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세대가 책과 멀어진 시대에 책을 화두로 내세우는 '프레시안 books'와 같은 시도는 <프레시안>의 잠재적 독자를 잃는 어리석은 일이 아닌가? 안팎에서 이런 걱정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현상만 놓고 본다면 모두가 다 그럴듯한 걱정이고 우려였다.
그렇다면, 지금 책을 얘기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까? <프레시안>은 이 질문에 답을 찾고자 먼저 도정일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를 찾았다. 그는 한국 사회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고해온 비판적 지식인이자, 수년째 책읽기 운동의 맨 앞에서 고군분투 중이다.
다음은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동숭동 책읽는사회문화재단 사무실에서 도정일 교수와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 전문이다.
▲ 도정일 경희대학교 명예교수(책읽는사회문화재단 이사장). ⓒ프레시안(손문상) |
시민 역량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프레시안 : 지난 2007년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공동으로 진행한 강연에서 선생님께서는 '민주주의 문화' 없이는 민주주의는 취약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뒤로 3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경고가 현실이 되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최근의 한국 사회,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도정일 : 3년 전 강연에서 제가 강조했던 것은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킬 시민의 역량이 성숙하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언제든지 자빠지고 엎어지고 뒷걸음 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주의의 문화는 '문화'라는 영역에 한정되지 않아요.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일상적 삶과 행동과 정신 상태의 모든 층위에서 '민주 사회를 유지할 시민적 역량'이 필요합니다. 그 역량은 일반 시민만이 아니라 정치인, 공무원, 기업인, 언론인, 교육자에게도 필요합니다. 이들도 모두 '시민'이니까요.
요즘 보면 민주주의의 '민'자도 모르는 듯한 공무원과 관료들이 저지르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너무 많아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훈련이 되어 있질 않습니다. 문화는 자연이 아니므로 사람이 키우고 사회가 만들어가야 합니다. 민주주의 원칙의 바탕 위에서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힘, 틀린 정보를 가려내는 판단력과 온당한 해석력, 이성의 사회적 공적 사용력, 시민의 자유와 시민의 책임에 대한 인식-민주주의 문화의 골자를 이루는 이런 능력들은 자기 교육과 훈련을 통해 길러져야 합니다.
시민의 자유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민의 책임입니다. 이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지금만이 아니라 오랫동안, 민주 사회를 만들고 지킬 시민적 역량의 결핍이라는 질병을 속속들이 앓고 있습니다. 이건 정치 민주주의에 한정된 문제가 아닙니다. 경제 민주주의도 그렇지요. 경제 평등, 경제 정의, 취업난 같은 문제를 풀어나갈 궁극적 힘은 시민에게서 나옵니다.
두 개의 대한민국…보수가 앞장서 해결책 마련해야
프레시안 : '두 국민'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온갖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사회 갈등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갈등이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결국은 '민주주의 문화'의 결핍이 그 이유라는 생각이 듭니다만…
도정일 : 갈등 없는 사회는 없습니다. 갈등의 긍정적 측면은 그것이 사회 발전의 창조적 동력원이 된다는 것이고, 부정적 측면은 그게 사회를 풍비박산으로 쪼개놓는 파괴적 혼돈의 진원도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문제는 갈등의 부정적 파괴력을 제어할 능력이 있는가, 혼돈으로부터 생산적 질서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라는 거죠.
민주주의 문화로 사회적 문제들을 다 해결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원인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힘은 민주적 사고의 역량에서 나옵니다. 대학 교육에서는 '비판적 사고력'를 길러주는 일이 매우 중요한데, 이유는 그런 사고 능력 없이는 문제를 풀 '솔루션'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판적 사고 그러면 그런 건 소위 '진보' 쪽에서나 강조하는 것 아니냐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천만의 말씀, 비판적 사고는 진보-보수 어느 쪽에나 필수적입니다. 그게 모자라면 진보건 보수건 모두 비정상적 정신 상태에 빠집니다.
한 예로, 지금 우리 사회는 말씀처럼 극단적인 빈부 양극화로 인한 '두 국민' 현상을 보이고 있지요. 미안하지만 이른바 보수-우파 얘기부터 먼저 해볼까요?
경제 평등은 왜 중요한가, 빈곤의 항구화와 제도화는 왜 정의롭지 못한가, 승자독식, 폭력적 경쟁주의, 시장원리주의 같은 것은 왜 제어되어야 하는가 같은 문제들을 '문제로서' 파악하고 제어와 해결을 모색하는 일에 먼저 나서야 하는 것은 사실은 부유층과 재벌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보수-우파의 정책 진영입니다. 그러자면 그 진영의 정신 상태가 정상적이어야 하고 "각자 자기돈 자기가 벌어서 쓰는데" 어쩌고저쩌고 하는 수준을 넘어 공존의 정의를 생각할 줄 아는 비판적 차원에 올라 있어야 합니다.
