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노무현보다 훨씬 약하다. 그 사회의 당면한 핵심문제를 해결하려는 직·간접적 또는 유·무형의 노력을 사회적 운동(social movement)라고 한다면 노무현은 그 운동이나 시대흐름의 상징이었다. 지금의 문재인은 그런 상징성이 약하다. 노무현의 그것에 비하기엔 족탈불급이고 안철수 원장에 비해서도 떨어진다. 이래서는 못 이긴다.
2000년 미국 대선에서 이기고도 진 사람이 앨 고어다. 공식석상에서 그는 딱딱하고 재미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헌데 그를 아는 많은 사람이 그가 사석에서 얼마나 친밀하고 편안한지 증언한다. 이에 비춰보면, 정치인에게는 개인적 인격과 다른 정치적 인격이 따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정치인의 능력을 판단할 때는 개인적 인격 차원의 매력이나 출중함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인 문재인은 훌륭하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딱 적합한 인물이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라는 수식어도 어색하지 않다. 이런 개인적 인격이 그의 정치적 인격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곧고 담백한 정치인이다. 문재인 의원의 경우 정치적 인격이 형성된 것은 길게 봐도 참여정부부터이고, 짧게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부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걸어온 길이나 역정을 그냥 일별해 봐도 성과가 적지 않다. 노무현을 역사로 만들면서 친노 세력을 부활시키는 한편 야권통합을 일궈냈다.
그런데 조금 더 까칠하게 따져 보면 그가 자신의 구상을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 없다. 총선에서 부산 출마도 과거의 노무현이 그랬듯이 홀연히 자신을 던진 것이 아니다. 야권통합에 기여했지만 애당초 그것은 그의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게다가 총선 전 민주당에게 혁신이 요구될 때나 총선 패배 후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할 때 그는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 이해찬-박지원 담합 또는 연대에 끌려 다녔다. 안철수 원장과의 공동정부론도 본의는 아니겠지만 민주당에게 열패감을 안겨줬다. '문재인 아젠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나 '문재인 리더십 때문에 판이 바뀌었다'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이건 심각한 결함이다.
대선 출마선언문에서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 '우리나라 대통령'이다. 그냥 들어서는 도무지 그 맥락이 이해되지 않는다. 앞뒤 문장을 몇 번 되새겨 봐야 그나마 진의를 파악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슬로건인가. 그래도 여기까지는 실수나 방심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그런데 뒤이어 나온 슬로건과 PI(presidential image)가 더 가관이다. '대한민국 남자'가 PI란다. 좋게 보면 뚱딴지같고, 나쁘게 보면 야비하다. 여성 대통령이 시기상조라고 한 이재오 의원 수준만도 못하다.
슬로건은 '사람이 먼저다'인데, 이것도 느낌이 산뜻하지 않다 우선 '다시(again) 노무현'의 아우라가 너무 짙다. 내용적으로나 임팩트에서도 '사람 사는 세상'에 비해 훨씬 약하다. 사람을 강조하는 것은 예컨대 예산의 경우 토건 중심이 아니라 사람 중심의 예산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물질이 아니라 사람을 중시해야 한다는 연상망을 불러내는 단어다. 만든 사람의 취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으나 슬로건은 그런 식으로 효과를 발휘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은 무엇을 말하는지 쉽게 이해되지도, 손에 잡힐 정도로 구체적이지도 않다. 실패작이다.
