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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불안族', 폭탄주·룸살롱 대신할 특효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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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불안族', 폭탄주·룸살롱 대신할 특효약은…

[우석훈-김태형 대담] 못 살겠다! '불안 증폭 사회'!

지난 연말 많은 직장인이 송년회 기피 대상 1위로 '폭탄주를 돌리는 선배', '술버릇이 나쁜 동료' 등을 꼽았다. 그러나 그들이 진심으로 기피하고 싶어 하는 인물은 <불안 증폭 사회>(위즈덤하우스 펴냄)를 쓴 심리학자 김태형 같은 이가 아닐까?

"너희들, 지금 행복하냐?"

그는 <불안 증폭 사회> 서문에서 이런 질문으로 대학 동창회 자리를 썰렁하게 만든 일화를 전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 아래 현실을 잊기 위해 달리는 술자리나 명함을 돌리느라 정작 상대방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하는 동창회에서 그는 자꾸 현실을 불러내고 사람을 직시한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는 "대부분의 한국인이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 이를 치료하려면 먼저 병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많은 이들이 현실을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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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 증폭 사회> (김태형 지음, 위즈덤하우스 펴냄). ⓒ위즈덤하우스
심리학이 사회를 읽어내는 데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는 판단에 배움의 길을 택한 그였지만, 대학과 대학원의 '심리학과'는 그의 의지를 구현하기 적합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렇게 심리학계를 떠났던 그는 한동안 노동계에서 사회운동에 몰두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이제 그는 "모든 것을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사고를 바탕으로 한" 주류 심리학계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심리학 이론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심리학을 현실 위에 우뚝 세우고자 한다.

김태형에 따르면,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 인간 심리를 분석하는 진화심리학 역시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사회적 동기"라는 사실을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그는 나이 많은 남성과 젊은 여성이 결합하는 이유를 번식 욕구로 설명한 곽금주(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나 중년 남성이 룸살롱에 가고 터치폰을 사는 이유를 수컷 특유의 '비벼대는 본능'에서 찾은 김정운(여러가지문제연구소 소장) 등의 분석으로는 우리 사회의 병리 현상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사람에게 마음의 병을 유발하는 사회적 요인이 70%라면 개인적 요인은 30%다"라는 말로 사회 현실과 개인의 행불행 사이의 연관성을 요약한다.

<불안 증폭 사회>는 이러한 전제 하에 "외환 위기라는 크나큰 정신적 외상을 겪은 한국인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보고서"로 쓰인 책이다. 그는 "오늘의 한국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우울하며 무기력하고 또 분노하고 있다"면서 책 구석구석 그 증거들을 전한다. 한국은 국민들의 희생을 거름 삼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 됐지만, 가입국 중 소득 격차 2위, 근로 시간·비정규직 비율, 이혼률과 자살률 1위(2009년 기준)라는 '불행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나라다. 이 책은 이런 수치들과 구체적인 사례들로 숨이 턱턱 막힌다.

경제 성장이라는 과업 속에서 심각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국인들, 2011년에는 희망을 만들 수 있을까. 김태형이 2010년 세밑, <88만 원 세대>(레디앙 펴냄)의 공저자 우석훈 2.1연구소 소장을 만났다. 우석훈 소장은 몇 해 앞서부터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을 지적해 왔다. 비록 학문적 바탕은 다르지만, 경제학자인 우석훈의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 역시 심리학자 김태형의 비관적 입장과 비슷하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인의 마음을 만신창이로 짓이긴 신자유주의의 만행을 고발해야 한다"고 두 학자는 입을 모은다.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김태형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심리학자가 사회 비평에 뛰어든 예는 많지 않다. <불안 증폭 사회>를 놓고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달라진 한국인의 마음에 주목한 심리 보고서"라고 설명했다. 이런 책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김태형 : 외환 위기 이후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경제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 속에서 사람이 병들거나 망가지는 일에 등한시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심각하게 병들었다. 이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고 대처하지 못하면 사회 발전이 힘들 거라고 봤다. 이에 대한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 위해 책을 썼다.

우석훈 : 이 책은 그동안 심리학을 개인 차원으로만 환원했던 것에서 벗어난 시도라 반가웠다.

최근 한국 사회를 보면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고방식에 있어서 두 가지 극단적인 경향이 있다. 하나는 경제 근본주의고 하나는 개인 환원주의다. 후자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 심리에 돌리고, '너만 잘하면 돼'라는 식의 긍정적 사고를 해결 방법으로 삼는다. 말도 안 된다. 당장 입에 밥이 안 들어가는데 긍정적 사고가 뭘 바꾸겠나.

