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는 지난 1987년 국민투표를 통해 원전을 폐기하기로 했으나,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늘어나는 전력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 2014년부터 4기의 신형 원자로를 건설하고 2030년까지 원자력 에너지 비율을 25%로 높인다는 계획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발생한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태로 인해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짐에 따라 베를루스코니의 계획이 좌절됐다. 이번 국민투표의 참여율은 약 57%로, 영국 <BBC> 방송은 "이전에 실시된 투표들보다 현저히 높은(significant) 투표율"이라고 보도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종종 주요 정책 사안에 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지만 1995년 이후 모든 국민투표는 투표율 50%를 채우지 못해 무효가 됐다. 원전 재도입을 추진해 온 측에서는 이번에도 '혹시나' 하고 기대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실제 베를루스코니 정부가 지난달 원전 부활 계획을 동결한다고 밝힌데 대해 야당은 국민투표 참여율을 낮추기 위한 '김빼기 작전'이라며 비난해 왔다.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이번 투표에서 원전 재도입에 반대하는 쪽에 표를 던진 유권자가 무려 94%를 기록했으며 <BBC> 방송은 반대율을 96%라고 전했다.
유럽에서 가장 지진‧화산활동이 활발한 국가 가운데 하나인 이탈리아에서는 평소 원전 반대 여론이 60% 내외였으나 후쿠시마 사태 이후 90%까지 치솟았고, 이런 여론 추이가 그대로 투표로 반영된 셈이다.
베를루스코니는 투표 직후 성명을 발표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그는 투표에서 나타난 국민의 뜻은 명백하다면서, 정부와 의회는 이같은 국민의 뜻을 완전히 받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가 13일(현지시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 중 손가락을 눈썹 쪽에 대며 지친 표정을 보이고 있다. 이날 이탈리아 국민들은 57% 투표에 90%이상의 반대로 베를루스코니의 원전 재가동 법안을 폐기시켰다. 야당은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AP=연합뉴스 |
베를루스코니, 원전만 문제가 아니다
이번 국민투표에서의 패배는 베를루스코니에게는 정치적 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원전 재도입 건과 함께 투표에 부쳐진 수도 사유화(민영화) 법안, 최고위 공직자에 면책권을 부여하는 법안 등도 함께 부결됐다.
이는 앞서 지난달 치러진 지방선거에서의 여권 패배와 함께 뼈아픈 타격으로 평가된다. 특히 여권은 베를루스코니의 고향 밀라노 시장 선거에서도 패배했다.
투표 결과가 나오자 이탈리아 야당은 곧바로 베를루스코니의 사임을 요구하고 나섰다. 피에르 루이기 베르사니 민주당 대표는 "유권자들이 베를루스코니로부터 이반하고 있다"며 "이번 국민투표는 정부와 국가의 '이혼'에 관한 투표"라고 주장했다. 베르사니 대표는 "오늘은 진정 놀라운 날"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민주당은 이번 투표에 부쳐진 법안들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혀 왔다. 수도 사유화 법안은 물값 인상만 초래하고, 고위공직자 면책 법안은 미성년자 대상 성매매 혐의 등 4건의 재판을 앞두고 있는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방탄 법안'이라는 이유에서다.
베를루스코니는 의회가 자신에 대해 부여한 면책특권이 최근 사법부에 부정당하면서 재판에 출석해야 했지만, 13일에 열린 심리에도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의 회담 때문에 출석하지 않는 등 '중요한 사무'를 이유로 종종 불참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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