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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평자의 고백 "쓰레기를 칭찬하는 나는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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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서평자의 고백 "쓰레기를 칭찬하는 나는 사기꾼!"

[프레시안 books]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동물농장>, <1984>로 널리 알려진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 <위건 부두로 가는 길> 등의 주옥같은 르포르타주를 남겼다. 또 그는 평생 칼럼, 서평을 포함한 엄청난 양의 에세이도 썼다. 특히 그는 1930년(27세) <아델피>에 서평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 서평 쓰기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다음에 글은 오웰이 1946년 5월 <트리뷴>에 게재한 '어느 서평자의 고백(Confessions of a Book Reviewer)'을 완역한 것이다. 오웰은 1945년 <동물농장>이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더 이상 생계를 위해 서평을 쓰지 않아도 됨에도 서평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이상적인 서평을 갈구하면서, 서평을 비롯한 평론 일반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이 글은 (오웰의 글쓰기 스타일과 함께)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출판에서 9월 중순에 펴낼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에 실릴 에세이 중 하나다. 이 책은 번역가 이한중 씨가 오웰의 수많은 에세이 가운데 29편을 직접 골라서 번역한 것이다. 이 책에 실릴 오웰의 에세이는 아래 글을 포함해 20편이 초역이다. 한겨레출판의 허락을 구해 오웰의 이 글을 먼저 공개한다. '프레시안 books'는 앞으로도 국내외 작가들의 서평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글을 실을 예정이다. <편집자>


어느 서평자의 고백

▲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한겨레출판 근간). ⓒ한겨레출판
추우면서도 공기는 탁한 침실 겸 거실. 담배꽁초와 반쯤 비운 찻잔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좀먹은 가운을 입은 남자가 쓰러질 듯한 탁자 앞에 앉아 먼지 쌓인 종이 더미 속에서 타자기 놓을 자리를 찾아내려고 한다. 그렇다고 종이들을 버릴 수는 없다. 쓰레기통이 벌써 넘쳐날뿐더러, 답장 못한 편지들과 아직 못낸 공과금 고지서들 사이에 현금으로 바꾸지 못한 게 거의 확실한 2기니짜리 수표가 끼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주소록에다 주소를 옮겨 적어야 하는 편지들도 있다. 하지만 그는 주소록을 잃어버렸고, 그걸 찾을 생각을 하면(그뿐 아니라 무엇이든 찾을 생각을 하면) 극심한 자살 충동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35세이지만 50세로 보인다. 대머리고 하지정맥류를 앓고 있으며 안경을 쓴다(하나뿐인 안경을 습관처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쓰고 있을 것이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영양실조 상태일 것이고, 최근에 반짝 운이 좋았다면 숙취로 힘들어 하고 있을 것이다. 때는 오전 11시 반, 계획대로라면 두 시간 전부터 일을 시작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래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한들 좌절하고 말았을 것이다. 거의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리고, 아기는 울어대고, 바깥의 길에선 전기드릴로 무언가를 뚫어대고, 계단에선 돈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발소리를 쿵쾅거리며 오르내렸던 것이다. 방금 전엔 두 번째로 우편배달이 왔는데, 광고 전단 둘과 빨간 글씨가 박힌 소득세 독촉장이었다.

이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작가다. 그는 시인일 수도, 소설가일 수도, 시나리오 작가일 수도, 라디오 방송작가일 수도 있다. 글 써서 먹고사는 사람들이 대개 다 비슷하니 말이다. 하지만 여기선 서평자라고 하자. 종이 더미 속에는 묵직한 소포 꾸러미가 반쯤 감춰져 있고, 그 안에는 편집자의 쪽지 왈, '일맥상통'할 거라는 다섯 권의 책이 들어 있다.

그게 도착한 것은 나흘 전이었지만, 서평자는 48시간 동안 도덕성이 마비되었던 탓에 소포를 열어볼 수 없었다. 그리고 어제서야 굳게 마음먹은 일순간, 소포 끈을 확 풀어버리고 다섯 권의 책을 확인한 것이었다. <교차로의 팔레스타인>, <과학적인 낙농업>, <유럽 민주주의의 짧은 역사>(이 책은 680페이지에 무게가 4파운드였다),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의 부족 관습> 그리고 아마 실수로 포함됐을 <드러눕는 게 더 좋아>라는 소설이었다. 그의 서평은(800단어 분량이었다) 다음 날 정오까지 '입고(入稿)'되어야만 했다.

그중에 세 권은 그로서는 전혀 무지한 분야라서 적어도 50페이지는 읽어봐야 한다. 그래야 저자뿐만 아니라(물론 저자는 서평자의 습성을 훤히 알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까지 자신을 다 드러내 보이는 황당한 실수를 피할 수 있다. 오후 4시면 그는 책을 소포 꾸러미 밖으로 내놓긴 하겠지만 여전히 펼쳐볼 용기는 나지 않아 애를 먹고 있을 것이다. 그것들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도, 심지어 종이 냄새만 맡아도, 아주까리기름 친 차가운 쌀 푸딩을 먹어야 하는 기분이다.

