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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현 "北에 격과 진정성 바라는 건 순진한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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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세현 "北에 격과 진정성 바라는 건 순진한 환상"

[긴급 인터뷰] "이제 누가 유연성 발휘하느냐가 문제"

12일로 예정됐던 남북 당국회담이 회담 대표의 격(格) 문제를 놓고 벌인 실랑이 끝에 좌초되는 초유의 일이 일어났다. 남측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의 회담 상대로 김양건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장(당 비서국 대남담당 비서 겸 정치국 후보위원, 아태평화위 위원장)을 요구했으나, 북측이 김 부장을 파견할 것 같지 않자 김남식 통일부 차관으로 우리측 수석대표의 급을 한 단계 낮췄다.

반면 북측은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서기국 국장을 '상(相, 북한의 장관에 해당) 급'이라고 주장하며 강 국장과 류 장관이 마주앉아야 한다고 요구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표단 파견을 보류'하겠다고 상을 걷어찼다. 이같은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배경은 뭘까? 남북관계에는 어떤 파장을 미칠까? 대화 재개 가능성은?

<프레시안>은 최고의 남북관계 전문가로 꼽히는 정세현 원광대 총장(전 통일부 장관)을 긴급 전화 인터뷰했다. 정 전 장관은 남북 모두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특히 청와대의 경직된 사고를 비판했다. 남북관계에서 '진정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요구라면서 냉전 시기 대(對)소련 관계에 대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다음은 정 전 정관과의 인터뷰 내용을 내용에 따라 재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자료사진).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남북회담이 '격' 문제로 틀어졌다. 회담이 잘 되기를 바랐던 이들의 실망이 크다.

정세현 : 남북 양쪽 다 문제가 있다고 본다. 먼저 남쪽부터 보면, 북한의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은 남측 통일부 장관의 정확한 카운터파트(상대)는 아니다. 김양건 부장을 찍어서 내보내라는 것은 북한의 기구, 조직, 당-국가 관계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통전부는 1921년 3차 코민테른에서 채택된 레닌의 <통일전선 테제>에 따라 친공세력을 늘리고 관리하는 공작을 하는 부서이고, 그 산하에 조평통, 범민련 등을 두고 있다.

또 공산국가는 당이 국가를 운영하기 때문에, 당 비서는 내각 장관보다 격이 높은 셈이다. 북한은 스스로 당 비서를 최소한 부총리급이라 생각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당 중앙위 부부장이 내각에 나가면 부장(장관)이 되는 식이다. 실제로 1994년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준비할 때 남측 이홍구 통일부총리와 북측 김용순 당 대남비서 겸 통전부장이 만났는데, 김용순이 '우리 부총리끼리…' 이러면서 부총리 행세를 했다.

지금 김양건의 직책도 대남비서 겸 통전부장이다. 대남비서는 공식적인 남북관계를 관장하지만 은밀한 대남공작도 다 총괄한다. 친북통일전선 구축 및 관리 차원에서 재미동포, 재일동포 문제까지 같이 관리한다. 재외동포위원회라는 것이 그 산하 단체다. 한국으로 치면 국정원의 대북공작 및 해외정보 수집 파트에다가,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측근 참모라는 점에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나 외교안보수석까지 겸하는 사람이다. 조평통을 관리하는 것은 그 업무 중의 극히 일부다. 북한은 내각에 통일 담당 부서가 없어서 당 외곽조직인 조평통을 통일부의 상대라고 하고 있지 않나.

물론 그렇다고 강지영 조평통 서기국장이 통일장관과 격이 맞는 것도 아니다. 강지영은 옛날에 몇 번 이름이 나왔으나 요즘에는 보이지 않다가 서기국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는데, 조평통 서기국장이 장관급인지는 사람에 따라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과거 1990년 남북 총리급회담 북측 대표단의 일원이엇던 안병수(또는 안경호) 당시 조평통 서기국장은 당시 한국 언론에서도 장관급으로 평가했다. 그런데 강지영이라는 무명인사, 1989년 임수경 의원이 방북했을 때 안내했다는 그런 사람을 내놓은 것은 북한도 잘못한 거다.

내 생각에는, 전에 장관급 회담 대표로 몇 번 나왔던 김령성 6.15 북측위 위원장에게 내각 참사라는 타이틀을 다시 줘서 내보내거나 원동연 통전부 부부장을 '내각 책임참사'라고 보냈으면 그들의 나이도 있고 해서 조용히 지나갔을 수도 있다고 본다. 그런데 북한이 강지영을, 그것도 국가 기구의 직책인 내각 책임 참사도 아닌 당 외곽단체 조평통의 서기국장 직함으로 내놓으니까 (한국 정부로서는) 받기 어려웠던 면이 있다.

프레시안 : 결국 회담이 틀어진 것은 남북 모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다면, 다음 문제는 어떻게 푸는가 아니겠는가?