'사유 정지' 상태 조장하는 세 가지 바이러스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여러 차례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강조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 사회의 생각하는 힘은 갈수록 떨어진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막 털어놓고 얘기해도 될까요? 지금 우리 사회는 '사유의 정지'라고 부를 만한 일종의 마비 상태에 빠져 있는 것 같아요. 생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기피하고 혐오하는 것이 사유의 정지입니다. 생각한다는 행위에 모라토리엄을 걸어버리는 거지요.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것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안 한다고? 무슨 소리, 우린 열심히 생각하고 있어, 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생각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사회적 사유'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막 살아도 되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가, 좋은 삶이란 어떤 것인가, 아이들을 이렇게 키워도 되는가-개인의 삶과 집단의 삶을 연결해서 성찰하고 잘못된 것들을 찾아내고, 그래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의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 사회적 사유입니다.
우리가 사회적 사유를 정지 당하는 이유는 뭐냐? 우리는 지금 너나 할 것 없이 사람들을 극단적인 공포, 흥분, 과민 상태로 몰아넣는 몇몇 '바이러스' 군단의 공격에 속절없이 노출되어 있어요.
첫째는 '밀림(密林)주의' 바이러스입니다. 약자도태-승자독식이라는, 허버트 스펜서식 사회다윈주의의 부활이죠. 이 바이러스는 극단적인 '도태의 공포'를 퍼뜨려 사람들을 항구한 불안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생각 좋아하시네, 죽게 생겼는데 생각할 틈이 어디 있어, 생각이 밥 먹여주나"라는 것이 이 바이러스에 공격당한 사람들의 절박하고 절망적인 정신 상태입니다.
둘째는 내가 시장전체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 '시장만능주의' 바이러스입니다. 이제는 시장이 세계를 접수하고 사회를 접수했다, 시장의 논리를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생각은 무슨 생각, 그저 시장이 요구하는 대로 따르고 시장의 신 앞에 부복하자-이런 것이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의 정신 상태입니다.
셋째, '쾌락지상주의' 바이러스입니다. 힘든 일이여 안녕, 고통이여 안녕, 슬픔이여 안녕, 이렇게 노래하는 것이 쾌락지상주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실은 고통이 심한 사회일수록 이런 불가능한 무통증의 쾌락 사회를 그리워하는 바이러스가 창궐합니다.
한국 사회 병들게 하는 지식만능주의
프레시안 : 한 사회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책읽기입니다. 선생님께서 수년째 책읽기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그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책에 대한 한국 사회의 거부감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 특별히 그 원인이라고 지목하시는 게 있습니까? 한국 사회가 책과 멀다면, 그 원인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원인에서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구조적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도정일 : 구조적 문제라? 또 막 털어놓고 얘기하도록 유도하는 질문이네요. 앞의 답변에 나온 세 가지 바이러스가 사실은 구조적 문제들과 연결된 건데, 여기서는 하나만 더 보태어 '착각 바이러스'를 말하고 싶어요. 지식사회, 지식경제, 정보지식 같은 '지식 타령'에서 보듯이 지금 우리 사회를 휘어잡고 있는 지식정보주의 사고구조입니다.
정보도 중요하고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보만 있으면 된다, 지식만 있으면 된다는 건 아니거든요. 정말이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정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정보를 판단하는 비판적 능력, 지식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지식을 생산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사물과 현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고 해석하는 힘, 기존 지식의 틀을 넘어 엉뚱한 생각을 해보는 상상력, 남들이 던지지 않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모색하는 지적 모험, 인간과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는 능력-이런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식을 넘어선 곳에서 작용하는 생각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기성품으로 만들어져 어딘가에 주어져 있다, 인터넷에 있고 위키에 있다, 그것을 사냥하고 검색해서 찾아내기만 하면 된다라고 믿게 합니다. 이건 착각이고 환상이죠. 쉬운 예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답이 지식의 형태로 어디에 주어져 있나요? 정답이 있나요? 아니죠.
지식만능주의는 지식이란 것이 사과나무에 사과 달리듯 거기 어딘가에 달려 있을 것이므로 내가 가서 따기만 하면 된다는 착각과 함께 무슨 수학 문제 풀듯 '정답 찾기'의 환상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정답 찾는 훈련에 몰두하도록 훈육됩니다. 그래서 정답이 없는 문제, 판단과 해석과 의미를 요구하는 문제를 만나면 망연자실 기절하지요.
