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공직을 훌훌 벗고 비엔나의 가족 집에서 석달 동안 한거했는데, 깊고 푸른 도나우(다뉴브)강의 물빛에 매료되어 그곳을 자주 찾았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도나우의 물빛은 내가 옛날 옛적에 읽은 적이 있던 어느 일본 소설의 제목과도 같았다. 흡사 우리들의 비밀스런 푸른 혈맥이 합류해 흐르는 것 같기도 하고, 인간의 내면 깊숙이 흐르는 천년 기억이 만들어 놓은 신비의 심연 같기도 하다. 환희인 듯 우수인 듯, 사랑인 듯 죽음 인듯, 짙푸른 강심이 숨기고 있는 매력의 정체는 종내 알 수가 없다.
문득 고개를 들어 주위를 바라보노라면 인간과 새들과 갈대들이 난장을 트고 있는 한바탕 생명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도나우강, 섬진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그리고 그 강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후덕한 산과 뫼를 마음속에 그려 보다, 나는 문득 탄식을 토한다.
"하나님, 어찌해 우리 인간들에게 이토록 과분한 선물을 안겨주셨습니까? 걸핏하면 자연에 폭력을 가하는 못된 피조물들에게 말입니다."
이 아름다운 강변에 핵발전소가 들어선다면? 그리하여 인간과 새들이 언젠가 올지도 모를 핵 재앙의 공포를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끔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일이 오스트리아에서 실제로 일어날 뻔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뜸이 이렇게 길어졌다.
비엔나에서 도나우강을 따라 상류 쪽으로 100리(40km)쯤 올라가다보면 뜬금없이 거대한 인공 건물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을 것이다. 동화처럼 아름다운 강변 풍경과는 전혀 컨셉이 다른, 누가 보아도 이물(異物) 같은 이 건물은 다름 아닌 핵발전소이다. 그런데 괴이한 것은, 이것이 '우두커니' 서있다는 점이다. 완공된 후 지금껏 한 번도 엔진이 돌아가 본 적이 없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우두커니' 서 있을 것이라 한다.
도대체 왜 멀쩡한 핵발전소가 하릴 없이 놀고만 있는 것일까? 애써 지었으면 엔진을 돌리든지, 돌리지 않으려면 애시 당초 짓지를 말았던지 할 일 아닌가. 10억 유로 상당의 막대한 예산까지 부었다면서 말이다.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까?
인구 3000여 명에 불과한 도나우 강변 작은 마을 쯔베텐도르프(Zwetendorf)라는 곳에 오스트리아 정부가 핵발전소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1972년. 그 때부터 극소수 '반골'들이 반대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세력을 얻어갔으며 5~6년 후 완공을 앞둔 시점에 와서는 찬반 여론이 첨예하게 갈렸다는 것이다.
결국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는데, 정부 여당은 투표 결과를 낙관했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78년 11월 투표함을 열어 보니 반대가 50.5%로 나타난 것이다. 1% 차이였다.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핵발전소를 금지하는 법령을 제정했다. 아울러 당시 계획 중이던 다른 5기의 핵발전소 건설 계획도 모두 폐기되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는 영원히 '핵'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핵발전소 건설에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며, 이에 대해 정부 및 정당들은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 나라의 탈핵 오디세이는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나는 궁금증에 좀이 쑤신 나머지 관련 정보와 자료들을 인터넷에서 열심히 찾아 읽어 보았다. 그러던 중 비엔나의 학자이자 반핵 운동가인 피타 바이쉬(Peter Weish) 박사의 글을 접했다. 내용이 여실하고 현장감이 있었다. 나는 박사에게 이메일로 이 글을 소개해도 좋겠느냐고 물었다. 박사는 흔쾌히 응락했다. 그래서 이 글의 요지 부분을 여기 싣게 되었다.
▲ 핵발전소 예정 건물이었던 오스트리아 쯔베텐도르프의 박물관 |
오스트리아의 핵에너지에 대한 결별
196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 정부는 핵발전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기획사가 설립되었다. 당시 나는 비엔나 근처에 소재한 핵발전 방사능 보호를 위한 기관의 생물학 연구부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방사능 쓰레기 및 방사능의 생물학적 위험을 알고 있었던 나는 핵발전소 건설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렇게 나는 애초부터 반핵 "운동"에 참가하게 되었다.
