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현장 1 - "안전 교육 받은 적이 있습니까?" = "아뇨." - "이황화탄소가 어떤 물질인지 아십니까? 그 물질에 대해 위험 교육을 받았습니까?" = "전혀 모릅니다. 입사 20년 동안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그러면 어떤 교육을 받았나요?" = "1년에 한 차례 불조심 교육을 받습니다. - "하루 몇 시간 일하십니까?" - "하루 12시간 2교대로 일했습니다." |
산업 현장 2 - "안전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 "아뇨." - "석면이 어떤 물질인지 아십니까? 그 물질에 대해 위험 교육을 받았습니까?" = "전혀 모릅니다. 입사 20년간 단 한 번도 석면의 위해성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 "그러면 석면 먼지를 제대로 걸러낼 수 있는 특수 방진 마스크를 지급받았나요?" = "그냥 일반 면으로 된 거즈 마스크를 지급받았습니다." - "하루 몇 시간 일했습니까?" = "하루 12시간 2교대로 일했습니다." |
산업 현장 3 - "다루는 물질에 대해 안전 교육을 받았나요?" = "한 달에 한 번 안전 교육이라고 해서 받았는데 안전 교육이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기계나 장비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 "다루는 물질이나 가스에 대해서는 유해성 교육을 하지 않았습니까?" = " 입사 10여 년이 되도록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 "보호 장비는 뭐가 있었어요?" = "면장갑을 줬어요. 하지만 다들 잘 끼진 않았어요. 칩을 만지면 장갑이 금세 더러워졌고, 또 장갑을 끼고 있으면 칩이 작아서 끼울 때 속도가 잘 나지 않아서요." - "고글이나 마스크는요?" = "없었어요." - "하루 몇 시간 일했습니까?" = "수습 기간이 끝나자마자 2교대로 하루 12시간씩 일했습니다." |
어찌 이리도 똑같을까.
산업 현장 1은 대한민국 최대의 직업병(이황화탄소 중독) 참사를 빚었던 원진레이온에서 벌어졌던 모습이다. 산업 현장 2는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성 암 발생지이며 국내 최대의 석면 직업병 환자를 양산한 제일화학(지금의 제일E&S) 노동자들의 이야기이다. 산업 현장 3은 최근 우리 사회를 부끄럽게 만드는,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장을 지닌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실태이다.
노동자들의 비극이 벌어졌거나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이들 세 노동 현장은 위에서 지적한 것 외에도 많은 점이 너무나 똑 닮았다.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위험 물질에 대해 전혀 몰랐다. 회사는 이를 알았지만 숨기는데 급급했다. 노동자들의 직업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들을 소홀히 했다. 심지어는 노동자 건강 보호에 필수적이고 가장 중요한, 제대로 된 보호 마스크조차 지급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작업 현장에서 쓰러져가면서도 자신의 질병이 공장에서 들이마신 독가스나 먼지, 유독 물질 때문에 생긴 줄 꿈에도 몰랐다. 무지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회사가 아예 이와 관련한 교육을 하지 않았거나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는 이황화탄소라는 독가스에 노출돼 몸이 마비되고, 성불구가 되고, 언어 장애가 와 말도 못하게 됐는데도 단지 재수 없게도 젊어서 중풍(뇌졸중)이 온 것으로만 알았다. 제일화학 노동자들은 호흡이 가쁘고 기침이 나는 증상이 결핵인줄로만 알았다. 삼성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은 설마 대한민국 최고, 세계 일류 기업에서 그렇게 유해한 물질을 직원들이 다루게끔 했겠는가 여겨 직업병 의심을 하지 않았다.
▲ 우리나라 최대의 직업병 사건을 일으킨 원진레이온의 방사과에서 간단한 마스크만 쓴채 노동자들이 작업하고 있는 모습. ⓒ원진산업재해자협회 |
이들 세 회사에서 다룬 물질들은 다량으로 흡입했을 경우 일부 급성 독성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대부분 장기간 꾸준히 들이마셔 짧게는 1년 길게는 50년 뒤에 문제가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또 막연히 몸에 좋지 않으려니 하고만 여겼지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치명적인 질병이 생기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직장을 잃을까봐 몸이 아파도 내색을 하지 않아 병은 깊어만 갔다.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된 뒤에야 퇴사를 했다.
회사를 위해 온 몸을 바쳤던 이들이 회사로부터 받은 것은 위로와 보상이 아니라 철저한 외면이었다. 1988년 원진레이온에서 초기 직업병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600만 원을 위로금으로 줄 테니 앞으로 민형사상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는 회유를 당했다. 필자의 설득으로 이들은 위로금을 받기 직전 이를 포기하고 끈질긴 투쟁에 나섰다. 그 결과 위로금보다 더 많은 보상금을 당당히 받아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산재·직업병 투쟁이었으며 사실상 노동자의 완전 승리였다.