지식만능주의 풍조가 지금 대학을 장악하고 있어요. 사회는 대학에 대고 지식을 생산해라, 차세대 경제 성장의 동력이 될 새로운 지식을 내놔라고 요구합니다. 지금 같은 지식경제 시대에는 불가피한 요구 같아 보이지요. 그런데 뭐가 문제냐? 새로운 지식을 생산하는 데는 지식만이 아니라 새로운 눈, 상상력, 모험심, 넓은 이해력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지식 생산의 기본 조건이지요.
이 기본 조건은 돌보지 않고 새로운 지식만 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기본기도 안 돼 있고 체력도 없는 축구팀더러 "우승해 와라"고 요구하는 꼴이지요. 지식정보만능주의 같은 집단적 사고가 계량주의 사고와 뭉쳐서 사회 구석구석에 수많은 구조적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학교를 저주하는, 책을 증오하는 아이들
프레시안 : 지난 수년간의 책읽기 운동의 경험을 통해서 특별히 이것이야말로 문제다, 이렇게 인식하신 게 있으십니까?
도정일 : 그 보따리를 풀라 하면 열두 가마니 보태기 네 가마니쯤 될 겁니다. <프레시안>의 귀한 지면을 독점할 수 없으니까 하나만 얘기 하지요. 대한민국에서 아이들은 어떻게 크는가라는 문제입니다.
중·고등학생들, 말하자면 청소년층의 '욕설 문화'를 아십니까? 욕을 내뱉지 않고는 아예 말이란 것이 성립하지 않을 정도로 지금 우리 청소년들은 욕설 문화에 빠져 있습니다. "이 년이 이걸 반찬이라고 쌌어?" 한 중학생이 도시락을 열어보다가 내뱉은 말입니다.
그 '이 년'이 누군지 아세요? 자기 엄마입니다. 또 어떤 아이는 손전화에 '열여덟 년'이라는 번호를 찍어놓고 다니는데, 그 '열여덟 년'이 누군지 아세요? 자기 엄마입니다. 선생님들도 흔히 년/놈으로 불립니다. 이런 아이들에게는 학교가 체벌을 가해야 한다고요? 아서라, 아서지요.
체벌에 앞서 학교가 생각하고 어른 사회가 생각할 것은 아이들을 욕설 문화 속으로 밀어 넣는 학교 교육의 폭력 구조입니다. 왕따, 성폭행, 갈취 같은 학교 폭력처럼 욕설도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런 폭력 문화는 벌주기만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무자비한 '오로지 성적' 경쟁으로 내몰아 서열화하고 줄 세우는 것은 아이들을 파괴하고 교육을 멍들이는 거대한 폭력입니다. 성적이 못한 아이들은 인간 이하로 분류되고 무시당합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들의 인권, 그들의 품위, 그들의 자긍심이 있어요. 그게 무시되면 아이들은 상처 받고, 속으로 울고, 자기도 모르게 망가집니다. 자신감과 자존감을 길러주는 것은 교육이 해야 할 일의 하납니다.
그런데 학교에 가면 '병신된다'일 때 누가 그 학교에 가고 싶을까요? 학교가 우범지대가 되었다고 말하는 학부모가 한둘입니까? 욕설을 포함한 청소년 폭력은 감히 자기네 손으로는 고칠 길 없어 보이는 거대한 폭력 앞에서 힘없는 아이들이 빠져드는 무의식적이고 절망적인 보복의 방식,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고 힘센 폭력을 작은 폭력으로 모방해서 역공을 가하는 거울 반응의 한 형태입니다.
그런데 책 읽기 운동과 이 문제는 무슨 관계인가? 깊은 관계가 있어요. 학교가 기피, 혐오, 저주의 공간이 될 때에는 선생님이 읽으라고 주는 책도 기피와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더구나 학교에서의 독서 교육이란 것이 또 정답 찾기나 성적 올리기 위한 시험 과목의 하나처럼 부과되면 아이들의 눈에 책은 백리 밖으로 내던지고 싶은 '웬수'가 됩니다.
거기서 무슨 즐거운 독서가 가능하고 상상력을 기르는 자유로운 독서 행위가 가능하겠어요? 수학 문제 풀 때는 꼭 상상력이 가동될 필요가 없어요. 그러나 책 읽기는 다릅니다.