1971년 있었던 우리들의 첫 시위를 나는 기억한다. 핵발전소 건설 부지로 선정된 쯔베텐도르프로 향하는 시위 행진이었는데 참석자는 모두 열 두어 명 가량이었다. 이듬해인 1972년, 수도 비엔나로부터 20마일 떨어진 도나우강 상류에 있는 쯔베텐도르프에 최초의 핵발전소 건설이 시작되었다. 공사는 독일의 AEG사와 SIEMENS가 맡았다. 완공되면 70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게 되어 오스트리아 전기 생산량의 약 10%를 감당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에 더해 1974년 초에는 제2의 핵발전소 건설이 추진되었다. 당시 양대 주요 정당인 사회당과 당시 제1야당인 보수당이 모두 핵발전소를 지지했고, 소수당인 자유당만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975년 공식적인 정부 에너지 계획에 의하면, 오스트리아는 1985년까지 총 3000메가와트 발전량을 충당할 3기의 발전소를 완공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1974년 겨울에 2기 건설 공정이 유예되었다. 전기 수요가 감소한데다가, 지역주민들의 집단적 반대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1976년 가을이 되자 정부는 핵발전소의 타당성과 이점을 홍보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외의 반작용이 일어났다. 처음으로 몇몇 신문들이 비판적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반핵 운동은 가열되었다. 원래 핵폐기물을 다른 나라에 수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니 했지만 이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핵폐기물의 국내 저장소 문제를 둘러싸고 후보지 지역 주민으로부터 대대적인 반대 활동이 일어났다. 언론에서는 핵 이슈를 광범위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완공 단계의 쯔붸텐도르프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 이제 비로소 바보 멍청이로 낙인찍히지 않고도 내 놓고 시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하는 데는 많은 이유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런 것이라 할 수 있겠다.
* 방사능 유출의 해독성
* 미결 상태로 남아 있는 여러 기술적 문제들
* 핵 폐기물의 관리와 처리에 대한 해결 불가능한 난제들
* 소위 핵에너지의 평화적 이용과 핵 군수산업간의 연계성
* 불완전한 위기 대처 계획, 핵 재앙 발생시 여러 도시를 동시에 소개(疏開)해야 할 필요성과 그 불가능성.
우리는 또한 핵 산업 및 플루토늄 생산의 확대를 반대하는 우리들의 비판적 활동이 핵무기의 수평적 확산을 저지하는 투쟁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많은 활동들이 이루어졌다. 예컨대 1977년 4월 잘츠부르그에서는 '핵 없는 미래를 위한 국제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for a Non-Nuclear Future)가 여러 나라의 비정부 기구들의 주관하에 개최되기도 했다. 거기 참석한 어떤 대표단은 우리들의 반핵 캠페인을 지원해 주었다.
1977년 가을에는 쯔붸텐도르프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그 해 12월 반대자들은 핵발전소에 사용될 연료 수입을 위한 비밀 계획을 폭로하면서 이를 행동으로 저지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연료 수송이 다음해 초로 연기되었다. 그 후 급기야 쯔베텐도르프 부지로 연료를 수송하기 위해 군용 헬리콥터가 동원되었고 부지 주위는 경찰 병력이 봉쇄했다. 모든 반핵 시위와 활동은 완전히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주목할 사실이다.
핵발전소 건설 문제가 이렇게 뜨거운 정치적 이슈가 되자, 정부는 이에 대한 결정을 의회로 보냈다. 여당인 사회당은 의회에서의 합의 통과를 확신했다. 왜냐면 제1야당도 찬성하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 즈음 정부로부터 보고서 한 건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핵발전소에 대한 홍보 캠페인에서 편집되었던 다량의 기록문서와 정보를 정리한 것이었다. 그것은 극도로 친핵적이었으며 편견에 치우친 데다가 여러 중요한 진실을 완전히 무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의 홍보전이 대중을 속이기 위해 획책되었다는 반대자들의 당초 주장이 옳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뒤이어 이루어진 국회 청문회에서는 제반 안전 측면이 의문스럽다는 것과 방사능 생태 전문가가 타당성 조사 연구팀에 포함되지 않았던 점 등의 결함이 노출되었다.
