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연합군의 대규모 반격이 시작되면서 중국 의용군과 북한 인민군은 10여 만의 전사자를 내며 퇴각했고, 3월 2일에 한국군이 한강을 넘어 14일에는 서울을 되찾았다. 다시 북진했으나 대대적인 공격이 없이, 참호를 중심으로 한 진지전이 계속되었다. 결국 38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쟁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미국과 중국은 휴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951년 3월 24일 한만 국경까지 진격하기 전에 정전은 안 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어떤 종류의 휴전협정도 반대했으며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오로지 남한에 의한 한반도 통일을 원했다. 그는 '중국군의 완전 철수, 북한 공산당 해체, 인민군 무장해제' 등을 협상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승만은 1951년 7월 "유엔군이 한국의 분할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장해 달라"라는 서한을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이승만의 의도와는 달리 휴전을 향해 달려갔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이젠하워는 1952년 10월 디트로이트 연설에서 "명성을 걸고 한국전쟁을 조기에 명예롭게 종결짓겠다"고 천명했으며 "새로운 행정부의 정책은 한국전쟁을 끝내는 일에 집중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결국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공약이었던 한국전쟁의 종결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12월 2일 극비 한국을 방문해 사태파악에 나섰으며 남한의 정치적 위기 (당시 임시수도인 부산은 계엄령 하에 놓이게 됐는데, 이승만이 1952년 국회 간선을 통한 재선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직선제를 골자로 한 '발췌개헌'을 만들자 야당과 국민들로부터 강한 반대에 부딪힌데 따른 조치였다)는 전적으로 이승만으로 말미암아 일어났다고 판단했다.
특히 이승만은 전방에서 전쟁을 직접 치르고 있는 한국군 전투부대를 철수시켜 계엄군으로 사용하려 했기 때문에 아이젠하워와 미국의 수뇌부는 이같은 위기가 휴전협상뿐만 아니라 38도 상에 진행되고 있는 군사작전마저도 위협한다고 보았다.
미국과 아이젠하워에게 이승만은 한마디로 골칫덩어리였으며 자신들의 공약을 반대하는 매우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북진통일에 대한 고집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대세가 휴전으로 흘러가자 1953년 6월 18일 이승만은 미국과 연합국의 협의 없이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전격 석방해 미국이 주도하고 있었던 휴전협정을 방해했다.
이에 미국은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국에 임시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극비의 군사쿠데타 계획 '에버레디 프로젝트'(Everready project)까지 준비하게 된다. 에버레디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이승만이 미국에게 얼마나 골칫거리였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승만은 미군을 한국에 주둔케 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냄으로써 휴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한국은 휴전협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에서 배제되면서 한국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매우 불완전한 주권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서 손을 맞잡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
21세기형 에버레디 프로젝트 시동?
60년가량이 지난 역사를 이렇게 들춰보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역사가 다시 반복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어서 이다. 남북 고위급 베이징 비밀회의 내용을 북한이 이례적으로 공개하면서 남북관계는 이제 회복하기 매우 어려운 국면이 되어 버렸다. 비밀회의의 내용을 두고 남북 간의 공방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지만, 중요한 점은 앞으로 더 이상은 남북관계 회복에 기대를 걸 수 없다는 것이다.
북한은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통해 김정일이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듯이 남북 정상회담에 대해 일정한 진정성을 보여 왔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북한이 받기 어려운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에 대한 사과와 책임있는 조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통일부가 지난 6월 5일 통일정책실에 위기대응과를 설치하는 내용을 담아 '통일부와 그 소속기관 직제 시행규칙'을 고쳤다고 밝힌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 정부의 북한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은 북한의 내부적 붕괴(implode)인 것 같다. 즉, 기다리면 붕괴될 터인데 (아니면 붕괴될 정권인데) 굳이 정상회담이 필요하겠냐는 판단이다.
그러나 북한 붕괴의 실마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지난 1월 노동당대표자회의에서 볼 수 있듯이 고난의 행군 기간 와해되었고 약화되었던 노동당 조직을 새롭게 재정비했으며 중국과 경제협력을 통해 경제 상황도 점차 좋아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미국과의 핵 협상도 다시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단지 정권의 생존뿐 아니라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미국과의 관계정상화까지 목표로 하고 있다. 현재 북한은 김일성의 유훈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강성대국 건설이 최대 유훈이며 조선반도(한반도) 비핵화와 조국통일도 유훈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과연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핵을 포기하고 곤경에 처해있는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을 볼 때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북한은 비핵화에 대한 기간을 정하지 않았다. 북한은 핵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는데 지난 6월 12일 김관진 국방부 장관이 국회 국방위에서 밝혔듯이 핵무기 소형화까지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폐기(CVID)를 요구했지만, 이것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한 최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지 정작 협상에 들어가면 이보다 낮은 목표, 가령 '일단 비확산'에 합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으로서는 더 높은 단계의 핵개발 기술을 가지려고 노력할 것이다. 미국은 북한의 핵기술 발전을 차단하기 위해서라도 협상을 하려 할 것이다.
북한 문제가 미국의 외교 우선순위에서 늘 밀리기 때문에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G2' 국가로 떠오른 중국 입장에서도 북한의 핵개발을 뒷짐 지고 볼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따라서 지난번 1월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핵 문제에 대한 모종의 합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종합해 볼 때, 북핵 문제를 두고 북한과 미국 그리고 중국 간의 협상, 나아가서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북미 간의 국교정상화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와 협상이 그리 멀지 않은 시기에 이루어 질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한국이 60여 년 전의 정전협정에서도 그랬지만 평화협정에서도 제외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남북 간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북미 간의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다면 한반도 통일은 늦어 질 것으로 보인다.
통일은 남북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능키는 아니지만, 분단은 남과 북의 사회가 발전하는데 커다란 장애물로 작용하며 불신, 갈등, 그리고 대결의 구도로 인해 남북한 모두는 쓸데없는 분단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이로 인해 현재 세계경제의 중심축으로 부상하고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도 날개를 펴지 못하고 세력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할지도 모른다. 또한 같은 민족으로서 갈라져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대립한다면 세상에도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다.
11년 전 오늘 역사상 처음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 6.15 선언을 했다. 이른바 '6.15 정신'이란 외부에 좌우되지 말고 남과 북이 화해를 통해 스스로 평화를 만들고 통일을 이루자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 생각해 내고 만들었던 것인가에 상관없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어느 나라도 남한과 북한의 이익과 운명을 지키거나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북 정상회담은 서로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하는 정치적 쇼가 아니다. 60여 년 전의 역사가 되풀이되려 하고 있다. 한동안 베스트셀러였던 <시장을 뒤흔든 100명의 거인들>(100 Minds that made the Market)의 저자 켄 피셔(Kennerth L. Fisher)는 자신의 연구 결론 그리고 교훈을 이렇게 적고 있다. "과거에서 배우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불행한 과거는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민족 모두가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는 1년 반도 채 안 남았다. 임기 말에 와있다. 그러나 1년 반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며 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의 화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6.15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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