정세현 : 과거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마의 제국'이라고 하면서도, 그들이 바로 악마의 제국이기 때문에 꾸준히 대화를 해서 관리를 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레이건이 소련에 '진정성'을 요구했을까? 악마의 제국에 무슨 진정성이 있겠어? (웃음)

한국 정부는 회담 대표 격을 맞춰 달라는 우리 쪽의 요구를 북한이 들어 주지 않는다면서 북한의 진정성에 문제가 있다느니 신뢰에 문제가 있다느니 했다. 남북관계가 서로 신뢰하는 친구 사이라면 진정성을 탓할 수도 있겠지만 원래 남북관계는 그런 관계가 아니지 않는가? 솔직히 말해서 어떻게든 서로 이기려고 하고 필요하면 뒤통수도 때리려는 그런 관계 아닌가? 그런 상대한테 만나기 전부터 신뢰를 기대하고 진정성을 요구하다니….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대화를 통해 불신을 줄여 나가고 신뢰를 구축해 나가야 하는 관계가 바로 남북관계다. 만나기도 전에, 그리고 처음부터 진정성을 운운하는 것은 남북관계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낭만적 사고다. 마치 '민족끼리 합치기만 하면 통일은 곧 된다'는 낭만적인 통일 환상론자와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원래 북한은 두 얼굴의 존재 아닌가?. 협력해야 할 동포이면서 동시에 군사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상대다. 그런데 무슨 진정성이냐? 순진한 얘기다.

프레시안 : 한국 정부의 유연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지적 같다. 그런데 현재까지 보면 청와대를 정점으로 정부는 강경한 입장이다. "굴욕과 굴종을 강요"했다느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느니 하는 얘기가 회담 무산 이후 청와대에서 나온 얘기다.

정세현 : 아마 통일부에서는 통전부장이 회담 상대로 안 나오리란 건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청와대에서 누군가 '통전부장이 나와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 돼 버린 것 같다. 대통령의 참모들이 잘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청와대가 회담 상대 같은 세부적인 부분까지 지침을 내리기 시작하면 통일부는 일을 못한다. 이렇게 재량권을 안 주면 대화 판에 나가서도 결정권이 없다. 그러면서 북측에는 무슨 '결정권 있는 당국자'를 보내라고 하나?

'굴욕과 굴종을 강요한다'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북한이 무슨 강국이나 되는가? 북한이 그러는건 고집 피우는 것, 떼 쓰는 것에 불과하다. 북한의 입장을 받아주는 것이 무슨 굴욕이고 굴종인가? 자기비하적인 표현이다.

그리고 어차피 북측 단장으로 김양건이 오더라도 그 역시 현장에서 결정은 못 한다. 합의문 내용 같은 걸 놓고 우리가 결국 대통령 결심을 받아야 하듯이 북측의 누가 와도 김정은의 허락이 없으면 단어 하나 못 고친다. 어제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이 '격' 얘기를 하면서 북한이 유럽연합(EU)하고 대화할 때는 북한 국장-상대방 과장하고도 하면서 왜 유독 우리만 낮은 급의 사람을 보내려고 하냐고 했는데, 반대 경우도 있다.

2003년 4월 23일 베이징(北京)에서 북미중 3자회담이 열렸을 때 미국 대표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였는데 북한 측 대표는 리근 외무성 미국국(局) 부국장이었다.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면 북한 외무상이나 제1부상 정도는 돼야 '격'이 맞는 것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건 앉아 있는 사람이 누구냐가 아니라 그 사람을 통해 북한 지도부와 대화를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미국은 그런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지 않았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결국 리근-켈리가 마주 앉았던 3자회담의 연장선상에서 6자회담이 성사되지 않았나.

협상에 나온 사람은 북한의 입장을 전달하는 통로이지, 누가 와도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 '격' 같은 것은 따지는 게 아니다. 김양건이 오나, 원동연이나 강지영이 오나 같다는 말이다. 말이 나온 김에, 격을 따지려면 처음부터 따지든가 했어야지, 그러면 실무접촉에서 저쪽은 김성혜 부장이 나왔는데 이쪽은 천해성 통일정책실장이 나간 건 '격'이 맞나? 통일부 정책실장은 차관보급인데 조평통 부장급과 격이 맞았던가?

프레시안 : 통일부는 당국회담을 살려 보려는 노력이 있는지, 접촉이 이뤄지고 있는지 '노 코멘트' 상태다. 앞으로 풀려 나갈 실마리가 있을까?

정세현 : '격'을 문제삼아 회담이 보류됐으니, 이렇게 되면 류길재-김양건 회담은 앞으로도 (북측의 반대로) 어렵다고 봐야 한다. 김남식-강지영 회담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 대안은 뭐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급에서 하는 수밖에 없다. 직급으로 시비하다 이렇게 됐으니 그런 시비가 없는 급이라면 총리급 회담이나 정상회담 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총리급 회담을 할 수 있는 상황인가? 아니다. 결국 유연성을 누가 먼저 발휘하느냐 하는 문제가 됐다.

북한은 대표단 파견을 '보류' 하겠다고 했다. 기회를 보겠다는 얘기다. 이번 회담이 보류된 것은 우리 정부의 형식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쪽의 정세판단 때문일 수도 있다. 당초 북한은 미중 정상회담에 기대를 걸고 미중 정상회담 직전에 남북회담을 제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중회담 결과에서 북미 대화의 개연성이 보이지 않으니 북한으로선 '남북대화를 해 봐야 북미 접촉을 성사시키는데 약발이 없겠구나'라고 판단하고 접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즉 우리가 형식 문제를 제기하니 북측도 그것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빠져나간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아마 북측의 의도는 처음에 남북 당국회담을 북미대화를 촉구하는 토대로 삼으려는 것이었으리라 본다. 이렇게 되면 한중 정상회담 이후 정세에 변화가 있어야만 남북대화의 모멘텀이 다시 생길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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