후에는 제3세계를 공략하면서 크게 성장했지만, 그 이윤율 성장의 정점은 1970년대였다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일치된 견해이다.

그 이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그리고 자유무역협정(FTA) 체제로의 이행은 사실상 이윤율 저하로 생겨난 손실을 자국의 약자나 제3세계 민중들에게 떠넘기는 과정이었다. 산업 자본주의가 사실상 돈 놓고 돈 먹기에 다름 아닌 금융 자본주의로 이행한 것도, 물건을 만들어 파는 시스템으로는 더 이상 큰 이윤이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카지노 자본주의'는 2008년 크게 한 번 요동쳤지만, 천문학적인 구제 금융으로 틀어막음으로써 몰락을 유예한 것이라는 게 독립적인 경제학자들의 견해다. 사실상 앞으로의 세계 경제는 '공황' 상태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전망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아이들의 교육을 걱정하는 부모들은 '이제 웬만하면 비정규직, 아니면 청년 실업'이라는 사실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된다면, 초·중·고 12년에 대학 4년, 도합 16년을 온통 지옥 같은 경쟁으로 내모는 이 경쟁 교육 자체가 의미가 없어진다. 비정규직, 실업자가 되기 위해 16년 내내 이 미친 경쟁을 해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 IMF 구제 금융 시절 유년기를 보낸 아이들은 그 예민한 후각으로 학교라는 공간의 무의미함을 선구적으로 자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한 경쟁에 뛰어든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자라난 세대들이, 그 중에서도 일찌감치 경쟁의 대열에서 가망 없다고 스스로 판단한 아이들이 일탈과 폭력으로써 이 체제를 들이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껍데기뿐인 학교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어쨌든 국가는 학교에 교육비를 내려 보낼 것이고, 교사들은 월급을 받아야 하고, 학부모는 아이를 맡겨야 하며, 아이들은 졸업장은 그래도 받아두어야 하니깐.

새로운 페다고지를 위하여

학교는 영토를 다 잃어버린 제왕이 되었다. 이 현실에서 새로운 변화를 기약하기에는 삼박자가 다 부족하다. 이 현실이 완전히 표면화되기 전까지 학부모는 학교에 대한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지 못할 것이다. 달리 다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부응하여 교육 관료들은 할 수 있는 한은 지금껏 해왔듯이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그것으로 서로 경쟁시키는데 혈안이 되어 있을 것이다.

교사 집단은 이미 깊숙이 계층화되어 있다. 그저, 별 탈 없이 오늘 하루가, 한 학기가, 1년이 마무리되기만을 바라는 보신주의가 득세할 가능성은 더욱 높다. 먹고 살기가 강파르게 변해가면 작은 기득권이나마 쥐고 있는 세력은 물질적 이해관계 외에는 철저하게 무심해 진다. 교원 노동조합은 이런 현실을 추종하는 경향이 짙어질 것이다. 혹시 모른다. 경제 상황이 더욱 나빠져서 감봉이나 감원을 해야 할 때, 그때는 아마도 폭발적으로 분출할 것이다. 교사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아이들은 삶의 기술도 가르쳐 주지 않고, 성장의 경험도 제공해주지 않으며, 노동 시장으로의 진입도 보장해주지 않는, 오직 자신들을 통제하려고만 하는 학교를 향한 공격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교육 불가능은 이제 대세가 될 것이다.

물론 이것은 보수적 흐름을 추동할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범죄와 약물 중독 등으로 공교육 학교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을 때, 보수적인 기득권층을 중심으로 자신들 몫으로 배당된 교육비로 종교계 사립학교나 홈스쿨링으로 탈출하는 흐름이 생겨났듯이,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러했듯 학교 붕괴에 대한 책임을 교원 노동조합(사실상 무기력했음에도) 같은 진보적 교육 운동 진영이나 개혁적인 교육 정책 탓으로 돌리려는 흐름도 가속화될 것이다. 최근 체벌 금지와 학생 인권 조례 제정을 둘러싼 보수 세력의 신경증을 보면 이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내 생각은 이러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지난 시절 진행되어온 한국 사회의 변화와 교육 주체들의 무력한 대응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므로 일단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유이다. 어설픈 희망의 언사, 개선의 노력들, '그래도 학교가 희망이다'는 식의 언술은 그것의 현실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떠나 이 교육 불가능을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키는 것에 기여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문제를 일으킨 그 마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재개념화해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학교란 무엇인가',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새롭게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학교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를 아마도 '어른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으로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 불행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여담이지만, 한동안 교육방송(EBS)의 특별 기획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시리즈가 꽤 화제를 모았다. 나의 시청 소감으로 판단하건대, 그 시리즈를 관통하는 '학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주체는 우리 사회의 중산층 학부모가 분명해 보였다.)

'성찰'이 밥 먹여주느냐고,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성찰은 학교의 존재 의미 자체를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천금처럼 소중하다.

간단하게 나의 전망을 밝히면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학교가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어가는 상황은 이런 현실이라도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이나, 학교를 통해 무언가 물질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에게는 확실히 재앙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와 한국 교육의 현실 사이에 나 있는 절망적인 어긋남으로 괴로웠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나는 12세기 가톨릭 세계의 갱신을 꿈꾸었던 베네딕트 성인의 모토였던 '기도'와 '노동'이라는 표현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그것은 종교적 언술이지만, 이것을 오늘날의 교육적 맥락으로 번역하면 '인문학'과 '농업'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게 되는 현실에서 아무런 현실적 쓸모가 없는 것들의 교육적 가치를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학교는 현실적 쓸모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해왔기 때문에 지금 사실상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가치는 학교 교육의 폐허 위에서 이야기될 것이다.

문(文)은 인간을 언어적 존재로써 완성시켜주며, 그 너머의 세계로 초대해 준다. 사(史)는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르쳐 줌으로써 우리의 삶에 역사적 좌표를 부여해 준다. 철(哲)은 인생의 의미를 질문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진정한 지혜는 결국 성찰의 힘에서 오는 것이다. 문·사·철의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어떤 물적 조건과 상황에 놓이건, 대세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전환을 위한 사유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야 할 것은 '농업'의 가치이다. 여기서 농업은 실제의 농업이면서 하나의 은유이기도 하다. 당연하게도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불과 10년 안으로 농사를 지을 세대는 완전히 끊어지게 된다. 전체 먹을거리의 4분의 3을 수입해서 먹는 우리나라는 심각한 식량 재앙 앞에 놓여 있다. 농업은 세계 자본주의의 공황적 상황에서 그 가치가 새롭게 조명될 수밖에 없을, 인간 생존의 물적 기초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농업은 아이들의 삶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몸의 교육, 실용, 실과, 노작교육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것이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야겠다. 오늘날 학교 교육이 맞닥뜨린 교육 불가능을 솔직하게 인정하자. 그리고 전환을 위한 사유를 시작하자. '기도와 노동', 그리고 그것의 현대적 번역인 '인문학과 농업'을 고민하자.

나도, 우리들 모두도 폐허 위에 있으면서 또한 출발선에 서 있다.

이 글은 일부 보완돼 오는 3월에 발간되는 교육 전문지 <오늘의 교육> 창간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오늘의 교육>은 월간 <우리교육>에서 퇴사한 기자들과 현장 교사, 교육학 연구자, 교육단체 활동가들이 조직한 협동조합인 '교육 공동체 벗'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잡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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