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화 체제는 1999년 출범해 3년 동안은 실물은 없이 금융결제 수단으로만 사용되다가 2002년 1월 1일부터 그리스, 핀란드를 포함한 12개국, 3억600만명 인구의 법정통화로 일제히 통용되기 시작했다.
▲ 올해는 유로화의 실물 지폐와 동전이 유통된 지 10년을 맞는 해다. 하지만 역사적인 통화동맹 유로존은 10년만에 붕괴설이 나도는 처지가 됐다. ⓒAP=연합 |
기세 좋게 출발한 유로화는 4년 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 때는 한 때 '1유로=1달러60센트'까지 가치가 올랐다. 그런데 지금은 1유로가 1달러30센트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하락 폭보다 이처럼 약세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로화의 출범은 역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현재 세계의 기축통화인 달러는 미국이라는 한 나라의 통화다. 그런데 민족과 역사가 서로 다른 나라들이 같은 통화를 쓰기로 한 것은 유로화가 처음이다.
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통화동맹이라는 점에서 과연 유로화를 함께 쓰기로 한 이 통화동맹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말들이 많았다. "정체성이 모호해 위기 때 '반드시 지켜내야한다'는 구심점이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프리드먼의 경고 "좋지 않은 상황 닥칠 때 시험대에 오를 것"
당시 가장 유명했던 비관론은 지금은 작고한 밀턴 프리드먼이라는 저명한 미국의 경제학자의 경고였다. 프리드먼은 "세월 좋을 때는 유로화 동맹은 잘 나갈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을 때 중대한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현재 유로존 위기는 프리드먼의 경고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극복하느라 유로존 전체가 경제 상황이나 재정이 부실해진 상태에서 일부 나라들이 국가부채 위기에 나라가 파산날 지경으로 몰리자 각자의 손익 계산에 분주해진 것이다.
사실 유로 통화동맹은 '장밋빛 전망'이 아니라면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유로존이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대비하기보다는, 유로의 이점으로 유럽 통합이 가속화되고 동반 번영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압도하는 분위기에서 유로의 출범이 가능했던 것이다.
냉정히 따져보면 유로존은 처음부터 불안정한 체제였다. 경제 규모나 경쟁력이 제각각인 나라들이 환율과 금리 같은 통화정책을 똑같이 적용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은 일부 유로존 회원국들이 부채 위기 속에 빠져 지원을 요청하게 된 원인과 무관하지 않다.
독일, 최대 수혜자이지만 위기 때는 소극적
예를 들어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유로존 창설을 주도하면서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만일 각자의 통화를 쓰는 경우라면 경쟁력이 강한 독일은 자국의 화폐 가치가 높아지면 환율이 낮아져야 하고, 그리스 같은 나라는 경쟁력이 약해 화폐 가치가 낮아지면 환율은 높아져야 한다.
환율이 높아지면 상대방 나라의 화폐로 매겨지는 수출 가격이 싸진다. 그래서 자기 수준에 맞게 수출 같은 것을 하면서 경제 성장을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유로존에서는 오히려 독일은 상대적으로 값싸게 수출을 할 수 있게 되고, 그리스는 비싸게 수출을 하게 되는 상황이 지속됐다.
실제로 유로존 출범 이후 독일은 유로존 위기 속에도 지난해 3% 성장을 할 만큼 혼자 잘 나가고 있다. 유로존 2위 국가 프랑스조차 '트피플 A' 신용등급에서 탈락할 만큼 경제 성장이나 재정이 좋지 않은 상황이며, 3위 이탈리아는 아예 부도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리스는 지금 유로존을 붕괴시킬 뇌관으로 떠오르며 '애물단지'가 됐지만 그리스 입장에서 억울한 점도 많다.
그리스는 왜 '유로존의 뇌관'이 됐나
경제가 어려우면 금리라도 내려서 통화량을 늘려 사실상 통화가치를 조절하는 방식을 쓰면 되는데, 그것도 못한다. 유로존은 유럽중앙은행(ECB)이 금리를 결정하게 돼있기 때문이다. 유로존 회원국이 되면 경제가 어려워질 때 해당 국가는 손발이 다 묶여있는 셈이 된다.
