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의원의 측근이 말하길 박근혜 의원도 '피해자'란다. 일견 일리있어 보인다. 박 의원의 정치적 정체성은 '차떼기 정당'의 안티테제다. 이번 사건은 그걸 부정하는 사건이다. 또 비대위원장으로서 박 의원이 얼마나 결사적으로 혁신하고 바꾸려는 척 했나. 그런데 말짱 도루묵이다. 얼치기 한 사람 때문에 이런 정체성과 노력이 허사가 됐으니 그 '멘붕'이야 충분히 이해 간다. 그러나 만 보를 양보해도 '피해자'란 말은 어이없는 억지다. 그야말로 말 같잖은 소리, 어불성설이다. 그렇다면 가족·측근 비리로 사과까지 한 이명박 대통령도 피해자다. 피해자는 국민이다.
위기보다 위기의식이 없는 게 더 큰 문제라고 했다. 박 의원이 자신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이 문제의 핵심은 간명하다. 박 의원이 잘못한 것이고, 그가 책임져야 한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다. 공천 당시 제보하지 않은 걸 탓하면서 "검찰에서 한 점 의혹 없이 밝혀야 할 문제"라고 하는 건 오만이다. 마지못해 "국민께 송구"하다고 했으나 "결론은 아무도 모른다"는 말에선 뇌물공천 자체를 인정하고 않겠다는 독선마저 엿보인다. 어쨌든 마치 자신과는 상관없다는 제3자 스탠스는 전략적 고려이겠지만 유효하지 않다.
새누리당은 통합진보당의 경선부정과 관련해 2명의 국회의원을 제명하자고 했고, 지금도 추진 중이다. 법에도 없는 짓이나 그들이 최소한의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이에 문제가 된 새누리당 의원도 국회에서 자격심사를 해서 제명해야 한다. 탈당 권유에 그칠 일이 아니다.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자격심사의 근거가 그 당의 진상조사보고서였다. 이번에 새누리당 의원에 대해 수사 의뢰를 한 곳은 선관위다. 선관위는 헌법기관 아닌가. 사안을 다르게 접근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안철수 원장이 SK 최태원 회장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한 것과 관련해 박근혜 의원은 참 고소해했다. 오죽하면 경제민주화를 통해 "그런 것을 우리가 고치려는 것 아니겠느냐" 하면서 차별화를 시도했으랴. 참 오묘한 게 세상의 일이던가. 복이 있으면 화가 있고,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건이 터졌으니 안 원장이 "국민들이 제게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 때문입니다"라고 하면 박 의원이 뭐라고 답하려나.
▲새누리당 박근혜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박 의원에게 닥친 위기는 자업자득이다. 그의 리더십이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리더십은 이견을 허용하고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다. 박 의원은 비상대권을 거머쥔 후 절대왕정을 구축했다. 어디서 어떤 '듣보잡'을 데리고 와도 당은 끽소리도 못 했다. 공천심사위도 친박 일색으로 채워졌고, 한 사람이 박 의원만 설득하면 끝나는 구조였다. 이번의 뇌물공천도 이런 의사결정 시스템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당화의 필연적 결과"라는 김문수 지사의 지적은 핵심을 짚고 있다.
총선 후에도 그의 권위적 리더십 때문에 당은 활력을 잃었다. 모든 의사결정은 박 의원의 뜻에 따랐다. 공천 룰이 대표적인 경우다. 이러한 정당정치의 사유화는 총선 승리로 인한 방심과 겹쳐져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총선 전에 약속한 것들이 대부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약속 이행을 외치고, 민생을 거론했으나 말 뿐이었다. 민간인 불법사찰 건이 터지자 법무장관 퇴진을 요구했는데, 총선 후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민생, 민생 했으나 정작 새누리당이 제출한 12대 민생법안은 종적이 묘연하다. 뿐인가. 국회의원 불체포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하고선 정작 자당 소속 의원에 대해서는 부결해 버렸다.
