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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우공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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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우공이산

[정욱식의 '핵과 인간'] "위협과 위반은 타협의 길이 아니다"

미국의 핵 전략은 단순히 소련을 비롯한 핵보유국에 대한 억제 차원에 머물지 않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전쟁과 같은 '제한전'(미국의 관점에서는 제한전이지만, 한반도에서는 전면전이었다!)과 그 이후 갈등 국면 때만다 비핵국가였던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사용을 검토하기도 했고, 자신에게 유리한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한 '강압 외교'의 수단으로도 이용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전쟁이자, 오늘날까지도 그 신드롬이 거론되고 있는 베트남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케네디, 존슨, 닉슨 행정부는 전세가 뜻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마다 핵무기를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의 연속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한국전쟁이 베트남 전쟁에 미친 영향 가운데 두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강해진 미국의 군사력과 공산권에 대한 적개심은 베트남 전쟁 개입의 물리적?심리적 토대를 작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전쟁을 핵 위협을 통해 끝냈다고 판단한 미국은 베트남에서도 유사한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미국의 핵 전략의 관점에서 볼 때, 베트남 전쟁은 한국전쟁의 데자뷰였던 셈이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의 상호작용은 미국과 프랑스의 관계에서도 발견된다.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던 시기에 프랑스도 베트민의 민족해방운동에 밀리고 있었다. 자칫 동북아의 전략적 요충지인 한반도와 동남아의 요충지인 베트남이 공산 진영으로 넘어갈 것을 우려한 미국은 한국전쟁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적극 지원했다. 그리고 한반도와 베트남을 가로지르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의 핵심적 목표는 일본을 자신의 품에 남겨두는 것이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2년 1월에 영국 관리들에게 "만약 일본이 공산 진영으로 넘어간다면 세계 패권 구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미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신속한 개입 배경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반도 개입의 전략적 이유로 작용했다. 동남아시아에 대한 일본의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이 "일본의 경제적 성장과 번영에 중대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만약 일본이 동남아에서 시장을 찾지 못하면, 일본은 중국에서 시장을 찾으려고 할 것이고, 이렇게 되면 일본의 탈미친중(脫美親中)이 가속화 될 것으로 봤던 것이다.

한편 1951년 여름 들어 한반도 정전협정 논의가 시작되자, 긴장한 나라가 있었다. 바로 베트민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던 프랑스였다. 1951년 9월 워싱턴을 방문한 프랑스의 주 인도차이나 총사령관이었던 타시니(Jean de Lattre de Tassigny) 장군은 미국에게 추가적인 군사 지원과 함께 한반도에서 정전협정이 타결되면, 중국이 인도차이나에 개입할 것이라는 우려를 전달했다. 그는 "한반도에서 지더라도 아시아 전체를 잃지 않지만, 인도차이나를 잃으면 아시아를 잃게 된다"는 논리를 폈다. 정전협정이 체결된 지 한달 후인 1953년 8월에도 나바르(Henri Navarre) 인도차이나 주둔군 사령관은 한반도 정전협정이 중국군의 인도차이나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력의 강화로 이어질 것이라며, 미국의 참전 및 대대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자 미국은 약 8억 달러의 군수 지원안을 발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 패배했고, 이에 따라 1946년에 발발한 1차 베트남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베트민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베트남의 비극마저도 끝난 것은 아니었다. 베트남은 10년 전 한반도와 흡사한 운명에 직면했다. 미국, 소련, 중국 등 강대국들이 개입해 베트남을 위도 17도선을 기점으로 분단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북부에는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이, 남부에는 응오 딘 디엠을 대통령으로 하는 남베트남이 들어섰다. 남베트남은 제네바 합의를 거부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대적인 공산주의 소탕 작전을 벌였다. 이에 남베트남 내 공산주의자들은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아 '남베트남민족자유전선'을 설립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다.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도 1만 6천명의 병력을 파견하는 등, 남베트남 지원에 나섰다. 급기야 존슨 행정부는 1964년 8월에는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고 말았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한 지 2개월 후에는 아시아 정세에 중대한 파장을 몰고 올 사건이 발생했다. 북베트남의 우방국인 중국이 핵 실험에 성공한 것이다. 존슨 행정부 내에서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면, 중국의 핵무장에 미국이 후퇴하기 시작한 것이라는 신호를 아시아에 보내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중국의 핵 실험 실시가 초읽기에 들어간 1964년 9월 존슨 대통령이 주재한 대책 회의에서 주 베트남 대사인 테일러(Maxwell Taylor)는 "조만간 미국은 북베트남에 훨씬 강력하게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합참의장 휠러(Earle Wheeler) 역시 "우리가 남베트남에서 패배한다면, 우리는 동남아시아를 잃을 것이고, 이들 지역의 국가들은 차례로 지역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중공에 기울게 될 것"이라고 거들었다.

