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나꼼수 비키니'와 '문재인 지지율'의 관계는?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나꼼수 비키니'와 '문재인 지지율'의 관계는?

싱크탱크 '미래智'가 매주 선보이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텍스트 해설본을 <프레시안>에 소개합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미래지가 한주간의 뉴스 중 핵심적인 몇 개를 뽑아서 그 의미를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짧은 동영상 시사강의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시청자들은 뉴스를 분석해 내는 시각과 분석 도구를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주요 사건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심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우리가 공부하는 사회과학과 인문학이라는 도구가 단순한 지적 자기만족의 수단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에게 필요한 도구임을 보여주고, 그를 통해 사회를 보는 비판적인 눈을 재미있고 쉽게 열어 주고자 합니다. 15분 내외의 동영상은 미래지 홈페이지(www.miraege.com)에, 그리고 동영상의 텍스트 해설인 해제본은 <프레시안>에 동시에 업로드합니다. 해제본은 미래지 원장인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대표 집필할 예정입니다. <편집자>

젠더와 권력관계

다음의 인용은 일본 국민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표한 어떤 어르신의 발언을 엿들은 내용이다.

"일본의 후쿠시마가 대지진 이후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일본 시민들은 조용하게 질서를 지키면서 잘 견뎌내고 있다. 정말 위대한 민족이다. 대단한 민족이다. 정치인들도 정치하기 좋겠다."

과연 이렇게 조용하게 질서를 잘 지키기만 하는 민족이 위대하고 대단한 민족일까? 일본 정부의 무능과 무대책, 그리고 기득권의 횡포가 있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조용히 생존해 나가는 민족이 위대하고 대단한 민족일까? 매사에 시비를 걸고 시끄럽게 하는 것이 꼭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일본 국민들은 오히려 특권 세력에 복종하는 품성을 갖도록 사회화되고 길들여진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러니 정치하기 좋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렇게 권력에 복종하고 봉사하기 위하여 사회적으로 길들여지고 학습되는 인간의 성품 혹은 덕목 중 여성성(femininity)이라는 것이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남성의 권력에 길들여지고, 복종·봉사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주로 강요되는 성품 정향이 그것인데, 이를테면 친절함, 배려, 공감, 돌보기 등 인내하며 남을 위하여 봉사하는 성품들이다. 이러한 여성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지만 남성 지배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어 온 특성이라고 여성학자(feminist)들은 주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남성성(masculinity)과 여성성의 구분을 생물학적인 성(sex)의 구분으로 보지 않고,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젠더(gender)의 문제로 본다.

여성성에 반하는 남성성의 특성들은 강인함, 적극성, 이성, 통제, 돌파력, 용감성 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특성은 알다시피 지배와 권위를 위해 필요한 특성들이다. 이러한 특성들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특성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들이 과도하게 강조되고 우월한 특성이라고 미화되면 소위 남성우월주의인 마초이즘(machoism)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마초이즘의 발현은 여성성의 사람들을 단순한 지배의 대상과 도구로 인식하는 경향이므로 대상이 되는 여성성의 사람들에게 매우 폭력적인 것이며 반인권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권을 존중하는 문명사회에서는 인정되어서는 안 되는 사고방식이다.

젠더와 리더십

그런데 사회나 국가의 지도자들은 국민이나 백성을 이끌기 위해 지배와 권위가 강조되는 항상 남성성이 강한 사람들일까? 물론 아니다. 역사상 위대한 지도자라고 평가되는 지도자 중 많은 이들이 남성성이 강했지만 반면에 여성성이 강한 지도자들도 많이 있다. 또한 남성 지도자가 남성성이 강하고 여성 지도자가 여성성이 강한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전 총리 대처는 여성이라도 남성성이 강한 지도자이며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경우에는 여성성이 강한 남성 지도자이다.

그렇다면 남성성의 리더십과 여성성의 리더십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상황과 피아(彼我)의 구별에 달려있다. 예컨대 남성성은 대상에 대한 지배뿐만이 아니라 험악한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경쟁과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필요한 덕목들이다. 따라서 국가가 전쟁의 위협에 있거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전쟁의 상대나 위협을 주는 적에 대해서는 매우 남성적인 리더십이 필요하다. 이 경우 적에 대해 여성적인 리더십을 구사한다면 자기편인 국민으로부터 매우 유약한 리더로 무시당하게 된다. 대부분의 전쟁 영웅들이나 위기를 돌파한 지도자들이 남성성의 리더들이다.

