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이하여 바쁘실 터인데도 불구하고 졸고 '근대 의료의 풍경'에 대해 공동으로 비평의 글을 써 주신 여인석, 박윤재 교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두 분의 글은 저뿐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는 동학들에게 여러 모로 큰 도움이 될 것이어서 널리 읽히기를 바랍니다. (☞관련 기사 : 서울대 vs 연세대 '역사 전쟁' 시작되나?)
먼저 두 교수께서 '근대 의료의 풍경'의 집필 배경과 동기에 대해 언급하셨으니 거기에 대해 답변하는 것이 순서겠지요. <프레시안>에서는 벌써 몇 해 전부터 제게 글 연재를 요청했습니다. 저 또한 5년 남짓 전 한국 사회를 온통 뒤흔들었던 연구 윤리와 관련된 사건에서 <프레시안>이 보였던 언론 매체로서 올바른 자세에 대해 마음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요청대로 글을 연재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글의 내용은 5년 전의 그 사건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는 것이거나 의학 역사에 관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게 제 관심사니까요.
사실 '근대 의료의 풍경' 제1편의 초벌 원고는 진작에 준비되어 있었고 그 골격은 몇 차례의 학술 토론회에서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프레시안>에 연재하는 동안 독자들의 이런저런 요청에 응답하고 저 스스로도 비교적 긴 호흡으로 내용을 추가하다 보니 글의 분량이 두 배 남짓 늘어나긴 했습니다. 초벌 원고를 준비하면서는 <프레시안>과 같은 대중 매체에 게재할 생각은 하지 않고, 곧바로 책으로 출간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프레시안>에 연재하기로 방침을 바꾼 계기는 텔레비전 드라마 <제중원>의 방영이었습니다.
흔히 지적하듯이 "역사 드라마"와 "역사 소설"은 역사에서 소재를 취하지만 역사적 사실보다는 허구적 구성과 상상력을 추구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그에 따라 평가도 대체로 사실의 정확성보다는 작품성과 예술성을 위주로 합니다. 하지만 드라마 <제중원>은 방영 시작 전부터 종영 때까지 "철저한 역사적 고증"과 고증·자문한 의사학 교수의 이름을 내세운 점에서 다른 드라마들과 달랐고 또 그 점에서 제 관심을 끌었습니다.
지난 해 초에 시작된 드라마 <제중원>을 보면서 저는 당혹스러웠습니다. "철저한 역사적 고증"의 의미를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전문적이거나 주변적인 몇 가지 사항이 역사적 사실과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제중원과 한국 근대 의학의 역사를 크게 왜곡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고증을 내세우지 않았더라면 "드라마니까" 하고 지나갔을지 모릅니다.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의 제작 과정을 모르기 때문에 어떻게 그런 일이 생겼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그러한 역사 왜곡에 대해 대중적인 방식의 대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단행본보다 대중과의 접촉면이 더 넓고 소통의 기회가 많다고 생각한 온라인 언론 매체인 <프레시안>에 '근대 의료의 풍경'을 연재하기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결정 과정에서 박형우, 박윤재 교수의 '의학사 산책' 연재가 참고가 되었을 수는 있겠지요.
'근대 의료의 풍경'의 연재를 시작하면서 저는 철저한 사료 비판과 충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글쓰기를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졸고에서 여러 차례 예를 보였듯이 한국 근대 의학 역사에 관한 기존의 글에서 그렇지 못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신수비의 용례에 관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들어 신수비가 월급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나아가 그것을 근거로 제중원의 성격과 운영 주체를 뒤바꾸는 식('근대 의료의 풍경' 제14회)입니다.