▲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의 데자뷰

미국이 공산주의 확산 저지를 명분으로 베트남에 전면 개입하면서 핵무기는 또 다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유력한 힘이라는 맹신도 되살아났다. 그 선봉에는 한국전쟁을 핵 위협을 통해 끝냈다고 자화자찬하고 이후 대량 보복 전략을 채택한 아이젠하워와 덜레스가 있었다. 공화당 대선 후보 아이젠하워의 외교 참모였던 덜레스는 1952년 5월 초 파리에서 한 연설을 통해 인도차이나를 방어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중국이나 소련에 대한 직접적인 보복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중공이 그들의 공산군을 베트남으로 보내면 우리의 대응이" 중국 본토로까지 확대되고 또한 사용하는 무기의 제한도 두지 않겠다는 점을 중국 정부가 인식하게 만들어야 하는 시점이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1953년 9월에는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설에서 "중국의 공산 정권은 (한반도에 이어) 인도차이나에서 또 다시 도발할 경우 미국의 대응은 인도차이나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고 이에 따라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아이젠하워 역시 그의 후임 정권들에게 핵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라고 권고했다. 그는 퇴임 4년 후인 1965년 2월 17일 존슨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식대로 해석한 한국전쟁 휴전 비결을 설명했다. 당시 회의록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이 된 직후에 네루, 장제스, 정전협상에 참여한 관리를 통해 중국과 북한에게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소개하면서, "메시지의 핵심은 만약 만족할 만한 정전협정에 조속히 서명하지 않으면, 우리는 전투 지역과 사용하는 무기의 제한을 제거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핵 공격과 중국으로의 확전 위협으로 전쟁을 끝냈다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베트남 전쟁에서도 같은 방식을 적용할 것을 권유했다. 중국이 베트남에 개입하면 핵 공격을 가할 것이라는 점을 중국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66년 4월에 미국은 북베트남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개입을 야기할 우려가 있었다. 이에 따라 미국 군부는 중국의 개입시 핵무기 사용을 고려했다. 당시 미군 수뇌부는 중국 전문가인 에드워드 라이스(Edward Rice) 홍콩 영사를 불러 "미국의 제한적인 핵 공격에 중국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비밀 해제된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라이스는 광활하고도 많은 인구를 보유한 중국은 "핵무기를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며, "마오쩌둥은 1천만명의 인구 손실에 대해 그리 크게 우려하지 않을 것"이고, "항복을 하느니 대규모의 산업적 손실을 감수할 것"이라고 답했다. 라이스는 핵 공격을 포함한 어떤 군사적 방법으로도 중국을 굴복시키거나 정복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제가 중국과의 전쟁과 관련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권고는 전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존슨 행정부 역시 핵무기 사용은 제한적인 목적에 비해 무차별적인 살상과 파괴를 가져올 수 있고, 소련의 맞대응을 야기해 3차 세계대전으로까지 비화될 위험이 있으며, 국내외의 여론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핵무기 사용을 심각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부통령을 지냈던 리처드 닉슨이 등장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베트남 전쟁 종결을 최대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닉슨 행정부는 임기 첫해부터 핵무기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한국전쟁 종식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고려했던 것의 재판이었다. 당시 닉슨 행정부는 파리 협상을 조속히 마무리 짓는다는 명분으로 무력시위를 강화하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핵무기 사용 위협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1969년 여름 여러 차례에 걸쳐 소련과 북베트남이 미국이 제시한 종전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면 "미국은 엄청난 결과와 파괴를 초래할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핵무기라는 직접적인 표현은 삼갔지만, 이는 누가 들어도 핵전쟁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다.

핵 위협에 굴복? 대대손손 투쟁할 것!