제일화학에서는 노동자 가운데 1993년 처음으로 흉막악성중피종이라는 직업병 판정을 받은 사례가 나왔지만 이는 다른 회사 동료와 퇴직 노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07년 국내 처음으로 석면 피해 소송이 제일화학 퇴직 노동자와 회사 사이에 벌어져 노동자의 완전 승리로 판결이 났다.
▲ 1970년대 부산 제일화학 석면 방직 공장에서 일하던 방직공들이 바닥에 석면 먼지가 쌓인 작업 현장에서 기념 촬영을 한 모습. ⓒ제일화학석면피해노동자및가족협회 |
이후 봇물 터지듯이 산재 신청이 이어졌다. 하지만 회사는 이들이 회사에 다닌 것 자체를 부인했다. 어렵게 인우 보증을 내세워 산재 신청을 했다. 상당수가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이미 숨진 노동자의 경우 제대로 된 질병 기록이 없어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제일화학석면피해노동자및가족협회' 박영구 회장의 부인 하경생 씨는 1995년 사실상 석면폐로 숨졌지만 아직 보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삼성전자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회사 관계자들이 숨진 노동자들의 유가족들을 찾아가 산재 신청 취소를 전제로 합의를 사실상 종용한 사실이 최근 한국방송(KBS) <추적 60분>을 통해 드러났다. 최초로 밝혀진 삼성전자 피해 노동자 故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의 집에 2010년 12월 삼성 측 관계자가 집에 찾아왔다.
황 씨가 공개한 녹취에서 삼성 관계자는 "예전에는 (황유미 씨의 질병이) 직업병이라 생각하지 못했다"며 "(예전에 황 씨에게) 약속했던 금액을 드리려 했지만 산재를 신청해 약속을 못 지키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삼성은 돈보다는 황 씨의 죽음이 직업병의 결과라는 사실이 몰고 올 파장에 모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직업병이 세상에 알려진 것도 기존 제도권 언론사나 주류 언론사가 아니라 신생 신문이나 자그마한 매체에서 시작한 것도 공통점이 있다. 원진레이온 사건은 1988년 갓 창간한 <한겨레신문>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다른 제도권 언론사들은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고서야 원진레이온 참사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황유미 씨 사건도 황상기 씨가 KBS 등 주류 언론사를 전전했으나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월간 <말>과 <수원시민신문> 등을 통해 꺼져가던 촛불을 가까스로 살릴 수 있었다.
많은 직업병이나 공해병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처음 드러난 피해자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1988년 원진레이온 사건은 3~4명의 피해자(서용선, 정근복, 강희수 씨 등)에서 시작했지만 불과 몇 년 사이에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려 1천명에 가까운 환자를 만들어냈다. 제일화학도 1993년 전복남 씨, 2007년 원점순 씨 등 몇 명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무려 100명에 가까운 노동자들이 석면 질환에 걸려 숨졌거나 피해 보상을 받기 위해 집단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2007년 황유미 씨의 죽음에서 출발해 3년이 지난 지금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유해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사람에게는 유해 수당을 지급토록 법에 규정돼 있다. 또 이런 부서에서는 하루에 6시간 이상 근무를 못하게끔 하고 있다. 하지만 1988년 당시 정부 기업이었던 원진레이온에서는 이를 전혀 지키지 않았다. 사건이 터지고 난 뒤 회사가 떼먹었던 유해 수당 등을 뒤늦게 노동자들에게 지급했다. 작업 환경 측정을 맡았던 유명 대학교의 산업의학교실에서는 원진 노동자들의 열악한 작업 환경과 직업병 발생을 학계나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제일화학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삼성전자의 경우 누가(어떤 기관이) 언제 어떻게 어떤 유해 물질에 대해 작업 환경 측정을 해왔는지, 유해 물질을 다루는 부서 직원들에 대해 몇 시간씩 일을 시켰는지, 정부가 제대로 감독했는지 등에 대한 아무런 발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유해 물질을 많이 다루는 반도체 공장의 특성상 직업병 피해자가 나올 수 있는데도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삼성이라는, 정부뿐만 아니라 입법부와 사법부, 그리고 흔히 제4부로 일컫는 언론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대한 기업 권력 앞에 노동 당국이 찍소리도 못해왔던 것은 아닐까.