여론이 안 좋아지자 박 의원은 예의 그 하던 대로 마치 자신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당을 나무라고 당사자를 질책했다. 정작 자신은 표결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면서 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해명도 없었다. 게다가 의원총회에서 부결 논리를 편 윤상현 의원은 측근이었는데, 책임을 묻기는커녕 캠프 공보담당에 임명했다. 이것만 놓고 보면 박 의원이 체포동의안을 부결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의원은 한 걸음 더 나가서 5.16 쿠데타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겠다고 취임식에서 선서하는 사람이다. 그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이 헌정 질서를 중단한 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이라고 하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식이다. 이런 인식을 갖는 건 자유다. 그러나 거의 절대적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절차를 무식해도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가 헌법을 뭉개고 법을 어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된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박 의원의 이런 스탠스는 그가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패배한 이후 중도로 이동하려던 전략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박 의원이 우클릭으로 틈을 열어주고, 민주당이나 야권이 무기력한 모습이나 구태로 공간을 허용해 안철수 원장의 화려한 재부상이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박 의원에게 닥친 위기는 외부의 요인에 의해 강제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이 점을 인식하지 못하면 역사의 신이 그에게 대통령직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선택은 그의 몫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합리화에 익숙해질수록 올바른 길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현재의 행동방식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권한다." 댄 애리얼리의 <거짓말하는 착한 사람들>에 나오는 말인데, 박 의원이 지금 새겨들어야 할 충고다.
한 가지 더. 사실 지난 총선 국면에서 박 의원이 잘한 것도 적지 않지만 실제 한 것에 비해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보수언론이 절박한 위기의식을 갖고 계속 도와줬기 때문에 빚어진 '과잉 보상'이었다. 민주당이나 야권이 못하면 과도하게 질타하고, 새누리당이나 박 의원이 잘하면 과도하게 칭찬하는 행태는 지금도 여전하다. '귀한 자식 매로 키우고 미운 자식 엿으로 키운다'는 우리 속담이 말해 주듯, 보수언론이 박 의원을 잘못 가르친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는 것이다. 역시 세상엔 공짜가 없는 모양이다.
방심은 예외 없이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정치문법이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국의 보수당이 1945년 총선에서 명성 높은 리더도 없는 노동당에게 패배한 것은 방심 때문이었다. 시대흐름, 국민의 바람을 놓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비근한 예로 총선 전에 잘 나가던 민주당이 깨진 것도 방심해서 어영부영 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박근혜 의원에게 닥친 위기도 결국 총선 승리로 방심하고 퇴행적 모습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박 의원에게 닥친 위기는 민주당에게 절호의 기회다. 박지원 파동으로 수세에 몰린 국면을 타개할 좋은 계기다. 새누리당이 졸지에 역사와 전통의 부패정당 면모를 되찾으니 얼마나 호재인가. 그런데 '마약'이 될 수도 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반사이익에 기대 당이 새롭게 변해야 하는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다. 저들의 잘못만 계속 물고 늘어지면 당장의 여론은 좋을지 몰라도 그 효과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민주당이 이런 계기를 통해 더 변화하고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 줘야 대안세력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다. 무릇 믿을만한 대안의 존재만큼 무서운 비판은 없다.
다른 하나는 정치·도덕적 이슈에 '올인'하는 것이다. 부정과 부패, 스캔들, 특히 박 의원에게 책임이 있는 이런 사안에 대해서는 분명한 대립각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민심이 악화된 것은 양극화, 빈곤 등 사회경제적 문제 때문이다. 따라서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차별화된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기본 구도를 형성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민주당이 아무리 열심히 싸워도 국민들 눈에는 결국 '그슬린 돼지가 달아맨 돼지 타령한다'는 식으로 비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대세는 안철수 원장에게 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이나 야권이 지향해야 할 집권모델은 1945년의 영국 선거다. 이 선거에서 노동당은 삶의 문제를 다루는 복지플랜으로 전쟁 영웅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을 제압했다. 당시 노동당은 당의 대표인 애틀리 대 처칠의 대결로 전선을 운영하지 않았다. 인물요인으로 승부하려는 보수당에 대해 철저하게 서민이나 보통사람들의 삶에 대한 해법을 제시함으로써 이겼다. 지금 민주당이 자칫 인물에 기대 승리하고자 한다면 그가 설사 안철수라고 하더라도 쉽지 않을 것이다. 성패를 가르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 대안이고, 그것을 중심으로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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