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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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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체르노빌, 후쿠시마를 넘어

[시론] 핵발전소 '재기' 위한 핵안보 정상회의는 안 된다

2012년 '핵'과 관련하여 3가지가 떠오른다. 2012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1주기, 북한 '핵'이다. 3월에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 1주기와 서울 핵안보정상회의가 열릴 예정이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 이후 북한은 김정일 위원장의 혁명유산의 하나로 '핵과 위성'을 제시했다. 먼저 핵무기, 핵발전소, 핵안보 정상회의 이야기, 그리고 내 생각을 적어본다.

핵무기 이야기

1999년 12월 일본 평화활동가의 추천으로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피폭 여성을 인터뷰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관계자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그 여성도 많은 사람들처럼 방사능의 고열로 몸의 일부가 녹았다. 그 흉터를 없애기 위해 수십번의 성형수술을 했다고 한다. 고열로 몸이 녹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있는 원폭이 스쳐간 여러 유물을 보며 '아, 피부가 그렇게 녹는구나'하며 돌아섰다.

공원을 돌아다니다 외진 곳에 있는 조선인 피폭자 묘지를 우연히 보았다. 묘지에는 덩그러니 종이학 목걸이만 몇 개 있었다. 누가 그런 곳에 조선인 피폭자 묘지가 있는 줄 알겠는가? 원폭 투하로 조선인 4만 명이 숨지고, 3만 명이 방사능에 피폭된 걸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전체 피해자의 10%에 해당하는 숫자라고 한다.

식민지, 전쟁, 피폭, 살이 녹는다….

그날 경험이 내가 핵무기에 대한 비타협적 입장을 갖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편 그 때 받은 충격은 하나의 상처로 남았다. 2000년 히로시마 원폭 피해의 절절한 경험을 그린 만화 <맨발의 겐>이 국내에 번역되었을 때 차마 읽을 수가 없었다. 몇 장 읽으니 고열로 녹아내리는 인간 군상을 보며 히로시마의 그녀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 히로시마 평화공연에서 열린 반핵 시위 ⓒ연합뉴스

핵발전소 이야기

2011년 3월 11일 DMZ 평화동산에서 한국평화활동가대회가 열리고 있던 날, 일본에서 지진이 발생하고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몸이 녹아내리지는 않겠지만 방사능에 피폭되어 시름시름 앓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나는 히로시마 여성이 떠올랐다. 기억하고 싶지 않던 그녀가 내 등을 떠밀었다. 그동안 피했던 <맨발의 겐>과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수만은 없는 일이 된 것이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1986년 4월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을 소재로 주인공 이반 가족의 이야기를 형상화한 평화소설이다.

소설 서두에 이상희 시인의 글이 눈에 띄었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알게 된 것이 후회스럽다. 이것이 그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진저리치게 만들어 보려고, 어느 예민한 영혼이 상상해서 빚어낸 이야기라면 얼마나 좋을까? 인류에게 헌신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른바 문명의 이기라는 것이 어떤 전쟁 무기보다도 끔찍한 악행을 저질렀고, 앞으로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사실에 온몸이 떨릴 뿐이다. 무엇보다도, 진정되지 않는 손으로 검색해 본 바 이 사건의 진실과 교훈이 대체로 축소되고 은폐되어 있다는 것이 더욱 두렵고 끔찍하다."

소설을 읽으며 이상희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치솟는 새빨간 불길이 나를 감싸고 무색무취의 방사능이 우리 아이들을 집어삼키기라도 하듯 소설에 빨려 들어가며 문득 이반과 같은 나이인 아들 동민이가 떠올랐다. 동민이와 같은 아이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간다는 생각에 눈물이 빰을 적신다.