마찬가지로 남성적인 리더십은 외부의 위협인 폭력적인 압제와 독재에 저항하기 위한 저항의 리더십에도 필요하다. 험악한 상황에서 폭압에 맞서 승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반체제 운동가나 혁명가들에게서 남성성이 물씬 풍기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한편 국민들이나 구성원을 밀어붙여서 목표를 달성하게 하고, 권위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동원, 통제하는 것도 남성적인 리더십이다. 권위주의 경제발전을 한 박정희 리더십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여성적인 리더십은 어려움에 처한 자신의 백성과 국민을 보호하고 배려하려 할 때 나타나며, 민주주의 시대에 탈권위를 지향할 때 나타난다. 즉 피아의 구별에서 우리 편을 상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돌보고, 보살피는 리더십이 여성적인 리더십이다. 위협적인 밖에 대해서는 남성적이지만 안으로는 여성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지도자와 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이러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위기의 상황에서 안팎으로 여성적이거나, 안팎으로 남성적이면 신뢰를 못 주거나 국민이 피곤하고 지쳐버리게 된다.

ⓒ문재인 페이스북

나꼼수 비키니 사건, 문재인 지지율 상승, 그리고 젠더 리더십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2월 첫째 주를 뜨겁게 달군 뉴스 중 중요한 뉴스를 두 개 골라본다면 하나는 '나꼼수' 비키니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안철수 원장의 지지율을 추월한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의 지지율이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많은 위협과 위기, 그리고 폭력이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가 국가에 의한 시민의 자유에 대한 폭력이며 민주주의의 위기이다. 이제 언론에서 하나 둘씩 터지기 시작했지만 현 정부의 많은 통제와 억압과 거짓이 민주주의를 후퇴시켰으며 국가의 공권력 및 기득권 언론을 통하여 국민의 표현의 자유와 알권리를 억압하여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꼼수라는 프로그램은 반정권적인 저항적 매체이다. 이명박 정부라는 (국민에 대해) 매우 남성적이고 억압적인 정부에 대항해 역시 강한 남성성으로 저항하는 '속풀이'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감히 이명박 정부에 저항하지 못하는 많은 국민들을 대신해 용감하고 자신감 있게 도전하고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민주주의에 매우 순기능적인 매체이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꼼수 비키니 사건은 저항적 매체의 남성적 특성에 심취하면서(마초이즘) 제대로 된 피아(彼我)의 구별을 상실한 나꼼수를 보여준다. 즉, 우리 편이 아닌 저편이라는 범주에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라 남성의 지배 대상과 도구로서 여성을 포함시켜 버린 것이다. 이는 어쩌면 예견된 사건이다. 왜냐하면 나꼼수가 처음부터 매우 남성적인 프로였기 때문이다. 이는 진행자의 구성과 사용되는 언어와 표현에서 알 수 있으며, 처음부터 남성성이 필요한 저항적 매체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꼼수가 남성성을 통해 권력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여성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무뎌진 것이다.

문제가 된 발언들을 보자. 김용민 PD는 "정 전 의원께서 독수공방을 이기지 못하시고 부끄럽게도 성욕감퇴제를 복용하고 계신다. 마음 놓고 수영복 사진을 보내시기 바란다"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주진우 <시사IN> 기자는 "가슴 응원사진 대박이다. 코피를 조심하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핵심은 비키니 사진이라는 여성의 표현 방식이 아니다. 몸을 사용한 표현의 방식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저항과 비판을 위한 나꼼수의 남성성이 이명박 정부를 향한 도전뿐만이 아니라 여성을 남성에 대한 복종과 봉사의 대상으로 포함시킨데 있다. 즉, 여태껏 같은 편이었던 여성을 봉사의 대상으로 순식간에 전화시킨 남성적 권력에 취한 모습, 마초이즘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러한 문제 의식을 꿰뚫고 있지 못하다면 나꼼수의 순기능은 이제 피아구별의 실수로 인해 사라져갈 것이다. 특히 저항과 비판의 대상인 이명박 정부가 퇴진함과 동시에.