한국 사회의 미학, '삼성은 아름답다'

프레시안 : 얼마 전 김규항 씨가 고등학교 교사인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반 아이에게 사회 비판 의식을 길러주기 위해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게 했더니 의외로 "이건희처럼 되고 싶다" 이런 반응이 나왔단다. <불안 증폭 사회>에서 병인(病因)으로 진단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이기심, 경쟁 심리가 교실까지 지배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일화인 듯하다.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 <불안 증폭 사회> 저자 김태형 씨. ⓒ프레시안(최형락)
김태형 :
아이들의 이기심이 강한 건 그만큼 어린 시절부터 신자유주의적 경쟁에 내몰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래도 공동체 속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대학 시절 과 분위기만 해도 하나의 단결된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다. 어린이집에 들어가면서부터 철저한 경쟁 구도가 펼쳐진다.

어른들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들을 칭찬해 준다. 아이들은 가장 큰 행동 동기가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걸 얻기 위해 경쟁 구도 속에서 철저히 이기적인 존재로 자라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은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 공동체 개념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석훈 : '다방구'를 모르는 세대들이 더하다. (웃음) 그런데 이건희처럼 되고 싶다는 욕망은 이기심 외에도 다른 것들이 겹쳐진 것 같다. 과거 한국에선 군인이 영웅처럼 여겨졌지만 지금은 CEO가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시대다. 재작년인가 초등학생, 유치원생들 데리고 생태 캠프를 했는데 다섯 살짜리 남자애한테 "뭐 되고 싶니"라고 물었더니 "CEO 되고 싶어요"라더라.

그리고 1970년대부터 관찰된 현상인데, 한국엔 메갈로매니아(megalomaina, 과도한 권력욕)에 대해 미학적인 집착을 보이는 이들이 많다. 거대한 것에 대한 사랑과 동경이 강하고, 지금은 그게 돈에 집중되고 있다. 그래서 돈 잘 버는 회장님을 볼 때 부러움을 떠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김태형 : 아름다움과 추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사회적 동기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는 게 가장 큰 동기라면, 그런 걸 체득한 사람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이건희를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회라면 돈과 출세,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동기가 강한 사회인 셈이다.

우석훈 : 내가 아는 어떤 삼성 직원의 부인은 TV에 이건희 회장이 나오면 고맙다고 절까지 한다고 한다. 연말에 보너스를 그렇게 많이 주니까 저절로 절이 나온다는 거다.

김태형 : 삼성은 직원들에게 특등 대우를 해주기 때문에 경제적인 불만을 가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석훈 박사가 얘기한 것처럼 회사가 무슨 봉건 영주처럼 회사원에게 시혜를 주듯 하고, 회사원들은 "감사합니다" 하며 받는 방식으로 관계가 유지되다 보니 권리 의식이 없다. '삼성맨'은 왠지 일은 귀신같이 잘 해도 창의성이나 활기는 있을 것 같지 않다. 의존심이 강할수록, 권리 의식이 없을수록 그렇다.

"나 혼자 이 미친 세상을 어떻게 바꿔?"

프레시안 : 의존심은 비단 '삼성맨'들에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책에서도 많은 한국인들의 경제적 의존심을 지적했다.

김태형 : 한국인들이 암울한 군사 독재 시절을 겪고, 거기에선 벗어나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치 민주화 투쟁을 오랫동안 해온 결과 정치적 의존심은 많이 줄었다. 그런데 경제 문제에 대해선 싸운 경험이 없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노력 끝에 민주노총을 만들었지만 기껏 시작의 시작일 뿐이었다. 서구에서는 이미 200년 전에 경험한 것이었다.

노동자가 자기 권리를 실질적으로 어떻게 찾을 것이며, 한국이 어떤 경제 발전 노선을 택할 것이며, 거기서 노동자가 어떤 주체가 될 것인가에 대해서 자본가 계급과 밀고 당기기를 했어야 했는데 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현재까지 경제 문제와 관련해선 의존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재벌들이 있어야지, 국민들이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심리가 만연해 있다. 이런 심리는 경기 변동에 민감한 자영업자 비율이 높은 것과도 관련이 있다. 경기 변동은 주로 기업들이 주도하니까 거기에 대한 의존심이 더욱 심해지는 것이다.