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소련과 북베트남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자, 미국은 재래식 무기를 이용한 대대적인 공세를 펼치는 동시에 핵 사용 준비태세를 강화시켰다. 69년 7월 들어 닉슨의 국가안보보좌관인 헨리 키신저는 작전명 '덕훅'(Duck Hook, 골프용어로 거위 목처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어지며 날아가는 타구를 말함)을 준비하는 한편, '9월 그룹'을 구성해 북베트남을 굴복시킬 방안을 만들게 했다. 키신저는 핵무기 불사용은 "우리 행정부의 정책"이라면서도, 북베트남과 중국 사이의 철도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그 무기의 사용이 배제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덕훅'의 목표는 "북베트남에 군사격 타격을 가해 (미국이 제시한 조건으로)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었다. '9월 그룹'은 존슨 행정부 때의 폭격이 산발적이고 남베트남에 국한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적이 감당할 수 없는 피해"를 가하거나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야기하더라도 북베트남 정권의 완전한 파괴"를 시도하는 수준까지 검토했다. 당시 비밀문서에 따르면, '덕훅'은 북베트남에 대한 단기적이면서도 고강도의 공격을 가해 북베트남에 "지속적인 군사적·경제적 영향을 주고," "하노이 지도부에 강력한 심리적 영향을 주는 것"에 맞춰졌다.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핵무기 사용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며, 명확한 방침을 밝히진 않았다. 그러나 닉슨은 '덕훅'을 승인하지 않았다. 국방장관과 국무장관이 이 계획에 반대했고, 반전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대대적인 군사 공세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닉슨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군사 훈련 가운데 하나로 기록된 '합참 준비태세 시험(Joint Chiefs of Staff Readiness Test)'에 돌입했다. 핵 공격 태세를 크게 강화시켜 상대방의 굴복을 유도하는 '미친 자의 이론(madman theory)'를 시험하기로 한 것이다. 10월 13일부터 30일까지 실시된 이 훈련은 핵 준비 태세 강화를 포함해 지구 전역에 걸쳐 실시됐다. 이는 닉슨 행정부가 북베트남과 소련에게 제시한 협상 시한인 11월 1일을 겨냥한 무력시위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 합참은 미국 여론과 동맹국이 이러한 훈련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극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닉슨 대통령은 강압외교의 성공을 위해 소련 정보기간이 탐지할 수준으로 오픈시키도록 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미국은 인도차이나 반도 인근에 전략폭격기의 준비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핵무기를 탑재한 구축함과 잠수함을 대거 파견했다. 또한 소련에 대한 무력시위를 강화하기 위해 대서양, 지중해, 아덴만, 한반도와 일본 사이의 동해 등에서도 준비태세를 크게 강화했고, 10월 말에는 알래스카 동부에서 전략공군사령부 주관으로 핵무기를 탑재한 전폭기 'B-52'를 동원한 경계 훈련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시위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소련이 미국의 핵 준비태세 강화를 간파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북베트남의 저항이나 중국 및 소련의 베트남 정책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미국의 경계태세 강화에 맞서 중국과 소련도 경계 태세를 강화했다. '미친 자의 이론'이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1972년 들어 닉슨 행정부는 또 다시 핵무기 사용 검토에 들어갔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든 미국은 72년 북베트남의 총공세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닉슨은 키신저 등 핵심 참모들에게 핵폭탄 투하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목표를 잘 정해 핵공격을 하면 민간인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는 반면에, 북베트남과 소련 지도부에는 심리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그러나 키신저는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다. 더구나 이 때는 중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선 시점이었다. 북베트남이나 베트남-중국 국경에 핵폭탄을 투하하면 미중 데탕트도 물거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북베트남의 지도부는 미국의 핵무기 사용 위협에 결코 움츠려들지 않았다. 1972년 12월 4일, 파리에서 열린 평화협상 대표인 레득토는 키신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1950년대) 프랑스에 맞서 저항을 할 때 닉슨 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언급한 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끔 당신들이 우리에게 핵폭탄을 떨어뜨릴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만약 우리 세대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우리의 자손들이 계속 투쟁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600개의 핵무기와 맞먹는 엄청난 폭격을 받았습니다. 간명한 진리는 우리는 결코 항복해 노예로 사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당신들의 위협과 약속 위반은 타협에 도달하는 진정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 강연회가 열립니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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