책 읽기야말로 '행복'을 찾는 지름길
프레시안 : 책 읽기를 강조하면 이 시대에 무슨 책 읽기냐, 이렇게 비아냥거리는 분위기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책으로 상징되는 문자 권력의 쇠퇴를 얘기하는 목소리도 들리고요. 쌍방향 소통을 얘기하는 인터넷의 확산도 이런 문화를 부추기고 있습니다만….
도정일 : 문자 권력 운운하는 얘기는 문자로 된 책을 읽고 쓴다는 것이 정치 권력과 권위의 한 기초가 되었던 시대에 대한 비판 맥락에서 나왔습니다. 서양의 경우, 경전을 읽고 해석하는 권리-권위가 정치적 지배권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엮여 있었던 중세 체제에 대한 비판의 문맥에서, 그리고 뒤이어 나온 계몽주의 운동에서도 이성중심주의가 중세 체제의 문자 권력에 대항했다는 데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나왔지요. 서양까지 안 가더라도, 우리 역사에서는 조선 시대가 문자 권력 시대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지금이 문자 권력 시대입니까? 지금 권력이 책에서 나오나요? 책 읽고 쓰는 것이 무슨 해석의 독점, 권위의 독점, 권력의 독점입니까? 권위의 경우는, 책이 권위주의 아닌 권위의 한 소스가 될 수도 있지요. 그런데 권위와 권위주의는 전혀 다른 문제죠. 과학 공동체에서 아인슈타인이 누리는 권위는 아인슈타인의 권위주의가 아닙니다.
누가 좋은 책 써서 어떤 권위를 얻었다면 우리가 그를 향해 "당신, 권위주의자야"라고 말하나요? 당신도 권력자가 되었다고 말하나요? 권력을 놓고 말하면, 지금 권력은 책을 떠나 다른 매체로 간 지 오랩니다. "아직도 책이야? 어느 시댄데?"라는 비아냥거림에는 문자 권력에 대한 비판보다는 책이란 것이 이제 아무 권력도 실용성도 실리도 없는 것이라는 생각, 더 정확히는 하찮은 것에 대한 멸시가 더 많이 담겨 있지 않을까요?
만약 문자 권력을 말해야 할 정도로 책이 권력을 가졌다면, 아무도 감히 "아직도 책이야?"라고 말하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모두가, 이선달, 박선달, 김선달 할것없이 동네 건달족 모두가 다투어 책으로 달려들지 않겠어요?
그런데 권력과 유행과 시류, 공리적 이해타산이나 저급한 실용주의 같은 것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동네 건달들은 달려들지 않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책은 되레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었고 책 읽는 행위는 우리 시대의 고귀한 문화적 활동이 되었습니다. 이 문화 자산과 문화 행위의 특징은 그것들이 돈이나 권력보다는 '가치의 추구 행위'를 대표하고 '의미를 만드는 행위'를 대표한다는 점입니다.
가치와 의미? 그래요. 지금은 돈이 가치의 전부를 표현하고 의미의 전부를 만드는 시대처럼 보이지만 사실 속내를 들여다보면 지금도 중요한 본질적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지 않고 소중한 의미는 돈으로 생산되지 않습니다. 한 예로, 사회봉사 활동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그들은 돈을 받지 않고, 돈을 주면 버럭 화를 냅니다. 봉사활동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라는 직관을 그들은 갖고 있어요.
이런 가치 추구가 사실은 행복의 지름길입니다. 행복은 "내가 행복을 찾아야 하는데" 하고 쫒아 다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에게 선물처럼 찾아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학생들에게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가치를 추구하자, 그러면 행복이란 녀석이 웃으며 따라오지 않겠는가고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의미, 자기 삶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할 때는 자살을 생각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무가치와 무의미 상태에서는 그가 전혀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손문상) |
누가 계몽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나?
프레시안 : 선생님께서는 여전히 계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에 속합니다. 대중은 물론이고 지식인조차도 계몽에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도정일 : 제가 계몽주의자인가요? 어떤 점에서는 그럴지 몰라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첫째, 인간은 누구나 배워야 하고 노상 깨쳐야 하는 존재지요. 누굴 가르치려 드느냐고 호통 치는 사람은 호통 치다가도 속으로는 "하긴 나도 배워야 하는 존재지"라고 잠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계몽의 대상입니다. 이 부분에는 누구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남을 가르치려 들고 '지도'하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독재, 전체주의, 망종의 사회주의, 권위주의는 이런 종류의 덜 떨어진 계몽 집단을 대표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늘 배우고 깨치려는 열린 자세, 겸허한 자세도 필요하죠. "이 책 너무 어렵게 썼군. 대학 나온 나도 읽기 어렵다면 이건 잘못된 책이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책이 쓸데없이 난삽할 때도 있지만 읽는 이의 이해력이 책의 수준을 못 따라 갈 때도 있지요. 좀 어려운 책을 읽는 것이 누워 떡먹기 같은 책 읽기보다는 더 즐거운 도전이지요. 사실, 대학생에게라면 전혀 어려울 수 없는 책도 어렵다고 비명 올리는 학생들이 있어요. 독서 빈곤에서 오는 능력 결핍의 경우지요. 그런 비명이야말로 빈곤이 일으키는 알레르기 반응입니다.