▲ 우석훈 2.1연구소 소장. ⓒ프레시안(최형락)
우석훈 :
다른 나라보다 유독 한국에서 심각하게 일어나는 현상이 서울 의존 현상이다. 프랑스도 중앙 집권 시스템이 강하지만 수도에 대한 의존도가 우리만큼 심하지 않다.

서울 외의 지방은 모조리 '디 아더스(the others)'인 기형적인 상황이다. 지방에선 그 곳에서 뭘 어떻게 생산하려는 고민은 없고, 서울에서 내려오는 토건 아니면 관광 산업에 매달리고 있다. 그런데 토건, 관광 다 경기 민감도가 굉장히 높은 사업이다. 경기가 좋을 땐 다 달려들지만 나빠지면 가장 먼저 거품이 꺼진다. 그렇게 경기 사이클을 심하게 타는 산업에선 사람들의 의존성도 강해진다.

김태형 : 사람에게 한 시간마다 한 번씩 전기 충격을 주겠다고 말하고 충격을 주면, 처음에는 못 견디다가도 나중에는 견딜 수 있게 된다. '아, 이제 오겠구나' 하면서. 그런데 다음 충격이 1분 있다 올지, 10분 있다 올지 예측이 안 되는 상황이라면 같은 충격이더라도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언제 고통이 올지 예측이 돼야 심리 통제도 가능한 거다. 경기 변동에 의존하는 산업을 여기에 비유할 수 있다. 누군가가 변동을 만들어 줘야만 되고 각자는 상황을 통제할 수 없으니까 고통스럽고 무력해지는 것이다.

하나 더 지적하고 싶다. 갈수록 의존심이 강해지는 이유는 외환 위기 이후 공동체가 모조리 붕괴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경쟁 원리를 학교, 직장, 기층 공동체에까지 도입하면서 개개인이 외적 충격에 그대로 노출되게 됐다. 보호해줄 수 있는 공동체가 없으면 개인은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의존심이 높아졌을 때, 강력한 존재감을 가진 누군가가 나타나면 거기에 모든 걸 맡겨버리게 된다. 이명박 대통령도 대중들의 경제적 의존심이 높아졌을 때 등장해서 (대선에서) 성공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나 홀로 볼링'은 미친 짓이다"

우석훈 : SBS 드라마 <자이언트>를 보면 기층 공동체가 붕괴되는 기간에 강남 공동체는 더욱 강화됐더라. 경제인류학에서 '우정'과 '환대'가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 설명하는 게 있는데, 없는 사람들한텐 우정도 환대도 없지만 부자동네에 가면 우정 두텁고 환대가 뜨겁다. (웃음) 이런 과정 속에서 보통의 공동체는 깨지고 지배층의 공동체는 강화되는 이원 구조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김태형 : 물론 지배층 공동체가 강화된 경향이 있지만, 그건 공동체라기보다 하나의 '동맹'이다. 속으론 욕하지만 이익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겉으론 똘똘 뭉친다. 반면 기층 공동체는 갈가리 찢어졌다. 보호해주는 공동체가 없으니까 외부 충격을 고스란히 개인이 받게 됐다.

이 상황에서 무력감을 안 느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원래 자본주의 시스템은 공동체가 있기에 잘 돌아갈 수 있는 건데, 지금 같이 공동체가 다 붕괴된 상황이면 자본주의도 붕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한국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도 공동체가 탄탄해서였다고 보는 경제학자들도 있다던데….

우석훈 : 미국의 인기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나오는 동네를 보자. 중산층 비율 높고 백인과 교회 다니는 이들이 많은 동네인데 공동체가 굳건하고 자본주의 시스템도 제일 잘 돌아간다.

1990년대 프랑스 유학 시절, 수업 시간에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적이 있었다. 그 때 한국 경제가 원래 상황이 비슷했던 아프리카나 중남미 국가들에 비해 먼저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곗돈' 문화가 거론됐다. 당시엔 동의 못했는데 지금은 이해가 간다. 계는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다. 누군가 창업을 한다고 하면 돈을 모아줄 수 있는 장치가 됐고, 그걸 통해 노동이나 사회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었다.