소설 저자 히로세 다카시는 후기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관련한 기사를 통해 피해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1992년 4월 <LA타임즈>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당시 인근에 살았던 사람들의 조사 결과가 나왔다. 체르노빌에서 수 킬로미터 떨어진 우랏시라는 벨로루시 공화국의 마을에 살다가 사고 후 거기서 피난한 235명의 주민을 추적 조사한 바 35명이 이미 암으로 사망했다. 이것을 비율로 따지면 전체의 15%에 이른다. 당시 체르노빌에서 반경 30km 내에는 13만 5천명의 주민이 있었다. 게다가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 또한 갑상선암 내지는 그 초기 증상으로 고생했다."

구소련 정부는 체르노빌 사고를 감추고 피해자를 각지에 분산시키고 의사들을 압박해 그 사고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마을로 흩어져 버린 방사능 피해자들이 어떻게 죽어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2011년 일본 지진과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폭발은 일본인에게 예기치 못한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2만명이 사망하고 30만명이 강제 이주해야 했다. 후쿠시마현의 경우 강제이주자는 6만명이다. 이 재해는 지진과 쓰나미라는 자연재해와 함께 핵발전소 관리와 관련한 인재(人災)가 결합된 것이다. 후쿠시마 사태는 원전 냉각장치의 전원만 망가져도 방사능 물질이 엄청나게 발생하여 커다란 위험을 안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일본은 '원자력 르네상스'를 주창하며 기후변화 문제의 대안으로 핵 발전을 부각시키고자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후쿠시마 사태는 일본의 원자력 발전소 안전신화가 거짓이었음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핵안보 정상회의 이야기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009년 4월 프라하 연설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고,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3개 축(핵군축, 핵비확산, 핵안보)의 하나로 '핵안보'를 제기했다. 핵안보 분야에서 "4년 내 세계 모든 취약 핵물질의 안보 확보를 위한 새로운 국제적 노력"을 목표로 선언하고, 이를 위해 2010년 '핵안보 정상회의(Nuclear Security Summit)' 개최를 제안했다. 이 회의는 '비국가 행위자에 의한 핵테러'를 방지하기 위한 '핵안보'에 집중하기 위한 회의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는 '국가 행위자에 의한 핵확산' 문제이므로 처음부터 의제로 고려하지 않았다.

비동맹운동(Non-Aligned Movement) 회원국들은 핵안보 정상회의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 비판은 ① 5대 핵보유국이 자신의 핵무기 폐기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면서 비핵국가들에게 새로운 규제를 부과하려고 하는 점, ② 핵무기비확산조약(NPT) 비회원국이면서 핵보유국인 이스라엘, 인도, 파키스탄에게 핵개발에 필요한 무료이용권(free pass)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 ③ 핵보유국들이 자신들의 핵 프로그램에 대한 시찰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 ④ 핵보유국들이 핵폐기 시한을 밝히지 않고 있다는 점 ⑤ 1995년 NPT회의에서 채택된 '중동비핵지대 결의안'이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핵안보 정상회의를 핵보유국이 핵무기를 폐기하지 않으면서 미국 주도의 핵 통제체제를 더욱 강화하려는데 본질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핵테러리즘의 가능성과 위험성을 인정하더라도 유독 이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 속에서 한국 정부는 워싱턴 핵안보 정상회의를 계승해 "2012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 2012년 3월 26~27일 서울에서 개최한다. 이 회의에는 북한을 제외한 모든 핵보유국과 주요한 핵발전국들이 참가한다. 세계 47개국 정상들과 유엔(UN), 국제원자력기구(IAEA), 유럽연합(EU), 인터폴 등 4대 국제기구 대표가 참석한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상회의이다. 핵안보 정상회의의 핵심 의제는 고농축우라늄과 플루토늄의 안전관리 방안 마련과 원자력 안전문제, 더티밤(핵테러용 폭발물의 일종) 등 핵 테러문제이다.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와 관련하여 3가지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첫째, 핵테러 방지 체제와 관련된 것이다. 현재 핵테러와 관련하여 2개의 국제협약(핵테러억제협약, 핵물질방호협약), UN 결의 1540호, 세계핵테러방지구상, G8 글로벌파트너쉽, 워싱턴핵안보정상회의 합의 등 핵안보에 대한 다양한 국제적 대책이 있다. 그리고 핵안보에 대해 IAEA가 중심역할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핵안보 정상회의에서 다루는 의제가 기존의 핵안보 체제의 강화를 통해서 달성 가능한 의제이다. 굳이 정상회의를 개최하지 않더라고 기존 핵안보 관련 시스템의 유지 강화를 통해 추진할 수 있다는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둘째, 핵발전(원자력 발전) 안전문제이다. 핵안보 정상회의의 부대 행사로 '원자력 인더스트리 서밋(Nuclear Industry Summit)'이 열릴 예정이다. 세계 핵 발전 관련 CEO들이 모여 핵 발전의 안전성과 우수성을 널리 알릴 계획이다. 한국 정부 역시 후쿠시마 사고 이후 '위기는 기회'라며 핵발전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제고하기 위한 기회로서 이 회의를 보고 있다. 핵발전소에 대한 대안이 아니라 핵발전소의 재기(再起)를 위한 기회로서 핵안보 정상회의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체르노빌 사고와 후쿠시마 핵사고를 계기로 핵발전의 위험성이 각인되었다. 독일, 이태리, 스위스 등은 탈핵발전 정책으로 선회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탈핵정책이 아니라 핵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할 계획이다. 한국은 이미 21기의 핵발전소를 가지고 있으며 핵발전 비중이 35%에 달하고 핵발전소 밀집도가 주요국가들 중 최고치에 달한다. 더욱이 2024년까지 34기로 확대하여 핵발전 비중을 59%까지 늘리려고 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최근에 삼척과 영덕을 신규핵발전소 후보지로 선정하였다.