둘째, 저는 계몽주의 철학으로 대표되는 근대성의 정신적 유산을 높이 평가합니다. 근대성에 비판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소중하게 계승해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영어 속담에 "목욕물 버리면서 아이까지 버린다"는 게 있지요?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운다"고 우리 속담은 말합니다.
버릴 수 없는 유산을 과거 유산이라는 이유만으로 내던지는 것은 바보의 특별한 능력입니다. 보편 인권, 자유, 평등, 민주주의, 비판 정신, 정교 분리, 법치 같은 근대성의 유산은 여전히 우리에게 소중한 자산입니다. 왜 소중하냐고요? 그런 걸 버리면 우리는 인류가 애써 도망쳐 나온 야만의 체제 속으로 다시 뒷걸음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재갈 물린 20대…스스로 벗어던져라
프레시안 : 그나마 30대 이상은 책 읽기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20대 이하의 세대는 더욱더 책과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그들이 처한 '재갈을 물린 듯한' 상황이 이런 분위기를 더욱더 부추깁니다. 오랫동안 대학에서 20대를 만나오셨을 터인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지금의 20대 청춘들을 두고 제가 어디선가 '재갈물린 세대'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제가 말한 '재갈'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의 젊은 세대가 처한 곤경(사회 진입 장벽, 88만 원, 고용 불안)이라는 재갈인데 이 재갈은 선택된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안겨진 난국, 말하자면 '물려진 재갈'이지요. 선택된 것이 아니지만 벗어던지기도 어려운 재갈입니다.
기성세대는 왜 이런 재갈이 젊은 세대에 물려졌는가, 그걸 제거할 방법은 무엇인가, 사회 전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책임 있게 연구해야 합니다. 정책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요. 취업난, 고용불안, 비정규직만 해도 그렇죠. 입으로만 떠들고 통계 보여주고, 그리고 그냥 넘어 갑니다. 마치 그게 불가항력의 자연재해 같은 것이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또 다른 재갈도 있습니다. 지금의 20대 세대가 의식적이건 아니건 스스로 빠져들고 동의하고 즐기는 어떤 문화, 습관, 이데올로기, 정신 상태로서의 재갈입니다. 그게 뭐냐고요? 몇 가지만 말하죠. 쉽고 힘 안 드는 일만 찾아다니고자 하는 안이성, 의존주의("엄마, 어떻게 좀 해봐"), 디지털 기술 환경에서 길든 속도주의와 편이성에의 정신없는 탐닉, 집중력 결핍, 비판적 사고력과 자율적 판단력의 약화, 시장만능주의에의 좀비적 순응, 세대 단절의 충동(자기 세대의 유행에는 병적으로 민감하고 수평 소통은 잘 하면서 중요한 역사 맥락에는 등 돌리고 과거와의 소통은 거부하기) 등입니다.
이런 정신 상태와 능력 결손은 한 세대를 멍들게 하는 치명적인 약점들이죠. 이런 약점들은 20대 세대가 벗어던지자면 벗어던질 수도 있는 재갈입니다. 어떻게? 벗어던지자면 우선 약점을 알고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20대 세대에 이런 문제점들을 기탄없이 말해주어야 합니다. 잘 나서 그런 게 아니죠. 기성세대는 결코 잘난 세대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어느 세대이건 간에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의 성장방식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의 20대들 가운데 상당수는 책을 멀리할 뿐 아니라 책을 구닥다리로 알고 책읽기를 경멸합니다. 책을 읽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읽지 않는 것을 되레 자랑하지요. 이 디지털 시대에 책을 들고 다닌다는 것은 자기네 세대의 정체성에 반하는 구세대적 행위라고 여깁니다. 모든 필요한 지식 정보는 인터넷에 다 있다, 그 지식정보는 디지털 기기로 언제든 쉽게 빠르게 공짜로 접근할 수 있다, 왜 책이 필요하냐-이런 식의 디지털 기술만능주의가 상당수 젊은이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게 얼마나 큰 착각인가를 알고 그 착각을 벗어던지는 일이 시급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려운 문젭니다. 디지털 매체의 편이성에 한번 중독되면 거기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책은 느린 매체이고 모든 독서는 '느린 독서'인데 지금의 청소년 세대는 그들의 속도감에 반하는 이 느림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들은 '3초 문화'에 흠뻑 젖어 있고 집중력은 5분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인터넷으로 이 주소 저 주소 옮겨 다니며 읽을 만한 기사가 있는지 검색하는 데는 3초면 되고 쪼가리 글 읽는 데는 5분이면 됩니다.