그런데도 그의 원고는 자못 신기하게도 제때 편집자의 책상에 도착할 것이다. 어떻게든 항상 정시까지 도착하는 것이다. 저녁 9시쯤 되면 정신이 비교적 맑아지기 시작할 것이고, 오밤중이 되도록 방에 앉아 (점점 추워지고 담배 연기는 점점 자욱해진다) 능숙한 솜씨로 책을 한 권씩 훑은 다음 하나를 내려놓을 때마다 '이걸 책이라고!' 소리를 덧붙일 것이다. 아침이면 퀭한 눈에 면도 안 한 얼굴로 고약한 표정을 짓고서 빈 종이를 한두 시간 바라보고만 있다가, 시곗바늘의 위협에 겁을 집어먹고 행동을 개시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는 갑자기 타자기를 마구 두드리기 시작한다. 온갖 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들이('놓칠 수 없는 책'이니 '페이지마다 되새길 만한 것이 있다'느니 '무엇무엇을 다룬 무슨 장이 특히 중요하다'느니) 자석을 따라 움직이는 쇳가루처럼 척척 제자리로 뛰어든다. 그리고 서평자는 원고를 들고 나서야 할 때를 3분쯤 남겨두고 정확한 분량으로 마친다. 그리고 그사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의 시시한 책들이 우편으로 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같은 일은 또 반복된다. 하지만 이렇게 심신을 고문당하고 짓밟히는 이도 불과 몇 년 전에는 고상한 포부를 품고서 이 일을 시작했다.

내가 과장하는 것 같은가? 정기적으로 서평을 하는 사람이라면(이를테면 1년에 최소한 백 권 이상의 책을 논평하는 이라면) 누구에게든 묻고 싶다. 방금 내가 묘사한 스타일과 다르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느냐고. 어쨌든 모든 작가가 대체로 그런 종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겠지만 정말 그렇다)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아무리 지겨워한다 해도 서평자는 책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사람이며, 매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책 중에 쉰 권이나 백 권쯤에 대해서는 기꺼이 서평을 쓰고 싶어 한다. 업계 최고 수준인 사람이라면 열 권에서 스무 권 정도를 택할 것이며, 두세 권만 꼽을 수도 있다. 그 나머지 일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로, 그것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흘려보내는 셈이다.

서평자들 대다수는 자신이 소개하는 책에 대해 부적절하거나 오도하는 논평을 하게 된다. 전쟁(제2차 세계 대전 : 주) 이후로 출판사들은 전보다 신문이나 잡지의 문학 담당자들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내는 책마다 한바탕 찬가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부족해진 지면과 다른 불편한 문제로 인해 서평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 현상을 지켜보며 사람들은 서평을 꾼들한테 안 맡기면 해결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곤 한다. 전문서야 전문가가 서평을 해야겠지만 그 나머지 상당수의 서평, 특히 소설의 경우엔 아마추어가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거의 모든 책은 이런저런 독자에게 열띤 감흥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격렬한 반감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생각은 시큰둥한 전문 필자보다 확실히 값질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편집자들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편집자는 언제나 자신이 관리하는 일군의 꾼들, 즉 업계 용어로 '선수들'을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모든 책이 서평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당연시하는 한, 어떤 문제도 해결되기 어렵다.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면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이고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이 책은 쓸모없다'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도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일 것이다.

하지만 대중은 그런 책을 돈 주고 사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그들은 어떤 책을 읽어보라는 권유와 안내를 원하며, 어떤 식의 평가를 원한다. 그러나 가치의 문제가 언급되자마자 평가의 기준은 무너져버리고 만다. <리어 왕>은 좋은 희곡이고 <4인의 의인>((1905). 영국 작가 에드가 월러스(Edgar Wallace)의 탐정소설 : 주)은 좋은 스릴러라고 말한다면 '좋다'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서평자라면 누구나 이런 유의 말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한다.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천 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곧 나올 신간 서적에 대해 한두 줄 정도의 짧은 소개를 해주는 건 유익할 수 있되, 흔히 하듯 600단어 정도의 중간 길이로 쓰는 서평은 서평자가 정말 원하는 작업이라 해도 무익한 것이 되기 마련이다.

서평자는 대개 그런 글은 쓰고 싶어 하지 않으며, 매주 자잘한 서평만 쓰다보면 이 글 앞머리에 나오는, 가운 차림으로 고문당하는 사람 신세가 되고 만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낮잡아 볼 수 있는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니, 두 가지 업을 다 해본 입장에서 말하건대 서평자는 영화평론가보다는 낫다. 영화평론가는 집에서 일할 수도 없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오전 11시면 시사회에 참석해야 하며, 한 잔의 싸구려 셰리주 값에 자신의 명예를 팔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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