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대선 당시 일어난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사태에 대해 국가수반으로서 사과해야 한다는 야당의 요구에 대해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일축했다. 국정원 개혁 방안에 대해서는 '셀프 개혁'을 고수했고, 채동욱 검찰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감찰 지시는 "잘한 것"이라고 했다. 야당은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민주주의 회복을 기대하는 것은 무망(無望)하다"고 탄식하며 천막으로 돌아갔다. 정국 경색은 길어질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대선개입, 지난 정부 일 사과 요구는 무리"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여야 대표들과의 3자회담에서 던진 메시지는 크게 3가지다. 첫째,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지난 정부에서 일어난 일"이며 "내가 국정원에 지시할 위치가 아니었다. 도움 받은 게 없다"고 한 부분이다. 이는 앞서 밝힌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다. 그러면서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할 의사가 있었다면 (2007년) 정상회담 회의록을 대선 때 공개했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 책임자 처벌과 관련해서는 "법원이 조사해서 결과가 나오면 그 사람에게 책임을 묻겠다. 상응하는 조치를 하겠다"며 '재판 결과가 나와야만 책임자를 문책하겠다'는 대답을 되풀이했다.
야당이 요구해 온 남재준 국정원장의 해임에 대해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 인적 청산이라는 것을 정권 바뀔 때마다 해 봤는데 효과가 없었다"며 거부 입장을 밝혔다. 야당이 남 원장의 사퇴를 당론으로 정하게 된 계기인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와 관련해서는 "불법으로 공개한 게 아니라 합법적 절차로 공개한 것으로 국정원으로부터 보고받았다"고 했다. 남 원장이 '사실 제가 불법으로 그랬습니다'라고 보고하지 않으면 해임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다.
'셀프 개혁' 방침 역시 그대로였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국정원이) 국회 정보위에 보고하면 여야가 논의했으면 좋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국정원이 만든) 개혁안을 금방 공개할 테니 그것을 보고 말해 달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박 대통령은 김 대표가 전달한 민주당의 국정원 개혁 당론방안에 대해서도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논의하는 주체가 국회인 것도, 그 내용에서 국내 파트 분리와 수사권 이관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김 대표가 전달한 민주당의 국정원 개혁안은 기관 명칭을 통일해외정보원으로 변경하고,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되 해외정보수집 기능을 강화하며, 대공수사권은 검찰과 경찰로 이관하는 것이 골자다. 특히 김 대표는 민주당의 당론 개혁안이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2003년, 2006년) 한나라당이 주장했던 국정원 개혁 방안과 유사함을 강조하며 박 대통령을 압박했지만 박 대통령은 "그러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는 왜 국정원 개혁을 하지 않았나"고 응수했다. '너희들도 안 했으니 나도 안 하겠다'는 반응이거나, 과거 한나라당 당론 방침이 잘못됐음을 시인한 것이거나, 둘 중 하나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이에 대해 회담 직후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정답'은 하나도 없었다"고 강한 불쾌감을 표했다. 그간 김 대표는 나름의 정치적 고려도 담아 입장을 내 왔다. 그는 앞서 "'박근혜 당시 대선후보가 지시했으므로 박 대통령이 사과하라'는 것이 아니다"(13일 최고위원회의)라거나 "박 대통령이 만약 '유감스러운 일들이 있기는 했으되, 내가 집권 기간 동안에 민주주의를 더욱 굳건하게 반드시 제대로 세워놓겠다'고 얘기하면 나라에 얼마나 좋은 일이겠느냐"(9일, 안철수 의원 접견시)라고 청와대에 '출구'를 열어 주면서도 박 대통령의 사과와 남 원장 해임이라는 요구는 굽힐 수 없음을 천명했었다.
청와대도 이같은 야당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나, 결국 박 대통령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서 정국 정상화에 대한 대통령의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 여론이 일 것으로 보인다. 결국 '국정원 사태'라는 의제에 포괄되는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국가 최고지도자의 사과,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남재준 원장 해임, △국회 주도의 국정원 개혁 및 그 구체적 내용 등에 대해 박 대통령은 기존의 입장을 철벽같이 고수한 셈이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국회에서 열린 여야 대표와의 3자회담을 앞두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채동욱 감찰, 법무장관이 할일 한 것…잘했다"
둘째 이슈는 현재 여론의 가장 첨예한 관심이 몰리는 이슈인 채동욱 검찰총장 사퇴에 대한 메시지였다. 박 대통령은 채 총장에 대한 법무부의 감찰을 놓고 "법무부 장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라며 "감찰권을 행사한 것은 합법적 근거를 갖고 있고, 진실을 밝힌다는 차원에서 잘한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은 채 총장 사퇴의 직접 배경이 된 법무부의 감찰 지시에 대해 청와대의 배후 개입이 있었을 것으로 의심해 왔다. 민주당 박지원 전 원내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회의장에서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이중희 민정비서관의 주도로 검찰이 지난 한 달간 채 총장을 감찰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관련기사 보기)
따라서 야당은 황교안 법무부 장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 홍경식 청와대 민정수석이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15일, 김관영 수석대변인)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전혀 근거 없는 정략적 정치공세"라며 강하게 부인했고 오히려 "채 총장이 언론에 제기된 의혹에 대해 적극적 해명을 하지 않고 의혹을 밝히는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었던 마당"이라며 "의혹을 해명하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을 적극적으로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음으로 해서 의혹이 더 커진 점이 안타깝다"고 주장했다. 채 총장은 친자 여부를 가리기 위한 유전자 감식에 응하겠다고 했었다.
김한길 대표가 이를 지적하며 "유전자 검사도 받겠다고 당사자가 얘기했는데 이렇게 사퇴시킬 수 있느냐"고 비판하자 박 대통령은 "그래서 사표 안 받은 거 아니냐"며 "진상조사가 끝날 때까지는 사표 수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채동욱 총장 문제에 대해서 역시 박 대통령의 기대대로 "오해가 풀리기"보다는 오히려 야당의 장외투쟁 요구 사항에 한 줄을 추가하게 된 모양새다.
3자회담에서 거론된 의제 중 마지막 남은 셋째는 이른바 '민생' 문제다. 이 부분 역시 이견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야당이 현재 민생 문제로 청와대 및 여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
결국 대통령이 야당 대표와 일껏 마주앉고도 기존 입장에서 무엇 하나 양보하지 않음에 따라 회담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지도력에는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날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비서실장인 여상규 의원이 3자회담 결과를 브리핑하면서 회담 말미 황 대표가 "김한길 대표의 여러 질문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적절한 해명을 했으니, 야당도 이제 정부와 여당에 '선물'을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고 전하자, 브리핑을 마치고 나가는 여 의원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양보한 건 어떤 부분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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