좀 긴 호흡의 글, 집중해야 할 글, 15분 이상의 체류시간이 걸리는 글은 인터넷 문화에서는 '시체'에 해당합니다. 이 '3초5분' 세대에게 책읽기란 지루한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 이상의 고통스런 일입니다. 지금 이 인터뷰를 그들이 읽어낼 수 있을까요? 기대하지 마세요.
프레시안 : 그들을 책과 가깝게 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요? 대학, 언론 등 기존의 제도들이 거기 기여하는 역할이 있습니까?
도정일 : 책을 가까이 하는 데는 독서의 일상화, 생활화, 습관화가 중요하고, 즐거움의 경험이 결정적입니다. 독서의 즐거움을 직접 경험하는 일, 그 이상의 길은 없는 것 같아요. 책을 싫어하고 책을 못 읽는 대학 신입생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책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한 적이 없거나 독서 습관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다는 중대한 결손을 안고 있습니다. 늦었지만 대학 들어와서부터라도 그 습관을 몸에 붙일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지금 전국의 대학들은 교양 과정에서 '독서와 토론'이니 '사고와 표현'이니 하는 공통 과목들을 두고 학생들에게 책을 읽힙니다. 지식 전달 이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 대학 교육의 핵심 기능이라면, 독서 토론 과목을 두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거듭거듭 강조하는 바이지만,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 데는 책 이상의 매체가 없습니다. 학내 독서클럽, 독서토론대회 같은 것을 활성화하기 위해 애쓰는 대학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에서의 독서가 교양 과정에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죠. 인문·사회과학의 경우 교양과 전공을 통틀어 책 읽고 생각하고 해석하고 토론하는 것이 대학 교육의 정수입니다.
언론 매체들의 기여도 상당합니다. 지금 신문들은 거의 모두 '북섹션'을 두고 있습니다. 티브이, 라디오, 인터넷 매체들도 그 나름의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책 안 읽는 사회라고들 하지만, 사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데만은 공통의 관심을 보이는 것이 또 우리 사회에요. 덕분에 우리가 아주 깡통 사회로 굴러 떨어질 위험을 비켜가고 있는지도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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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 중요한 '사회 안전망'
프레시안 : 책 읽는 문화의 확산을 위해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도정일 : 독서는 단순한 교양 쌓기를 넘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중요한 행위라는 생각, 이 행위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가장 확실하고 돈 적게 드는 길의 하나라는 자신감, 자기 변화와 도덕적 상승이 독서를 통해 가장 잘 이루어진다는 경험-이런 자신감과 경험이 사회적 지혜가 되어 널리 퍼졌으면 합니다.
물론 이런 지혜는 당장 시급한 일 같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아요. 사회 안전망의 구축은 우리 사회의 긴요한 일의 하나입니다. 독서는 그 자체로 사회 안전망입니다. 이 부분 생각해본 일 있으세요? 사회에 물질적 제도적 안전망이 필요하다면, 사람들의 정신적 심리적 안전망을 구축하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필요합니다.
독서는 그런 심리적 안전망 구축의 한 방법입니다. 독서를 통해 느티나무처럼 내부가 튼튼해진 사람은 웬만한 일에 허둥대지 않고 바람 앞에 우왕좌왕 하지 않아요. 위기를 관리할 내공이 생겨있는 겁니다. 개인적으로만 그런 것이 아니죠. 독서를 통해 만들어진 모임, 도서관, 친목 클럽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 친밀감, 배려, 돌봄, 소통의 기회를 증진시켜 소통의 공동체를 만듭니다.
사회과학이 '사회자본'이라 부르는 무형의 자본을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은 도서관 운동 하면서 도서관이 사회 안전망의 하나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폈어요. 도서관이라는 인프라만이 아니라 그 토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동체'도 안전망이라는 뜻이지요.