원진레이온 사건은 당시 노동단체, 환경단체는 물론이고 인도주의실천을위한의사협의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등 의료 운동 단체까지 가세하고 언론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어용노조를 민주노조로 바꾸고 그리고 무엇보다 피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나서서 처절한 투쟁을 벌였다. 그 결과 원진 직업병 피해자를 위한 대규모 병원을 그 성과로 건립하는 등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열매를 맺었다. 제일화학의 경우도 피해 노동자들이 뉴스를 보고 또 알음알음으로 알고 모여 2009년부터 집단 피해 소송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 피해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도 이들처럼 처음에는 정말 외롭고 힘들었다. 이들의 곁에 몇몇 노동단체와 양심적인 의사 등이 함께했다. '반올림'이란 줄임말로 사람들에게 알려진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각 분야의 양심적인 유명인사 500여 명이 직업병 인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벌였다. 삼성이 세계적으로 워낙 잘 알려진 탓인지 외국에서도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프레시안>과 몇몇 대안 언론사, 그리고 방송의 심층 프로그램을 통해 최근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실상이 많은 국민에게 각인되기 시작하는 등 언론 환경도 점차 좋아지고 있다.
세 회사 노동자 가운데 선배 격이고 특히 많은 경험과 성과를 지닌 옛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삼성전자 피해 노동자들과 동변상련은 물론이고 투쟁을 함께한다면 이들에게 분명 큰 힘이 될 것이다. 원진레이온, 최초의 직업성 암 환자를 낸 제일화학 피해 노동자, 그리고 삼성반도체 노동자들과 이들을 지원했거나 함께하고 있는 노동단체, 의료인단체, 인권 단체 등이 한 자리에 모여 대동제를 벌이면 참 좋겠다. 정말 좋겠다. 사례 발표도 하고 세미나나 토론회도 하고, 유사한 일들을 겪은 일본, 미국 등의 피해자나 산업보건 전문가들도 초청해서 말이다.
▲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지난 2010년 3월 31일 스물셋의 나이에 숨을 거든 故 박지연 씨. ⓒ프레시안(이상엽) |
회사 경영진은 자신의 회사에서 다루는 물질의 위험성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원진레이온에서도 그랬고 제일화학에서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직업병 환자를 양산한 유해 부서에 최고경영진이 찾아와 오래 머물기는커녕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회사에서 가장 위험하고 열악한 작업장의 환경을 회사 최고 경영진이 늘 일하는 곳으로 생각하고 꾸며주었더라면 이들 세 회사에서 벌어졌던, 벌어지고 있는 비극이 탄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유미 씨 등이 일했던 삼성전자 유해 부서에서 이건희 회장이 하루에도 몇 시간씩 1년 내내 노동자와 함께 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나중에 문제가 된 뒤 이 회장에게 "회사에서 다루는 물질이 무슨 물질인지, 유해한지를 전혀 몰랐다"고 간부들이 발뺌할까.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장이며 국내 최고, 세계 일류를 내세우는 삼성전자에서 이런 식의 발뺌을 한다는 것은 삼성전자를 두 번 죽이는 일이다.
대한민국에서 삼성전자가 죽는 것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삼성전자가 삼류 기업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고 박수를 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국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면 사랑스런 딸의 죽음에 한이 맺힌 황상기 씨의 다음과 같은 핏빛 물음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거기에 어떤 유독물질이 있었는지 몰랐을까요? 삼성이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살인이에요, 살인."
살인이라는 말이 귀에 거슬린다면 그냥 직업병을 인정하는 것으로 대신하면 어떨까. 삼성은 외국 전문가에게 삼성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피해 사건을 맡겨 늦어도 오는 7월께는 그 결과를 발표한다고 한다. 삼성이 지금의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은 그 결과를 직업병으로 발표하는 것밖에 없다. 그리고 처절한 반성과 사죄를 통해 피해 노동자와 그 가족, 나아가 국민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외길 수순이다.
질병의 원인을 규명하는 학문인 역학에서는 인과관계를 확정지을 때 고려하는 요소들이 여럿 있다. 양-반응관계(dose-response relationship)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병원체나 유해물질에 노출되는 양에 비례해 질병의 발생이 많다면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석면에 노출되는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석면 암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진다.
또 생물학적으로 그럴듯해야 한다(biological plausability)는 것도 한 요소이다. 노동자가 발암물질을 전혀 다루지 않았는데 암이 생겼다면 이를 직업성 암으로 보지 않는다. 반대로 일반 집단에서는 그 질병의 발생률이 0.1%였는데 어느 공장 노동자들의 그 질병 발생률이 이보다 10배나 높은 1%였다고 하자. 그리고 노동자들이 이 질병 발생과 관련한 물질을 다루었거나 다룬 것으로 의심된다고 하자. '돌팔이' 역학자나 '회사에 매수된' 역학자가 아니라면 분명 직업병으로 판정할 것이다. 삼성전자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사건이 외통수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결의 열쇠는 '직업병'이 아니라 직업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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