이렇게 제 스스로 정한 원칙을 지키려다 보니 대중 매체에 실리는 글로는 지나치게 길어지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연재를 시작하기 전에 <프레시안>의 담당자는 원고 마감 시간 지키기와 더불어 원고 분량을 되도록 짧게 해달라는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핵심 논지를 담은 본문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사료와 주석을 분리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지만 적절한 방식을 찾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근거 없이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단정적으로 기술한 것이 있으면 가차 없이 지적해 주십시오. 두 분뿐만 아니라 독자 여러분께도 부탁드립니다. 저는 제 오류를 지적받는 것보다 오류가 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것이 더 두렵기 때문입니다.
졸고의 두 번째 원칙은 소속과 출신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동안 한국 근대 의학 역사의 해석과 서술에 연구자의 소속과 출신이 작지 않게 작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주문 맞춤형 연구"까지도 생겨났습니다. 그러다보니 독자들도 필자들의 소속과 출신을 염두에 두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저는 역사가 선전의 도구가 아니라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 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고 30년 가까이 서울대 의대에 재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울대 의대나 서울대학교의 역사와 현재를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 관해서도 제가 원칙에 어긋난 경우가 있으면 서슴없이 지적해 주십시오.
두 분은 졸고의 "가장 큰 아쉬움"으로 가정과 추론이 많다고 지적하고 "역사가의 글에 가정과 추론의 표현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그 글쓰기가 사료가 말하지 않는 자기의 가정과 추론을 남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추정과 가정은 많은 경우 무리한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것이다' '~여겨진다' '~보인다' '~않을까?'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 근거가 확실하지 않거나 미흡한 경우에 '~것이다' '~여겨진다' '~보인다' '~않을까?'와 같은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했습니다. 한 가지 뚜렷한 사료나 근거가 있더라도 그것을 뒷받침하는 다른 사료가 없을 때 유보적인 표현을 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에 따라 근거에 대해 지나치게 까다롭다는 지적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저는 근거가 없거나 부족한 경우에 단정적인 표현을 하는 것이 더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한지요?
일반적인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고 구체적인 문제에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지금까지 제가 말한 내용을 검증하는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 1886년 제중원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재동에서 중구 명동 인근으로 이전했다. 사진은 이렇게 이전한 구리개 제중원. ⓒ프레시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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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 교수께서는 제 글의 구체적인 오류 또는 문제점으로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의 승계"와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의사 면허 부여"에 관한 부분 두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첫 번째 문제에 대해 두 분이 언급한 것을 논의의 편의를 위해 그대로 인용하겠습니다.
황 교수가 남이 하지 않은 독특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남이 하지 않았던 독특한 발상이 있다. 그는 제중원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경영권은 병원을 운영하는 권리, 소유권은 병원의 대지와 건물에 대한 권리이다.
그는 1894년 에비슨과 조선 정부의 계약을 통해 제중원의 경영권이 에비슨에게, 궁극적으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이관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사실은 1998년 연세대 의사학과 연구진에 의해 발굴되었고, 황 교수도 인용하고 있는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를 통해 재확인되었다. 공식 문서에 나타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 더 이상의 논란은 없을 것이다. 미 선교부로 이관된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 연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황 교수는 독특한 주장을 내세운다.
