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일본을 우습게 아는 나라가 둘 있다. 하나는 중국이고 하나는 한국이다. 그런데 세계에서 중국을 우습게 보는 나라는 딱 하나 있다. 어딘 줄 아느냐? 한국이다."
물론 중국을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말일 테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선배들은 중국을 통해 세계를 보았고, 중국과 더불어 문명을 나누었으며, 중국을 이해하는 것을 지식의 기초로 여겼다. 그런데 이런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가 된 것은 지난 150년 동안 중국의 못남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맹목적으로 선진국 특히 미국만을 절절이 지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에 중국이 그 미국과 더불어 'G2'로 불리더니 올해는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 2008년 8월부터 8명의 중국 전문가들이 중국을 제대로 보자면서 <프레시안>에 '중국 탐구'를 진행했다. 한인희 대진대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중국 관련 연구 업적을 많이 낸 한국 학자들과 중국 외교 전문가인 장리리(張歷歷) 중국외교학원 교수가 참여하여 독자로 하여금 중국을 우습게 보지 않도록 만드는데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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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중국을 '쭝국'이라 하고 '짱께'라 하고 짝퉁과 싸구려로만 보는 시각이 많이 줄었다. 그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상하이 엑스포, 각종 국제 스포츠 제전 등 중국 내의 원인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국이 한국의 제1교역국, 제1투자국이 되면서 중국과의 왕래가 빈번해진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 중국 한 번 안 다녀온 사람은 술자리에서 얘기하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책방에는 '중국' 자가 들어가는 책들이 항상 몇 개의 서가를 차지할 정도로 넘쳐난다.
넘쳐나는 중국에 관한 정보들을 보면서 정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중국 신문이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는가? 라고 의심한 적이 많다. 우리나라에 넘치는 중국 이야기들 가운데 그만큼 도움 되는 이야기는 적고, 중국인들은 오히려 '한국에 과연 중국 전문가가 있는가?'라고 의심한다. 이 점에서 중국어에 능통한 이 책의 저자들이 들춰주는 중국의 내면은 참으로 리얼하다.
"중국 사회에서 '부자들에 대한 증오'와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증오' 심리는 최근 몇 년간 주요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그 원인은 부도덕한 부자와 관리들의 도덕적 해이가 일반 중국인들에게 분노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 사회의 불공평한 분배와 치부 과정에서 '원죄'적 성격을 갖고 있다. 부자들이 획득한 부가 성실한 노동과 지혜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 부동산 개발 업자가 국가의 공공 권력을 통해 치부를 하거나, 각종 광산의 주인들이 자연 자원을 불법으로 이용하여 치부하거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고, 폭력 집단과 권력자 간의 보호를 통해 부를 획득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치부는 곧 부도덕한 일로 중국인들은 생각한다." (236~238쪽)
이 책은 이렇게 중국인들의 생각을 알려주어 한국인들로 하여금 중국 사회의 내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특히 중국 경제와 중국의 국제 관계에 대하여 애정 어린 충고를 거듭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를 깨우치도록 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은 지금 서체서용에서 중체중용으로 가고 있는가?'라는 내용을 읽으니(179~184쪽)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의 모습들이 달리 보인다.
소비의 진작과 확대에 중국의 정책 역량이 총 집결되어야 한다는 논의(255~263쪽)를 통해 중국 경제의 출구를 짐작해볼 수 있다. 최근 한반도를 둘러싼 일련의 사태 추이를 보면서 "미국과 중국 관계는 이제 상호의 실체를 구체적이고 본격적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관계'가 되었다."(71쪽)는 강준영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의 단정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8명의 필자가 펼치는 중국에 관한 미시적 담론의 파노라마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거시적인 얘기, 심지어는 거대 담론을 주문하고 싶어진 것은 우습게 보다가 큰 코 다치게 될까 두려워서이다. 사실 1982년 등소평이 '중국 특색적 사회주의(中國特色的社會主義)'란 말을 중국 공산당 12차 전당 대회에 보고할 때부터 중국은 '중화적' 문제 해결 방식을 선언한 셈이다. 그것은 민족 정서를 바탕에 깊이 깔고 사회 갈등과 대·내외 문제를 중국 중심주의로 뭉뚱그려 해결하는 장구한 중국 역사에서 보여 온 전통적인 방식이다.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공산당 수뇌가 경제 건설이 국가 목표라고 선언한 이때부터 우리는 전통적으로 그래왔듯이 두려움을 갖고 미리 정치적 설계를 해두었어야 했다.
18세기까지 중국은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었고, 제국주의 세력에 흔들릴 때도 강국의 면모를 유지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연합군의 아시아 지역 사령관은 중국인 장개석이었다. 겨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들어간 한국이 중국의 경제적 낙후를 우습게 보던 시절에도 중국은 정치적으로 강국이었다.
한중 수교(1992년 8월 24일) 다음 해 필자는 대륙연구소에서 발행한 <전망>이란 잡지에 한중 교류의 미래는 정치가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철저한 정치적 기획 위에 한중 경제 교류를 넓혀가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18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책에서 보여주듯이 미시적 경제 우위의 담론에 갇혀있을 따름이다.