셋째, 북핵 문제가 주요 의제가 아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북을 초청할 수 있다고 발언하였지만 북한은 북핵문제를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와 연동해서 풀려고 하기 때문에 핵안보만을 다루는 국제회의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서울 핵안보 정상회의의 표어는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글로벌 코리아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갑니다"이다.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는 핵발전소 밀집지역에, 당면한 북핵 문제를 풀기위한 협상도 없는 곳에서 시작할 수 없다. 더욱이 성 격차 지수가 세계 135개중에서 107위인 한국에서 시작할 수 없다. "더 평화롭고 안전한 세계, 글로벌 코리아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 가기 위해서 정부는 탈핵대안에너지정책으로 전환, 북한과 협상, <여성·평화·안보에 대한 국가행동계획(NAP)>의 채택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내 이야기

후쿠시마 사태 이후 나 자신을 많이 되돌아본다. 우리가 핵문제에 관심을 갖아야 하는 이유는 핵의 위험성이 내 자신과 가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핵무기와 핵발전소의 물질적 피해가 단 하나뿐인 생명을 죽이고 있다. 히로시마,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경험에서 핵무기와 핵발전소가 우리의 인생을 비극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여러 질문이 떠오른다. 북한은 핵무기를 버릴까? 핵발전소가 없다면 전기는 어떻게 해? 일상생활에서 핵의 위험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데 핵발전소와 핵무기 폐기를 얼마나 설득력 있게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실천할 수 있을까? 등등

이러한 질문을 하면서 나의 생활과 사상에 대해 성찰해본다. 신영복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우리가 사실과 진실을 안다면 "반전사상이든 반핵평화사상이든 어떤 사상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정작 어려운 것은 그러한 사상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삶의 정서로서 일관되게 지니고 살아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비록 자기가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없으며 비록 자기가 주장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삶과 사상의 조화, 이것이 자기관리의 기본과제라고 생각된다."

삶과 사상의 조화, 그 무거운 과제를 깨닫는다. "핵무기와 핵에너지는 안돼"라고 외치면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다시 묻는다. 그리고 겐을 불러본다. 겐, 나에게 힘을 줘!!

* 이 글은 '평화를만드는여성회'의 2012년 소식지 준비호 2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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