반면 또 하나의 사건인 문재인 이사장의 안철수 원장 지지율 추월 현상은 문재인 이사장의 균형 잡힌 남성성과 여성성의 리더십이 국민에게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고, 반면 여성성의 리더십만이 강조된 안철수 원장에 대해 국민들의 의구심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두 사람 모두 현 정부와 소위 '1%'라는 기득권층에 대항하는 야권의 지도자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현 정부의 실정과 특권층에 대항하는 강한 도전과 비판의 용감성 및 자신감이 요구된다. 이는 나꼼수와 마찬가지로 강한 남성성의 리더십이다. 반면 1997년 금융위기 이후로 삶이 점점 어려워진 99% 혹은 양극화의 아랫부분의 국민들에게는 희망과 보살핌, 그리고 친절 배려의 리더십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부드럽고 인자하고 따뜻한 공감의 리더십이며 여성성의 리더십이다.

문재인 이사장은 이러한 면에서 외부에 대한 강한 남성성과 내부에 대한 강한 여성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사례이다. 공수부대 시절 사진과 격파 시범, 저항적 인권 변호사 시절의 용기가 이러한 남성성의 리더십을 보여주고 있으며 부드러운 이미지와 언어, 침착하고 남을 배려하는 모습, 우리 편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와 공감, 경제 민주화라는 비전 등이 바로 균형 잡힌 여성성의 리더십을 구성하고 있다. 즉 밖과 안에 대해서 적절한 남성성과 여성성의 리더십이 조화되고 있다.

이에 비해 안철수 원장의 리더십은 지나치게 여성적이기만 하다. 부드럽고, 친절하고, 배려하는 리더십은 안철수 원장의 자산이다. 물론 공정한 경쟁에서의 성공으로 국민들에게 희망도 주고 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새누리당, 검찰, 재벌, 보수언론 등 현실정치에서 이들과의 싸움을 계속 회피하고만 있다. 피아의 구분에서 어느 쪽이 우리 편이고 어느 쪽이 저편인지 명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저편에 대하여 강인한 비판과 경쟁의 의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애매한 발언만으로 싸움을 피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입장에서 볼 때 믿고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하기에는 석연치 못하다. 따라서 이러한 모습이 지속될 경우 안철수 원장의 현실 정치에서의 실질적인 지지율은 점점 하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중적 인기와 현실정치에서의 지지율은 크게 다른 것이다.

박근혜 위원장의 딜레마

마지막으로 박근혜 위원장의 지지율 역시 같은 시각에서 분석이 가능하다. 현재 박근혜 위원장의 가장 큰 어려움은 본인이 실정의 근원인 여당의 지도자라는 것이다. 국민의 편에 선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피아의 구별이 어려워진다. 여당과 야당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근혜 위원장의 강점은 남성성의 리더십이다. 당차고, 원칙을 지키고, 칼을 맞는 위기의 상황에서도 "대전은요?"와 같은 침착한 질문을 던지는 남성성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성의 리더십은 상대편이 확실해야 빛이 난다. 박근혜 위원장이 노무현 정부시절 야당의 지도자였을 때같이. 지금은 많은 국민의 상대가 이명박 정부와 특권층과 새누리당이다. 불행하게도 박근혜 위원장의 지지층이 이들과 상당부분 겹친다. 박근혜 위원장의 남성적 리더십이 현정부와 보수 기득권층을 향할수록 집토끼가 달아날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고 남성성의 칼을 국민들에게 들이댈 수도 없다.

최근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박근혜 위원장을 대신해 남성성의 칼을 현 정부와 특권층에 겨누기 시작했고, 박근혜 위원장은 경제민주화와 부드러운 이미지 전략으로 여성성의 손길을 국민들에게 내기 시작했다. 이러한 비대위를 통한 리더십의 전략과 여성성의 리더십 전략은 어느 정도 성공을 하고 있다. 문제는 비대위가 언제까지나 박근혜 위원장의 대리전을 해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데 있다. 박근혜 위원장의 대선 지지율은 이러한 딜레마의 극복에 달려 있다. 안과 밖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도 없고 또 안할 수도 없는 딜레마이다. 어느 쪽에 남성성의 칼을 들이대고 어느 쪽에 여성성의 손길을 내밀 것인가?

☞ 미래智 '마이너리티 리포트' 동영상 바로가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