이에 국민당(People's Party)이 입장을 재검토했다. 당 대표 타우스(Taus) 박사는 여전히 핵발전소를 선호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안전 문제가 분명해질 때 까지는 잠정적으로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겠고 공표했다.
유권자들 가운데 소수에 머물러 있었던 핵 반대자들이 이제는 그 수가 불어나 선거에서 친핵 정당에 타격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커졌다. 이렇게 되자 집권 사회당은 이 문제를 의회에서 결정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왜냐면 국민당의 입장이 모호해졌고, 가장 서쪽의 주(Vorarlberg) 출신의 사회당 의원들이 당의 노선을 따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서단 지역의 주민들은 마침 이웃 나라 스위스가 접경 지역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반대해 이를 좌절시켰던 참이었다. 그 지역 주민들은 압도적으로 핵발전소를 반대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핵발전소가 생긴다면 스위스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여러 외국 학자들을 초빙해 그들 나라의 사례를 설명할 기회를 마련했다. 텔러(Teller) 박사도 그들 중의 하나였는데,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명성이 높았고 또 동시에 악명이 높기도 한 사람이었다. 비엔나 대학에서 추진되었던 그의 강의는 학생들의 반대로 취소되고 말았다.
1978년 6월 사회당 소속 크라이스키(Dr. Kreisky) 총리는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붙이겠다고 발표했다. 당초 그는 핵발전소 문제를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지극히 부적절한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이제 입장을 바꾸어 11월 국민투표에 부치겠다고 발표하면서 국민 다수가 찬성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밝혔다.
친핵 세력은 거대한 지원을 받으면서 전투에 돌입했다. 국가 소유의 기관들에서만도 200만 달러의 세금을 찬성 캠페인을 위해 지출했다. 더 나아가 산업가 협회, 노동조합 산하의 단체들 그리고 사회당이 수백만 달러를 지출했다.
반면 반핵 활동가들이 가진 것이라곤 개인의 주머니에 있는 돈과 몸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다양한 단체들이 반대 활동에 참여해 이채를 띠었다. 예를 들어 원자력을 반대하는 어머니 모임, 교사 모임, 물리학자 모임, 생물학자 모임, 지질학자 모임, 의사 모임, 학생 모임, 카톨릭 모임, 예술가 모임, 무역 노조연맹 등등이었다.
곳곳에 연락 거점이 만들어졌는데 그 중 하나는 오스트리아 학생 동맹이 조직한 것이었다. 동시에 2개의 본부가 조직되었고 학자들과 시민 단체의 상호 협력은 뛰어난 것이었다. 자당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회당 인사들은 당으로부터 여러 차례 제명 위협을 받았지만 그럴수록 더욱 당의 기강을 무시하기로 강하게 결심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사회당의) 크라이스키 정부에는 Yes, 쯔베텐도르프에는 No"였다.
국민투표 예정일 몇 주 전에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는 여전히 찬성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났다. 비록 점차 찬반의 차이가 줄어들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반대자들은 더 많은 폭로를 했는데, 기술적 하자, 안전 규정 위반, 부지의 지질학적 부적합성등을 공개했다. 주요 신문들은 핵발전소 이슈를 광범위하게 다루었다.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문제점을 조명했다.
한편 노동 연맹(Trade Union)의 안톤 베냐(Anton Benya) 회장은 수천 개의 산하 조직의 노동자들에게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져 달라고 설득했다. 크라이스키 총리도 가능한 수단을 다 동원했다. 이로써 국민투표에서 과반수가 핵발전소 건설에 대한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다. 뚜껑을 열어 보니 반대표가 더 많이 나온 것이었다. 투표자수(유권자의 약 3분의 2) 326만 중에서 핵발전소 찬성이 49.5% 반대가 50.5%로 나타났다. 반핵 운동의 열정과 헌신이 거둔 승리였다. 정부 여당의 홍보전과 기성조직의 활동은 패배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현대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기도 했다. 2만 표도 되지 못한 차이가 이 나라에 핵에너지를 물리치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활동과 헌신이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었으며, 모든 모임과 토론과 팸플릿이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 주었다. 우리는 모든 활동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성공의 전망이 어두울 때에도 싸우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분석에 의하면, 반핵 다수표는 젊은 세대, 특히 젊은 여성들로부터 나왔고 교육 수준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결코 정치적 성향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었다.