김태형 : 그렇다. 사회를 이끄는 동력은 집단에서 나온다. 기업의 힘 역시 기업 집단 자체에서 나오는 거지 개인으로부터 나오는 게 아니다. 공동체 복원 노력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 발전도 지체될 거라고 본다. 무한 경쟁 체제에서 나오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다. 미국도 개인 간 경쟁을 치열하게 조장한 결과 경제 범죄가 치솟아서 그걸 해결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 있다. 기업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일하니까, 전부 잠재적인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거다.

우석훈 : 1990년대에 미국에서 <볼링 얼론>이란 책이 나와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선 <나 홀로 볼링>(로버트 퍼트넘 지음, 정승현 옮김, 페이퍼로드 펴냄)이란 제목으로 나왔다. 볼링이 원래 서로 골려먹거나 박수치는 재미로 다 같이 하는 게임인데, '나 홀로 볼링' 족이 그렇게 늘었다는 얘기다. 혼자 무슨 재미로 볼링 치나, 이거 이상하다 싶어서 봤더니 공동체가 붕괴돼 같이 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는 거다.

공동체가 깨지면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줄고 사회 전체적인 생동감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게 소위 좌파나 진보 세력에 국한된 게 아니라 보수한테도 중요한 문제다.

"진보여, '마음'을 보라"

김태형 : 이렇게 계속 외부 충격을 개인이 오롯이 흡수하는 상태가 계속되면,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의존심과 무력감이 파시즘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더 이상 이렇게 못 산다!' 하면서 다 같이 일어나는 것이다. 후자로 가기 위해서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혼자 당하지 말고 좀 단결해 보자는 자각을 심어주어야 한다.

그런데 진보 진영이 지금까지 왜 사람들의 심리를 후자로 끌지 못했을까? 진보적 정책이 없어서였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뭘 바꾸려는 마음을 갖기엔 굉장히 지쳐있어서 그렇다.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인데, 우울증 환자한테 "어이, 나가서 운동도 좀 하지 그래?" 이렇게 해 봐라. 운동 할 수 있었으면 애초에 우울증 안 걸린다. (웃음) 그러니까 좋은 정책이 나오고 그게 좋은 줄 알아도 '운동'하러 나가지 않는다는 거다.

이런 문제들을 진보 세력에게 화두로 던지고 싶다. 정치 문제에 관심을 덜고, 긍정 심리학이니 엉터리 책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이들을 어떻게 끌어들일 것이냐. 그런 책 읽어봤자 아무 소용도 없지 않나. 차라리 진보 조직이 그걸 하자는 거다. 대중들한테 정치적 공약만 내세우지 말고 마음을 위로하는 일, 사람을 모으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거다.

우석훈 : 진보신당 창당 때부터 가까이에서 지켜봤는데, 당직자들이 요즘 가장 지쳐있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 수없이 깨지고 떨어지고 그랬는데 요즘처럼 지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지난 6·2 지방선거 때 나름 약진해서, 다음 대통령 선거 때는 TV 토론회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됐는데도 말이다.

비슷한 현상이 시민단체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다. 개인적 삶에 여유가 없다 보니 새로이 뭔가를 하자고 할 만한 사람이 없다. 그러다 보니 내부에서의 싸움만 커져 간다. 진보신당 게시판 같은 데서 '너는 프티부르주아다', '개량주의자다' 이러면서 서로 욕한다. 노선이 다르다면 당연히 논쟁이 필요하겠지만 그런 것도 아닌데 서로 싸운다.

김태형 : 진보 세력이 또 하나 주의해야 할 것이 한국인들의 자기 부정 심리가 계급 배반 투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버라이어티>의 영화평론가 데릭 엘리가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를 보고 "이런 유의 극단적인 가학과 폭력 그리고 그에 따른 극심한 자기혐오는 다른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최근 한국 영화엔 불편한 폭력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등장인물들도 악한이 아니더라도 동일시할 수 없는 사람들뿐이다.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좋아할까? 전혀 아니다. 사회에서 '루저'로 낙인찍힌 이들은 자기 자신을 좋아할 수가 없다. 여기서 탈피하려면 다른 걸 잡고 쫓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상 숭배, 중산층 모방 현상, 계급 배반 투표 현상이 나오는 거다.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루저'는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게 이익이지만 논리라는 게 통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싫은 감정, 거기서 벗어나고 싶은 동기가 먼저니까. 이들은 가끔 '안 되겠다' 싶을 때는 진보정당에 표를 준다. 그런데 조금만 잘못해도 돌아선다. 투표 이유가 사회 개혁이라기보다 자기 분노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권이 교체돼도 위험한 거다. 정권이 바뀌니까 좀 나아진다는 느낌을 주지 못하면 점점 더 정치적 무관심으로 갈 수 있으니까.