그래놓고는 천안함 사건이나 연평도 포격에 대하여 돈거래 많이 했으니 도와주리라는 엉뚱한(?) 기대를 중국에 걸고 실망하는 등 정서적 정치 행위만을 거듭하고 있다. 중국은 중국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이고 미국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움직인다. 이러다 중국과 미국의 고래싸움에 우리가 낀다면 정말로 큰 코 다칠 것이다.
이 책 1권을 읽고 나면 국가 권력을 동원한 강력한 내부 통제와 수출을 통한 경제 발전이라는 중국의 걸음걸이가 박정희식 한국 발전 모델과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필자들이 2권과 3권에서 어떻게 풀어낼 것이지 자못 궁금해진다. '경제 우위'의 시대에 경제가 정치를 이끌면서 드러난 도덕과 이상의 상실이 신자유주의의 만연으로 아예 '경제 유일'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
전체주의보다 더 획일적인 돈의 이데올로기가 전 지구를 뒤덮고 있는 오늘, 필자들이 그렇게 강조한 '현실적' 민족인 중국인이 어떤 '중화적' 대안을 마련해 낼 수 있을지도 궁금하다. 우리가 경험했듯이 중국도 천민 자본주의로 인한 각종 병폐와 더불어 불평등과 부자유에 대한 정치적 욕구가 더 큰 문제로 등장할 것이며, 경제 발전이라는 명제는 한 방에 날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내는 경제를 넘어 정치의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정치가 인간관계의 총화라는 점에서 정치 문제에 대한 고민의 첫걸음은 역시 사람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한국에서 중국을 이해하는데 일조하겠다는 이 책의 취지가 살아나려면 중국인에 대한 이해가 앞서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길은 중국인을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과 몸짓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중국 속의 중국'을 이해하는 첩경이다.
구미 국가들과 일본에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많이 읽는 책이 사마천의 <사기>라고 한다. 미국의 저명한 대학들은 중국보다 더 상세한 <사기> 주석서를 내고 있기도 하다. <사기>는 중국인의 마음과 몸짓과 인간형을 만들어온 조형자임에 틀림없다. 지역적으로,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가까운 우리가 중국학을 우습게 여기는 풍토와는 사뭇 대조적이다. 문예와 역사와 철학이 깊게 녹아 있는 저자들의 '중국 탐구'가 이어지리라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자조적이긴 하지만 10년 내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 될 중국이, 1조 달러에 육박하는 미국 국채를 움켜쥐고 과거 미국이 해온 문화 제국주의(?)의 길을 똑같이 걸을 것인가? 이 책에 다음과 같은 일례가 실려 있다.
"언어의 보급과 전파는 문화 제국주의의 선봉장이다. 중국 정부는 이러한 목표에 따라 2004년 서울에 세계 최초의 '공자 학원(Confucius Institute)'을 설립하였다. 이러한 공자 학원 프로젝트는 지난 3년 동안 69개국에 238개를 설립하면서 이른바 '사흘마다 한 곳이 설립' 되는 경제 발전에 비유되는 '중국적 속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 사업은 매년 약 2억 위안(한화 300억 원)을 투입하는 사업이다." (96~97쪽)
아예 영어를 공유하자거나 국제 경쟁력을 위해 오로지 영어에 매달려야 한다는 우리와는 너무도 다른 정책이어서 짐작이 안 가지만, 좀 크게 넘겨짚으면 중국과 사업하려면 이제 중국어로 하라는 적극적인 정책으로 읽힌다. 자신들이 돈을 내어 주변을 중국화하겠다는 이 전통적인 방식은 역사적으로 항상 성공을 거두어왔다.
그 주변으로서 우리나라는 지금 너무도 '자발적으로' 전 세계 HSK(중국한어수평고시) 응시생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처럼 많은 중국 관련 책이나 매체들이 한자에 대한 우리식 독음의 주권을 포기하고 주체성도, 상호주의도, 역사성도, 시대성도 정확하지 않은 현대 중국어 독음을 '자발적으로' 쓰고 있으며, 그래서 한 쪽 안에서도 같은 한자에 대해 표기를 달리 하는 책과 신문이 많다. 심지어 중국의 누구도 요청하지 않았는데 '수이(首尔, 서우얼)'라는 기막힌 말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내어 보편화시키기도 하였다. 중국을 무시해온 세계 유일의 나라가 자기도 모르게 스멀스멀 중국에 예속되기 시작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국을 중국 속에 들어가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이 책의 기획 의도에 공감한다. 저자들은 매끄러운 글쓰기로 "우리에게 중국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상당히 많은 대답을 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우리의 입장에서 중국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 '우리의 입장'이란 것이 정리되지 않았거나 없다는 점이다.
이제라도 정치적 기획이 필요하다. 중국을 상대하고 그들의 제국으로부터 우리의 생존을 모색할 100년, 1000년을 내다보는 체계적이고 거대한 프로젝트가 가동되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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