글을 마치며
서두에서 문제의 쯔베텐도르프의 핵발전소가 '우두커니 하릴 없이' 서 있다고 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그건 실례의 말씀 같다. 이 핵발전소는 박물관으로 변신했으며 일부는 태양열 발전소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더구나 2009년도 'Save the World Awards'를 받기도 했다. 당초의 핵발전소가 이제는 역설적으로 반핵 평화의 기념물이자 상징이 되어 웅변을 토하고 있는 것이니, 하릴 없이 우두커니 서있다고 한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일 것 같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오스트리아 국민투표의 정당성을 반증해 주기라고 하듯이 투표일로부터 5개월 후에 미국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1979년 3월 펜실바니아 주에 속한 쓰리마일 핵발전소 사고가 그것이었다. 그로써 핵발전은 결코 안전하지 않음을 증명해 주었고 오스트리아 사람들로 해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했다. 그 뒤 1986년의 체르노빌 사고, 또 작년의 후쿠시마 재앙 소식을 들었을 때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탈핵 오디세이를 돌아보며 스스로 안도하고 자랑스러워했을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하필이면 지난해 3월 후쿠시마 사고 발생 직후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다. 텅 빈 비행기를 타고 썰렁한 오사카 공항에 내렸더니 어떤 노신사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정중히 인사를 한다.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우리나라를 이렇게 찾아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일본은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오사카는 내가 10여년 전에 근무했던 곳이다. 그 때 사귀었던 친구들을 만나 해후의 정을 나누었다. 그분들이 마련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맥주잔을 주고받으며 왁자하게 떠들었다. 그 때 우리들 중에 아무도 말은 꺼내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마음속엔 핵의 공포, 죽음의 공포가 어른거리고 있음을 나는 예민하게 느끼고 있었다. '핵'은 남의 이야기거나 관념적 담론이 아니었다. 바로 내 코앞에 와 있는 괴물이었던 것이다.
핵발전소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강토를 '아무도 오지 않으려는 나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런 의문을 내가 갖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핵발전소에 대해 혹자는 안전하고 필요불결하다고 하고, 또 혹자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외친다. 어떤 나라들은 정책적으로 핵발전소를 더욱 많이 짓고 수출하려고 하고, 또 어떤 나라들은 여기에서 탈출하려 한다. 2022년 말까지 자국 내의 모든 핵발전소를 폐쇄하기로 결정한 독일은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다.
과연 어느 길이 옳은 것일까? 우리는 마땅히 후쿠시마가 주는 교훈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고민해야 한다. 막연히 우리 당대에 별 일이야 없겠지 하는 안이한 타성과 불감증, 그리고 자본의 생리에 맡겨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러기에는 너무 민감하고 너무 오래 가고 너무 큰 일이기 때문이다.
핵발전소가 과학적으로 안전하며 꼭 필요하다고 정부가 확신하더라도, 국민들을 설득시킬 책임과 의무는 정부의 몫이다. 만일 핵발전소가 100% 안전하다는 것이 백년 후에 증명된다 하더라도, 지금 민(民)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매한 민중이여, 나를 따르라, 알게 될 날이 오리라' 하고 밀어 붙여야 하는가? 그렇다면 민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민이 설득되지 않으면 강행할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민주주의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핵발전소는 우리와 후손들의 안전과 생명에 관한 문제가 아닌가. 여기에 여와 야가 어디 있으며, 좌와 우는 또 무엇이며, 보수와 진보와 같은 이분법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재앙이 발생하면 우파는 안전하고 좌파는 위험한가? 혹은 그 역이 성립하는가? 오스트리아의 핵 탈출기가 우리나라의 정책 결정자,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들에게 대안을 모색하는 자극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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