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서울대 vs 연세대 '역사 전쟁' 시작되나?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서울대 vs 연세대 '역사 전쟁' 시작되나?

[기고] 황상익 교수의 '근대 의료의 풍경'을 읽고

황상익 교수가 작년 3월부터 <프레시안>에 연재한 '근대 의료의 풍경' 제1편이 끝났다. 황 교수는 금년 봄부터 일제시기를 다룰 제2편의 연재를 예고하고 있다.

사실 이 연재는 그보다 이전에 연재된 박형우·박윤재의 '의학사 산책'의 연장선상에서, 혹은 이를 의식하여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황 교수의 연재는 동일한 시기, 동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나름대로 차별성을 보이려고 애쓴 흔적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중 하나는 각 글 간의 편차가 크다는 것이고, 또 많은 경우 불필요하다고 판단되는 정보들을 지나치게 싣고 있어 글이 늘어진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아쉬움은 황 교수의 글에 가정과 추론이 많다는 것이다. 그는 글에서 '~것이다' '~여겨진다' '~보인다' '~않을까?' 등의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겸손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의 글에 가정과 추론의 표현이 많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그 글쓰기가 사료가 말하지 않는 자기의 가정과 추론을 남발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추정과 가정은 많은 경우 무리한 주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필자들이 재직하고 있는 연세대학교의 기원을 이루는 제중원, 세브란스병원에 대한 기술은 위에서 지적한 지나친 추론과 가정, 그 결과인 무리한 주장이 두드러져 보인다.

황 교수는 이전에 서울대학교 일부 교수들에 제기된 주장, 즉 제중원과 광제원, 서울대병원의 연계성을 부정하고 있다.

"제중원(1885년~1905년)과 광제원(1899년~1907년)은 별개의 국립병원이었을 뿐이다. 또 이후의 국립병원과 제중원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승계와 연결을 말하기 어렵다."

이런 주장은 서울대와 연세대 사이의 소위 '뿌리 논쟁'을 반복하지 않으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읽힌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또 다른 '뿌리 논쟁'을 촉발시키고 있다. 제중원의 세브란스병원, 연세대 승계를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905년 "제중원을 대한제국 정부가 더 이상 병원으로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국립병원 제중원은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고 주장하였다.([근대 의료의 풍경·39] 제중원의 퇴장) 제중원은 서울대, 연세대 어디에도 계승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서울대의 일부 교수들에 의해 제기되는 제중원의 서울대, 연세대 동시 계승 주장조차 거부하는 독특한 주장이다.

황 교수가 남이 하지 않은 독특한 주장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남이 하지 않았던 독특한 발상이 있다. 그는 제중원의 경영권과 소유권을 분리시키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경영권은 병원을 운영하는 권리, 소유권은 병원의 대지와 건물에 대한 권리이다.

그는 1894년 에비슨과 조선 정부의 계약을 통해 제중원의 경영권이 에비슨에게, 궁극적으로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이관되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 사실은 1998년 연세대 의사학과 연구진에 의해 발굴되었고, 황 교수도 인용하고 있는 조선 정부의 공식 문서를 통해 재확인되었다. 공식 문서에 나타난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면 더 이상의 논란은 없을 것이다. 미 선교부로 이관된 제중원은 세브란스병원, 연세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황 교수는 독특한 주장을 내세운다.

"제중원의 건물, 대지와 분리된 별도의 운영권이라는 것은 없었다." ([근대 의료의 풍경·39] 제중원의 퇴장)

운영권이 건물과 대지의 소유권과 직결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 주장의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만일 그렇다면, 전세나 월세를 들어 있는 모든 병·의원들의 운영권은 그 건물이나 대지의 소유권자에게도 있는 것인가? 그 병·의원들이 이사를 갈 경우 그 건물이나 대지의 소유권자들은 옮겨간 병·의원의 운영에 간섭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황 교수의 주장은 무리한 주장이 될 수밖에 없다.

나아가 황 교수는 제중원이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자신의 입론에 불리한 사료를 부정한다. 1906년 대한제국 정부는 세브란스병원으로 이름이 바뀐 제중원에 '제중원 찬성금(贊成金)'이라는 명목으로 3000환(圜)을 지불하기로 결정하였다. 황 교수에 따르면 사라진 제중원에 조선 정부가 찬성금을 지불했다는 이 당혹스러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황 교수는 사료 자체를 부정한다. 제중원 찬성금 지불을 결정한 문서가 "사실 관계가 완전히 잘못된 정부 문서(이기에) (…) 제중원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에 사용할 만한 사료로서의 가치는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료의 가치를 아예 부정해버리는 모습은 겸손한 역사가의 태도가 아니다. 그가 추론과 가정을 전개할 때 보였던 겸손함은 자신에게 불리한 사료를 해석할 때 정작 필요한 것이다.