ⓒ프레시안(최형락)

40대 남성들이 취미를 갖는다면…

프레시안 :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40대 남성들이 다른 집단과 비교할 때 특히 개인적 측면, 사회적 측면에서 모두 만족 수준이 낮다. 두 분 다 40대 남성인데 주변을 관찰해보면 어떤가.

우석훈 : 아까 시민단체에 활력이 없다고 말했는데 그나마 요즘 잘 돌아가는 시민단체들은 주부들이 본진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학부모, 특히 엄마들이 주축이 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단체는 처음엔 될까 싶었는데 엄청 잘 돌아간다고 한다. 이에 비해 20대가 본진이 되는 시민운동은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잘 안 되고, 40대 남성이 본진이 되는 운동은 그냥… 우울하다. (웃음)

김태형 : 40대 남성들 문화 자체가 우울하다. 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제 얘기를 잘 못 꺼내 놓는다. 술 안 먹고 얘기할 수 있는 훈련도 안 되어있다. 회의 5분 만에 끝내고 '2차 가서 얘기하자'고 한다.

내 경우, 졸업 후 한동안은 고교 동창들과 연락을 끊었다가 뒤늦게야 한두 번 동창회에 나가 봤는데 서로 출세한 거 자랑하고 명함 주고받고, 나중에 뭐 이용해먹을 거 없나 눈치 보는 식이라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그런 자리에서 친구들한테 "너희들 행복하냐" 하고 물었더니 자리가 썰렁해졌다.

내가 자꾸 불편한 질문을 던지니까 다음에 자리에 나오는 애들은 항상 반으로 줄어들어 있더라. (웃음) 그런데 그런 속 얘기가 가능해진 사이는 정말 오래 간다. 못 해봐서 그렇지 남자 넷, 다섯 모여서 차 놓고 속 얘길 다 하면 분명 재밌고 대화 수준도 상당히 높을 거다.

우석훈 : 3년 전부터 "우리가 차를 마시면서 운동과 혁명을 논하면 성공할 수도 있다"는 얘길 했었다. (웃음) 우리도 술 말고 차 마시면서 창당이나 집권에 대한 얘기 좀 해보자고. 어떤 조직에선 송년회 5시간 할 동안 결정한 게 2차 어디 갈지 딱 하나였다고 한다. (웃음)

프랑스 친구들이랑 만나면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붙잡고 수다를 떠는 통에 지칠 지경인데 한국은 수다 떨 줄 아는 이들이 별로 없다. 권력 있는 사람들은 아예 남의 말을 듣질 못하고. 사람이 말을 하고 듣기도 하고 반박도 해야 하는데 그런 테크닉이 떨어진다.

김태형 : 40대 남성들이 경쟁의 최전선에 몰려있다 보니 자기 마음 드러내거나 관계 맺는 일에 서툴다. 또 문화적 소양도 없고 대부분 취미가 없다. 거기서 유일한 취미가 바로 술이고. 이런 문화가 지배하는 사회는 불우한 사회인데 지금 한국이 바로 그렇다.

책에서 지적한 심리 코드 중 하나인 쾌락주의도 한국에서 유독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한국에서 남자들만 모인 술자리에서 1차, 2차로 올라가는 차수가 의미하는 건 자기학대의 강도 아니면 '터치'의 농도 둘 중 하나다. 한국 사람들이 외국 가서 현지 파트너들한테 '한국과 똑같은 곳으로 가자'고 요구하고, 상대방은 얼굴 붉히는 일들도 종종 벌어지지 않나.

왜 이럴까. 일제 강점기 때 요정 문화가 들어와 기득권 세력의 관행이 됐고, 보통의 사람들도 기득권의 문화를 추종하고 따라가면서 굳어진 거다. 한국 남자들이 딱히 더 쾌락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그런 곳들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까 손쉽게 그 문화에 접근할 수 있고, 그 외의 다른 문화를 모르는 거다.