이쯤 되면 실무자의 잘못이라기보다는 문재인 의원의 인식을 탓할 수밖에 없다. 후보의 인식지평이 가장 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슬로건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의원은 노무현의 지평을 못 넘어서고 있다. 아니 못 미친다. 노무현을 넘어서겠다고 하는데, 그의 책이나 그의 발언 어디에서도 그런 흔적을 찾기 어렵다. 리더십의 출발은 참모나 동료들이 적절하게 논의하고, 최선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두 번에 걸친 슬로건의 실패 역시 문재인 의원의 리더십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민주통합당 문재인 의원. ⓒ프레시안(최형락) |
영국의 블레어가 18년 만에 집권하게 되는 과정에서 이론가이자 전략가로 활동한 사람이 필립 굴드다. 노동당의 현대화를 이끌던 닐 키녹이 물러나고 그를 승계한 스미스 당수가 갑자기 죽자 노동당의 젊은 희망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이 차기 당수직을 놓고 경합했다. 브라운이 현대화파의 황태자였다면 블레어는 서자였다. 당시 굴드는 브라운과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나 그는 차기 당수로 블레어를 선택했다. 시대흐름이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날라리' 출신의 섹시한 블레어가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사 앞에 자신을 던져 승부를 보는 사람이 정치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사적 연고를 떠나 공적 판단을 해야 한다. 문재인 곁에 노무현을 빼놓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나? 박근혜가 발탁한 김종인 전 의원처럼 시대과제를 주장하면서 파격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사람이 있나? 그저 그런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꾸리는 것이 대선캠프가 아니다.
문재인이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그 나라를 어떻게 이룰지를 보여주는 것이 '곁에 있는 사람들'이다. 문재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일반인의 눈에 새로운 시대를 개척할 새 인물로 받아들여질지 의문이다. 새 시대의 기대가 느껴지지 않는 주변 사람들 뿐이라면 이 역시 문재인의 인식이나 리더십의 한계를 표출하는 것이다. 강렬한 샛별이었던 노무현과 달리 사람 수, 즉 흐름이 아니라 세력으로 승부하는 것도 씁쓸한 대목이다.
얼마 전 인터뷰에서 고은 시인이 이런 말을 했다. "세종은 왜 위대하냐고? 자기 아버지의 무자비를 자비로 개혁한 사람이야. 세종의 위대성은 자기 아버지를 복제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를 내친 데 있어. 문화적으로 말이야." 뒤에 문화적이란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핵심은 '내친' 행위다. 문재인은 정치적 아버지 노무현을 '내쳐야' 한다. 점잖게 표현하면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재인은 노무현 시대, 참여정부를 평가할 때 사적 연고가 아니라 공적 판단에 의해 독하게 해야 한다. 그게 그 시대를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또 그래야 아버지의 굴레에 빠져있는 박근혜와 차별화할 수 있다.
안철수 원장이 전격 등장한 이후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의원의 지지율이 많이 빠졌다. 리얼미터의 7월 18일과 24일의 조사를 비교해 보면, 7.2%포인트 떨어졌다. 반면 안철수 원장은 9.6%포인트 올랐다. 둘 사이의 지지율이 제로섬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래서는 문재인 의원이 강력한 후보가 될 수 없다. 안 원장을 상수로 전제한다면 문 의원은 그와 경쟁해야 한다. 더 신선하고 더 매력 있고 더 확장성이 있는 인물과 경쟁하는 꼴이다. 이길 수 없는 구도다.
문재인 의원이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리더십이다. 민주당을 변화시키고, 야권 또는 진보를 혁신하는 리더십을 보여줘야만 이미지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 또 그래야 노무현을 넘어설 수 있다. 당내 경선을 그냥 후보 되는 절차로만 여기지 말고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스스로도 더 강해지는 프로세스로 삼아야 한다. 또 안철수 원장과 무엇을 놓고 경쟁하고, 무엇을 위해 연대할 것인지를 문 의원이 선도하고 강제해야 한다. 이 역시 리더십의 영역이다. 노무현이 정몽준과의 후보단일화에서 이긴 것도 결국 리더십 때문이다.
"<진보집권플랜>을 비롯해서 모두들 앞으로 진보·개혁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만 논의할 뿐, 그 과제들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것 같다. 지금 우리에게 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이다."
문재인 의원이 자신의 책에서 한 말이다. 맞는 말이다. 그 '어떻게'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그가 행동으로, 결과로서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죽은 논리다. 지금 당장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박근혜가 망해가는 한나라당을 새누리당으로 살려냈듯이, 문재인이 민주당과 야권을 지금 살려내야 한다. 그래야 안철수도 이기고, 박근혜도 이길 것이다. 나아가 보수를 이기고, 시장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초심으로 돌아가 새 출발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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