그리스 경제가 어려워진 것이 빚을 많이 진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 자체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로존에 들어갔을 때 독일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움이 됐다면, 거꾸로 그리스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단맛을 봤다. 즉 빚을 지는 조건이 좋아진 것이다. 상당한 기간 동안 유로 표시 채권을 저금리로 발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정부가 싼 맛에 돈을 마구 빌려 부채가 급증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복지정책에 흥청망청 쓴 탓으로 매도만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리스 경제는 심각한 재벌과두 체제로 이런 쪽에 방만하게 돈이 흘러간 측면도 부정하기 힘들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음모론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 월가에서 일부러 돈을 많이 빌려줘서 그리스 등 일부 유로존 국가들을 몰락시켜 유로존의 붕괴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 최대의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그리스 정부의 분식회계를 교묘하게 감추는 비법을 제공하며 도와준 것으로 드러났다. 한 나라가 분식회계를 하면서 돈을 빌리려 했고, 이를 다국적 금융업체가 도와주며 돈을 대거 빌려준 것이다.
이제 국제금융 시장에서는 올해가 유로존 붕괴의 갈림길이 되는 해가 될 지 주목하고 있다. 약간의 시차는 있겠지만, 이르면 올해 봄쯤 그리스가 공식적으로 디폴트를 선언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다.
그리스는 이미 사실상 디폴트 취급을 받고 있다. 이른바 '질서정연한 디폴트'라고 해서 어느 정도 빚을 탕감해주고 대비를 하는 식으로 충격을 최소화할 조치가 따라주는 디폴트이냐, 아니면 모든 협상이 결렬돼 충격적으로 전면 디폴트가 되느냐의 선택만 남아있다.
중동 국부펀드도 외면하는 그리스 국채
최근 프랑스 등 유로존 국가들의 무더기 신용등급 강등 사태에도 세계 주요 증시가 큰 변동을 보이지 않고 있어, 일각에서는 '이제 유로존 위기가 해소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게 아니냐'는 낙관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금융계에 따르면, 중동의 국부펀드가 대거 자금을 동원하면서 금융위기의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발 금융위기 때도 파국을 면하게 한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알려진 중동의 국부펀드가 다시 나선 것이다.
하지만 중동의 국부펀드도 그리스 국채만큼은 건드리지 않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그리스에 대한 2차 구제금융의 핵심 조건인 민간채권단과의 채무탕감 협상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일단 결렬됐던 협상이 19일(현지시간) 다시 재개됐다고 하지만, 이틀째 어떤 합의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만일 1월 말까지 그리스를 둘러싼 협상에 중대한 진전이 없으면 무질서한 디폴트가 불가피하고, 이렇게 되면 위태위태한 이탈리아 등으로 연쇄부도 사태가 이어질 것이라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런 상황은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연결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유로존 붕괴가 불러올 타격이 그렇게 크다면 어떻게 해서든 협력해서 막을 수 것이라는 낙관론은 여전하다.
'치킨게임'의 결말은?
그러나 수습 과정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유로존은 출범 때부터 같은 화폐를 쓰면 환리스크가 사라지고 자본이동이 자유로워 교역이 확대된 다는 등 이점만 생각했고, 위기 때는 어떻게 되겠지 하는 안이한 발상으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완전한 통합, 즉 이른바 '유럽합중국'으로 가는 전단계로서 유로화가 출범했다면, 미국 연방처럼 유럽 차원에서 대책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나라별로 정치적으로나 재정적으로는 독립되어 있다보니 "왜 우리가 남의 나라 도와야 하느냐"는 각 회원국들의 여론이 강하다. 현재 유럽의 지도자들이 이런 자국의 여론을 무릅쓰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다.
그러다보니 서로 도와 함께 성장하는 방안이 눈에 보일 정도로 뻔해도 회원국들의 합의는 좀처럼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 대신 "뼈를 깎는 긴축부터 하겠다고 약속하면 좀 도와주겠다"는 입장에 머물고 있다.
다만 현재 시장에서는 이렇게 함께 망하는 길로 가는 것은 누구도 원치 않기 때문에 일종의 '치킨게임'이 계속되다가 막판에 극적인 타협이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문제는 헤지펀드 등 투기세력들이 이런 낙관론을 악용해 성대한 도박판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다. 부도가 날 경우에 대비한 보험까지 들어놓고, 어떻게 되든 자기들은 돈을 벌 수 있는 베팅을 해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유로화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은 유로존의 향방은 올해 내내 최대의 화두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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