중등 교육 개혁은 시급한 일 중에서도 시급한 일입니다. 아이들을 오로지 성적 경쟁으로만 내몰지 않고 스트레스 없이 자유롭게 숨 쉴 시간, 꿈꾸고 몽상할 시간, 여러 재능의 분출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체제의 실현이 너무도 시급합니다. 줄을 세우더라도 꼭 학과 성적이라는 하나의 줄만 있어야 합니까? 줄은 여러 개여야 하고 이 줄에서 꼴찌인 아이가 저 줄에 가면 첫째다, 사람의 능력은 한 가지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아이들이 모두 제 각각 잘 하는 부분을 인정받아 불만과 폭력으로 빠지지 않아도 되는 명랑 학교, 행복 학교 만들기-이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까?
시골 가 보세요. 그런 행복한 초등학교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중·고등학교라 해서 불가능한 일이 아니죠. 물론 작년부터는 시골 초등학교들도 학교 성적 줄 세우기 때문에 교장들이 전전긍긍하면서 "책 읽힐 틈이 없어요"라거나 과목 성적 올리기라는 실적주의에 매달려 교육을 팽개치는 일이 많아졌지만.
젊은 세대 좀비로 만드는데 동참하는 언론
프레시안 : 지식인, 출판계, 언론계에도 쓴 소리를 하시고 싶으신 게 있을 것 같습니다.
도정일 : 나는 본디 쓴 소리 전문가인데 오늘은 이미 쓴 소리를 많이 했으니까 좀 아껴두면 안 될까요? 꼭 세 마디만 하지요. 대중 언론은 젊은 세대를 영혼 없는 좀비형 소비자 군단으로 만들려는 시장의 기획에 편승해서 "너희들 잘 한다, 잘 한다"며 그 세대를 향한 아첨떨기를 열심히 계속하고 있습니다.
출판계는 독서 인구의 지속적 성장 여부에 그 미래가 달려 있는데, 업계 사람들은 그 인구 키우는 일에 대체로 무관심합니다. 지식인들은 어떤 삶이 좋은 삶이고 어떤 사회가 사람 살만한 사회인가라는 큰 질문을 머리에 좀 넣고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프레시안 : 지금 책읽기 운동과 관련해 새롭게 계획하시는 일이 있습니까?
도정일 : 몇 가지 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에 그림책을 보내고 그 그림책의 작가가 가서 아이들과 즐겁게 만나는 '책날개' 사업, 한 권의 책을 놓고 토론하는 시민 독서 토론의 정례화, 대학 교양 과정에서의 독서의 문제를 연구하는 일, 벽지 이주여성 가정을 찾아가 시무룩한 침묵의 아이들을 활기찬 아이로 바꿔내 보려는 다문화 북스타트-이런 일들이 기획되거나 새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서평 매체…그 사회의 수준을 말한다
프레시안 : 정년을 하신 후에도 정력적인 활동을 전개 중이십니다. 사회운동과는 별개로 정리하시는 지적인 작업이 있으십니까?
도정일 : 몇 년간 계속 공수표로 끝나기만 하는 작업이 다수 있어요. 곧 낸다 낸다 큰 소리 쳐놓고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책들을 어떻게 '탄생'시킬 수 있을까, 요즘 그 문제로 고민이 많습니다. 주로 인문학 분야의 책들입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얘긴데, 우리 집 컴퓨터에는 제목과 자료 노트만 있고 원고는 없는 책 저술 계획이 스무 개 넘게 있습니다. 다 쓰자면 100년은 걸릴 겁니다. 지난 10년간 '책읽는사회' 일에 많은 시간을 뺏겼는데 그걸 어디서 벌충하지요? 전 제가 한 200년은 사는 줄 알았어요. 바보 이반 이상의 '바보 도반'입니다.
프레시안 : <프레시안>에서 새로운 서평 매체를 준비 중입니다. 이런 서평 매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 특별히 기대하는 역할이 있습니까?
도정일 : 용기 있고 의미 있는 결정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에 대중적 서평 문화가 자리 잡기를 고대해온 사람입니다. 신뢰할 만한 서평 매체가 있는가 없는가, 이것이 한 사회의 문화적 역량과 정신적 활력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지난 40년의 우리 문화사를 돌아보면, 이런저런 오프라인 서평지들이 떴다 지고 떴다 지곤 했는데 지금의 매체 환경은 온라인 서평 매체의 '기술적' 가능성을 크게 높여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술적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만으로 낙관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매체기술은 기술이고 콘텐츠는 콘텐츠지요. 양자는 거의 완전히 별개 차원의 문젭니다. 우리 사회는 기술만 있으면 된다, 기술 있으면 콘텐츠는 자동으로 따라온다고 믿는 황당한 기술주의적 사고에 아직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큰 착각이죠. 그래서 콘텐츠 만드는 일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서평은 처음부터 끝까지 해석-사유-판단의 콘텐츠 생산 작업입니다. 지금처럼 정보 홍수에 사람들이 떠밀려 가는 시대에는 정보 지식의 신뢰도와 품질을 평가하고 "똥이냐 된장이냐"(이런 용어, 미안합니다)를 가리는 2차적 판단 정보, 곧 '메타 정보'가 너무도 필요합니다. 그 메타 정보에서부터 콘텐츠라 부를만한 것이 생산되지요.