▲ 에비슨이 한국인 조수 박서양의 도움을 받아서 수술하는 모습. 이 수술 장면이 담긴 유리건판 필름은 등록문화제 제448호로 등록되었다. ⓒ동은의학박물관

황 교수는 역사적 사실인 제중원, 세브란스병원, 연세대 계승을 부정하는데서 나아가 의료 선교사들에 의해 이루어진 의학 교육의 성과마저 부정하고자 한다. 그가 문제로 삼은 사건은 1908년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최초의 의사 면허 부여이다. 그는 이 면허 부여가 "이토 히로부미의 명령에 따른 초법률적 또는 법률외적 조치"였으며, "한국 정부와 한국인들이 의료 부문에서 거둔 성과를 짓밟아 한국 침략과 지배의 구실을 마련"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하였다.([근대 의료의 풍경·85] 의사 면허 미스터리) 에비슨을 비롯한 서양 의료 선교사와 유대를 강화하고, 대한제국이 이룬 (관립) 의학 교육의 의미를 부정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립)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일부러 1~7번이라는 최초의 의사 면허를 부여했다는 주장이다.

에비슨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일종의 '청탁'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황 교수도 인정하듯이 "당시 반식민지 한국에서 법률적, 행정적으로 풀기 어려운 이러한 문제를 대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토 히로부미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근대 의료의 풍경·84]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슬프지만 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현실에만 주목한다면 사실의 다른 측면을 간과할 수 있다.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 대한 최초의 의사 면허 부여에는 에비슨이 "제중원의 운영권을 이관 받은 뒤에 한국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의학을 가르"친 결과에 대한 보상도 있었다는 점 역시 놓쳐서는 안 된다. 에비슨의 제자들은 길게는 10년 넘게 제중원, 세브란스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 한국인 제자들의 노력과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황 교수 스스로의 주장과도 배치된다.

황 교수는 에비슨이 (관립)의학교의 의미를 무시함으로써 "의학 교육 분야에서의 한국인들의 노력과 성과를 완전히 깎아내"렸다고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황 교수의 주장 역시 1893년 내한 이후, 구체적으로는 1900년 안식년 이후 "의학 교육 분야에서의 (에비슨에 의해 추동된) 한국인들의 노력과 성과를 완전히 깎아내"리는 것이다.([근대 의료의 풍경·84]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황 교수는 자신의 염원을 과거의 인물에게 요구하기도 하였다. 세브란스의 의학 교육을 주도한 "에비슨이 진정으로 한국인 청년들에게 의학을 가르치고 그들을 의사로 양성할 뜻이 있었다면, 무엇보다도 <의학교 규칙>에 정해진 대로 의학교 설립 신청을 했어야 할 것이다."([근대 의료의 풍경·84]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하지만 이런 요구는 부당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실현되지 않은 염원을 갈 수 없는 과거에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는 과거의 사실을 합리적으로 해석할 뿐이다. 요구는 역사가의 몫이 아니다.

나아가 필자들 역시 추론을 해본다면, 만일 대한제국이 의료 분야에서 체계적인 근대화를 주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면, 에비슨이 대한제국의 고종이 아닌 통감부의 이토 히로부미를 찾아갔을까? 에비슨이 이토를 만나기 이전부터 졸업생들의 안정적인 활동을 위해 "학위를 정부가 인정하도록 노력해 왔다"는 점은 황 교수도 인정한 바이다.([근대 의료의 풍경·84] 세브란스병원 의학교) 면허 부여는 그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주어진 것이다.

만일 에비슨의 '친일성'에만 주목한다면,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 책이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돼야 한다는 것을 서방 국가들이 아는데 도움이 돼 한국인들이 세계에 다시 한 번 이바지할 수 있게"(<올리버 R. 에비슨이 지켜본 근대 한국 42년>(하·청년의사 펴냄), 16쪽) 되기를 바랐던 에비슨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황 교수의 주장은 세브란스의학교 졸업생들에게 주어진 최초 의사 면허 부여의 의미를 일면적으로만 파악한 데서 나온 결과이다.

황 교수는 '근대 의료의 풍경'을 연재하면서 나름대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입장에서 한국 근대 의학사를 서술하고자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들이 읽은 황 교수의 글, 특히 제중원, 세브란스병원과 관련된 글은 공정하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그의 글에는 제중원과 세브란스병원, 연세대 사이의 연계를 무리하게 단절시키려는 의도, 서양 의료 선교사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한국인 의료 인력 양성의 의미를 폄하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황 교수의 의도가 어디서 연유했는지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의도가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황 교수가 한 말, "근대 의료를 도입하고 소화하여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 나와 너, 우리와 너희, 한국인과 외국인을 구별하고 차별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근대 의료의 풍경·1] 3·1 운동 91돌을 맞으며)와 배치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