"제중원의 건물, 대지와 분리된 별도의 운영권이라는 것은 없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 제39회 제중원의 퇴장)
운영권이 건물과 대지의 소유권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만일 그렇다면, 전세나 월세를 들어 있는 모든 병·의원들의 운영권은 그 건물이나 대지의 소유권자에게도 있는 것인가? 그 병·의원들이 이사를 갈 경우 그 건물이나 대지의 소유권자들은 옮겨간 병·의원의 운영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황 교수의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두 분께서는 제가 "제중원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분리시키고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근거로 "제중원의 건물, 대지와 분리된 별도의 운영권이라는 것은 없었다"라는 제 글을 인용했습니다. 저는 혼란스럽습니다. 제 "독특한 발상" 또는 "독특한 주장"이 운영권(저는 영리 추구의 뉘앙스가 강한 경영권이라는 단어를 병원과 학교에는 가급적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과 소유권을 분리했다는 것인가요, 분리하지 않았다는 것인가요? 제 뜻은 제중원의 소유권은 대지와 건물뿐만 아니라 제중원이라는 기관에 대한 권리를 말하는 것이고, 운영권은 그 일부이거나 그것에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 글을 인용하려면 잘못 해석될 수 있는 부분만이 아니라 다음같이 바로 앞 부분도 함께 인용해야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제중원의 운영권은 1894년 9월 에비슨(사실상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게 이관되었다가 1905년 4월에 건물 및 대지와 함께 환수되었다. 일부에서는 환수된 것은 제중원의 "건물들과 대지"라고 주장하여, 제중원의 운영권과 법통은 여전히 에비슨에게 남아 있는 것처럼 호도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제중원의 건물, 대지와 분리된 별도의 운영권이라는 것은 없었다." (제39회)
자, 이제 "경영권은 병원을 운영하는 권리, 소유권은 병원의 대지와 건물에 대한 권리"라고 해석하고 그 두 가지를 분리한 사람이 누구인지 명백하지 않습니까?
다음으로 "전세나 월세를 들어 있는 모든 병·의원들의 운영권은 그 건물이나 대지의 소유권자에게도 있는 것인가?"라고 질문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황 교수의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이 또한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사실과 전혀 다른 질문을 하면서 대답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주장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조선 정부의 건물과 대지를 세를 내어 제중원을 설립하고 운영했다는 뜻이겠지요. 과연 사실이 그런가요? 제중원은 1885년 4월 조선 정부가 설립한 병원입니다. 그리고 9년 반 가까이 조선 정부가 운영을 하다(서양인 의사들은 1886년 말까지는 무료 봉사로, 그 이후에는 월급을 받으며 일했습니다) 1894년 9월에 운영권을 에비슨에게 이관했습니다. 제중원을 매각, 양도하거나 그 건물을 돈을 받고 세 준 것이 아니라 운영을 에비슨에게 맡긴 것입니다. 제중원의 탄생부터 소멸까지 조선 정부는 단지 건물 소유주가 아니라 제중원이라는 의료 기관의 주인이었습니다.
이 운영권 이관에 관한 문서가 외무대신 김윤식에게 보낸 미국 공사의 1894년 9월 7일자 공문과 거기에 대한 외무대신의 9월 26일자 답신입니다(제37회). 그리고 그 문서들에 "귀 정부는 언제든지 제중원을 환수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1년 전에 에비슨이나 대리인에게 통보하고 에비슨이 자기 집과 병원 건물의 수리에 실제로 사용한 비용을 지불해야 합니다"(미국 공사의 공문), "조선 정부가 언제라도 제중원의 환취(還取)를 요구하는 경우 그때까지 들어간 건축비와 수리비를 모두 지불할 것입니다"(외무대신의 공문)라고 환수 조건과 절차를 명기했습니다.
그리고 이 공문들에 언급된 대로 제중원은 1905년에 대한제국 정부로 반환되었으며, 그때 작성된 문서가 <제중원 반환에 관한 약정서>(1905년 4월 10일자)입니다(제39회). 이렇게 에비슨은 받았던 것을 돌려주었으며, 대한제국 정부는 주었던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이들 문서 어디에 제중원은 돌려주었지만 제중원의 운영권은 에비슨 또는 미국 선교부에 존속되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고 해석할 부분이 있습니까? 그리고 이들 문서가 전세나 월세 계약서인가요? 이렇게 한국과 미국 양측의 공식 문서에 나타난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의 논란은 없을 것입니다.
사실 여기까지 언급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이로써 제중원과 에비슨 또는 미국 선교부와의 관계가 일단락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중원을 대한제국 정부가 더 이상 병원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으니까요(제39회). 그런데도 제가 "제중원 찬성금"에 대해 언급한 것은 일부에서 그것을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한제국 정부는 세브란스병원에 1906년 5월 "제중원 찬성금"이라는 명목으로 3000환을 지원했습니다. 두 분께서는 그것을 근거로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제중원"이라는 명칭의 용례에 대해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했고, 제중원 찬성금 지급에 관련된 문서인 "청의서"의 내용을 분석해서 제중원 찬성금 지급이 제중원이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을 논증했습니다(제39회).