우석훈 : 룸살롱이나 골프장 문화의 대안으로 나왔던 게 낚시였는데, 그것도 안 되겠더라. 낚시 가서 술 먹으니까. (웃음) 요즘 나도 그렇고 음악 듣는 취미를 가진 남성들이 늘었는데 그것도 좋은 대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기기 평가하려면 맨 정신이어야 하는데, 그러면 술 안마시니까. (웃음)

책 보고 습작 쓰는 목적으로 '주부 독서 클럽'이라는 모임을 갖고 있는데 여기 나오는 사람들에게선 우울증을 발견할 수 없다. 구성원들은 부자도 아니고, 중산층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람들도 많다. 프랑스나 스위스에서 봤던 지역 단위의 작은 모임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본다. 문화적으로 풍성해져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불안 증폭을 멈춰라!"

프레시안 : 40대 남성들뿐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가 '불안 증폭'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태형 : 어떤 치료든 첫 단계는 병에 걸린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고,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내가 돌을 맞았는데, 돌 던진 범인이 누군지 안다면 그 사람을 잡든 경찰에 넘기든 문제를 바로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주는 스트레스는 돌 맞은 것과 달리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가 없고 원인도 잘 알 수가 없다.

일단 우리가 병에 걸렸고 이 병이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왔으며, 어떻게든 고쳐야 한다는 사실을 일단 알아야 한다. 원인을 알고 고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일단 그게 출발점이다. 그 다음, 병인을 제거하기 위해 치료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그 단초가 바로 공동체다. 병인을 알아챘다 한들 해결은 혼자선 안 된다. 여럿이 함께 머리와 살, 가슴을 맞대야 마음을 빨리 회복할 수 있고 사회 활동에 참가할 수 있다.

궁극적으론 한국 사회가 발전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OECD 회원국이 되고 경제력 10위권이 됐는데, 그럼 다음 목표는 1위인가? 배고픔 면하자고 해서 앞만 보고 달려오고 선진국 만들자고 해서 장시간 노동 견디며 살아 왔는데, 돈을 63빌딩 높이만큼 쌓는다고 해도 사람이 병들면 아무 소용없다.

경제 발전을 위해 사람을 소모시키는 발전 노선은 버려야 한다. 경제 자체가 사람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한나라당이 "이렇게 하면 돈을 더 많이 번다"라고 주장하면, 야당이나 진보 세력이 "그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돈이 안 생겨"라고 반박할 게 아니라 "돈은 너희들이나 많이 벌어. 우린 돈만 먹고 사는 거 아니다. 다른 게 필요하다. 공동체를 돌려 달라!" 이렇게 나와야 한다.

우석훈 : 사람은 돈에 집착할수록 괴로워진다. 경제학자이긴 하지만 세상에서 돈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돈을 탐할수록 부가 쌓이는 것도 아니다. 가령 1인당 GDP가 최고 수준인 룩셈부르크나 노르웨이 보면 사람들이 별로 돈에 관심이 없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대충 산다. 돈에 집착하지 않는 사회가 더 풍요로웠던 예는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수 없이 많다. 우리 같은 사회, 아무리 아득바득 해도 지금 GDP 수준이 최대일 거다.

김태형 : 그리고 병을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상황이 지금보다 나빠질 가능성도 농후하다. 사람들의 정서가 붕괴될 때 사회적 비용 역시 막강하다. 마음의 병은 약으로도 못 고치고 심리 치료를 해야 하는데 심리 치료는 시간당 10만 원이다. 그리고 질환이 더 심해지면 심리 치료도 안 든다. 조승희(미국 버지니아 대학교 총기 난사 사건 범인) 같은 사람들이 더 나오면 어떻게 할 건가. 계속 내버려 둘 건가.

우석훈 : <불안 증폭 사회>가 불안 증폭을 막는 브레이크가 되리라 믿는다. <88만 원 세대>를 내고 난 뒤 어떤 변화가 있는지 지켜봤는데, 여전히 대학생들에게 무력감과 공포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뭘 하려고 해도 일단 밥 세 끼는 먹을 수 있어야 하는데 한 순간 삐끗하면 세 끼 밥을 못 먹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내면화 되어있다. 그 공포감은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그래도 변화는 올 것 같다. 일단 이대로만 있기엔 지금 경제가 너무 안 좋다. 실제로 '88만 원 세대의 새판 짜기'라는 부제를 달고 쓴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레디앙 펴냄)에 청년유니온 아이디어를 얘기했는데, 이렇게나 금방 나올 줄 몰랐다. 한국은 확실히 뭐가 빠르긴 빠르다. (웃음)

한국 사회가 뼛속깊이 무기력한 것 같아도 공동체의 흔적은 많이 남아 있다. 어떤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공통의 에너지가 생기면 실질적인 변화도 생기지 않을까,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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