서평의 메타 정보에는 해석과 사유가 포함됩니다. 해석은 '의미'를 생산하고, 사유는 질문, 대화, 토론이라는 정신 작업을 통해 '생각'이라는 콘텐츠를 생산합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절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콘텐츠들이지요. 프레시안 서평 매체가 이런 콘텐츠 생산을 통해 생각과 대화와 토론이 왕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대화, 토론, 생각을 촉발하는 데는 사실 책을 능가할 매체가 없습니다. 프레시안 서평이 저자의 생각, 서평자의 생각, 독자의 생각이 만나는 소통과 토론의 공동체를 일굴 수 있다면 이건 해방 이후 가장 의미 있는 정신사적 사회사적 사건이 될 겁니다.
한 가지 귀띔할 것이 있어요. 서평은 기성 매체에서 열독률이 낮은 비인기 지면으로 알려져 있어요. 서평의 인상을 바꾸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그냥 책 얘기를 하는 곳이 아니라 흥미진진한 '아이디어'를 내놓고 얘기하는 것이 서평이라는 느낌을 주어야 합니다. 실제로 서평은 그런 것이고요. 책은 지루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아이디어'라면 눈이 반짝 합니다. 아이디어는 돈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가?
어쨌건 서평에는 아이디어의 사건화, 다시 말해 생각-느낌-주장의 드라마틱한 제시가 필요합니다. 생각의 맥락을 보여주고 다른 생각들과 비교대조하고 재미난 일화를 넣어주고, 그리고 그 아이디어나 생각이 지금 우리의 삶, 사회, 관심사에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짚어주는 거지요. 적실성의 제시입니다. 서평 한 꼭지에서 독자가 얻어가는 것이 많을수록 좋습니다.
또 한 가지, 대학생들을 서평 독자로 끌어들이십시오. 이건 좀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20대 청년기 사람들은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시민으로 자랄 책임이 있습니다. 대학 교육, 강의, 계획서가 프레시안 서평과 연결되게 하고, 교양과정의 '글쓰기'를 서평 훈련으로 시작하게 하는 기획 등을 생각해볼 만합니다.
대학마다 신입생들 글쓰기 훈련을 시키느라 진땀 흘리는데, 학부생 글쓰기 훈련은 북리포트 형식의 글쓰기를 통해 효과적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학생들도 뭘 쓸까 글감 찾느라 절절 맬 필요가 없지요. 책 한 권에는 글감이 넘쳐납니다. 일석삼조에요. 북리포트 쓰자면 책을 읽게 되고, 쓰다보면 글 솜씨 늘어나고, 논지를 요약하고 재조직하는 사이에 생각하는 힘도 불쑥불쑥 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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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니다"
프레시안 : 갈수록 한국 사회에서 희망의 동력을 찾기 어렵다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떠십니까?
도정일 : 민주주의가 왜 중요하냐면, 그게 어떤 체제보다도 희망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절망을 제어합니다. '희망 없다'가 절망이고 절망은 지옥의 조건이지요. 지옥의 조건을 거부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왜 그런가? 틀린 것, 잘못된 것,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들을 바꿔내고 고쳐낼 가능성이 없어 보일 때 사회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 틀린 것들을 바꾸고 고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간판만으로는 일이 안됩니다. 문제적 사회 현실이 있을 때 그것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바꾸어낼 것을 요구하는 시민이 있어야 변화가 가능합니다. 시민의 민주적 역량, 앞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문화라고 부른 것이 그래서 결정적으로 중요하지요. 변화의 가능성이 희망인데, 이 희망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 아닙니다. 시민이, 시민 자신이 만들어 내야 하는 것, 그가 열어야 하는 것이 희망입니다. 말하자면 깨어 있는 시민이 희망의 동력이지요. 저는 우리에게 이 동력이 있다고 믿습니다.
프레시안 : 한국 사회의 미래를 좀 더 밝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가장 신경을 써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도정일 : 사람 잘 키우는 일, 좋은 삶의 비전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 사람이 살만한 사회의 토대를 부단히 닦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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