특히 청의서는 제 "입론에 불리"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이 사실에 너무 어긋나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임을 거듭 말씀드립니다. 역사학자라면 어떤 자료라도 엄밀한 사료 비판 없이 사실로 단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닌가요? 두 분께서는 제중원 찬성금에 관한 청의서가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묻고 싶습니다.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의사 면허 부여"에 대해서 길게 언급하셨지만 제가 답변해야 할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의견의 차이가 크지 않으니까요. 두 분의 지적과 달리 저는 에비슨과 한국인 제자들의 노력과 성과를 무시하거나 폄하하지 않았습니다. 제 글을 제 뜻과 달리 해석하셨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에비슨과 한국인 제자들의 노력과 성과를 무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의학 역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는 "에비슨의 '친일성'에만 주목"하지 않습니다. 에비슨이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 청탁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을 따름입니다. 지석영이 이토 히로부미의 추도사를 낭독한 것에 대한 비판(제2회)이 지석영의 친일성에만 주목한 때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근대 의료의 풍경"에서 한국 근대 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많은 한국인의 친일 행각을 보기에 따라서는 지나치다 할 정도로 비판했습니다. 공적과 더불어 과오도 드러내야만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분께서는 에비슨의 자서전을 에비슨이 친일적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로 들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료들보다 '자서전'에는 더욱 엄정한 비판적 사료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에비슨의 생애가 친일로만 점철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1908년 6월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의술개업인허장"이 발급된 것은 역사적 성찰의 대상이지 찬양할 일이 아니라는 점(제85회)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일제에 의해 대한의원이 설립된 일(제53회)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두 분께서는 제가 "자신의 염원을 과거의 인물에게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그런 요구는 부당하고 역사가의 몫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에비슨이 진정으로 한국인 청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고 그들을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의학교 규칙>에 정해진 대로 의학교 설립 신청을 했어야 할 것이다"(제84회)라는 제 글에 대한 비판입니다. 저는 이 지적이 무슨 뜻인지 아리송합니다. 특히 '염원'이라는 어휘는 마치 제가 이루어질 수 없는 허황된 것을 바랐다는 듯 보여 당황스럽기도 합니다.
오늘날 누군가에게 독자적으로 의학을 가르쳐서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히 관련 법령에 따라 의과대학 설립 신청을 하고 인가를 받는 일부터 해야겠지요. 100여 년 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비슨은 무엇보다도 1899년에 제정된 <의학교 규칙>(학부령)의 사립 의학교 설립 규정("공사립 의학교는 지방관과 관찰사를 경(經)하야 학부대신의 인가를 승(承)함이라")에 따라(제65회) 설립 신청을 했어야 했겠지요. 그랬더라면 구차하게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가는 일도 없었겠지요.
이런 언급이 어떻게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실현되지 않은 염원을 갈 수 없는 과거에 요구하"는 것인가요? 일부에서는 1908년 <사립학교령>이 제정되기 전에는 사립 의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이 없어서 에비슨이 의학교 설립 신청을 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두 분께서는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저로써는 두 분 교수의 지적과 비판에 대해 답변을 하느라고 했습니다만 어떤지요? 또 두 분이 지난 번 글에 언급하지 않은 점이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프레시안> 지면이나 학회 모임, 또는 다른 경로를 통해 많은 지적과 비판을 부탁드립니다. 한국 근대의학의 역사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이제야 출발선을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과 저의 글이 이러한 논의에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독자들께도 이 문제에 대한 많은 관심을 부탁드리면서, 비록 암울한 시절이지만 즐겁게 설 명절 보내시기를 기원합니다. (☞'근대 의료의 풍경' 전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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