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까지 1000여 명의 민간인이 사상당한 것으로 알려졌고, 이것이 이유가 되어 국제공동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리비아 거주 시민을 "보호할 책임"(Responsibility to Protect: 이하 R2P)을 명분으로 군사 개입에 돌입했다. 리비아 사태가 국제공동체의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R2P를 이유로 한 군사행동이 처음으로 적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의 대리비아 결의
유엔 총회는 2005년 세계정상회의 결과를 담은 결의문(A/RES/60/1)을 채택하면서 R2P를 국제규범으로 처음으로 공식 채택했다. R2P는 집단학살, 전쟁범죄, 인종청소, 반인도적 범죄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책임이 해당 국가와 국제공동체에 있다는 기존의 국제여론을 반영한 것이다.
2005년 유엔 총회 결의문에는 먼저 해당 국가의 시민 보호 책임과 그에 대한 국제공동체의 지지를 언급하고 있고(138항), 국제공동체도 외교적, 인도적, 그 외 다른 평화적 수단을 통한 책임이 있는 동시에 그런 방법이 부적절하고 해당국이 명백하게 R2P에 실패할 경우 시의적절하고 단호한 방식으로 집단행동을 준비한다(139항)고 밝히고 있다.
위 결의는 R2P 달성을 위해 유엔 집단학살 방지 특사의 역할을 지지하고(140항), 관련 지역기구와 협력하여 4대 국제범죄의 발생 가능성에 대한 조기경보 활동을 통한 예방과 그 피해자들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할 것을 덧붙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카다피 정권은 시민 보호의 책임을 스스로 저버리고 오히려 시민의 인권와 발전을 억압해 R2P의 적(敵)으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국제공동체가 카다피 정권에 대해 오랫동안 감시와 비난을 해오다가 유엔 안보리가 두 차례의 대(對)리비아 결의를 통과시킨 것은 격세지감이 있지만 적절하고 정당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월 17일 벵가지에서 '분노의 날' 집회에 대한 카다피 정권의 유혈 진압과 그 이후 시위 확산, 그리고 2월 22일 국영TV를 통한 카다피의 공개적인 시위대 진압 지시와 같은 상황에서 의결된 2월 26일의 안보리 결의 제1970호는 무기금수, 경제제재, 카다피 정권 고위인사들에 대한 자산동결 및 여행 금지 등의 조치를 담고 있다. 이후 카다피 정권은 시위대에 알카에다가 개입해 있다고 주장하며 국제공동체의 이목을 분산시키며 반정부세력의 근거지인 벵가지 인근까지 진격하며 반정부 시위대에 학살을 자행했다. 카다피 정권의 과거 전력을 감안할 때 국제공동체가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면 반정부 민주화 세력은 처참하게 괴멸되었을지도 몰랐다.
3월 17일 안보리는 외국군의 리비아 점령을 제외한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to take all necessary measures)" 리비아 거주민과 거주 지역을 보호할 것을 골자로 하는 결의 제1973호를 의결했다. 물론 이 결의는 만장일치로 통과되지 않았다. 결의에 따라 취해진 리비아 공습에는 석유, 투자, 난민 등 리비아와 지경학적으로 이해관계가 높은 프랑스, 영국, 이태리가 선두에 섰고 미국이 이를 지지하는 형국이다.
따라서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국제공동체가 유엔 안보리의 두 차례 결의를 통해 리비아 거주민을 보호할 책무를 자임하고 행동에 나선 것은 그 명분과 의도에 있어서 정당하고 국제적 지지를 받을만하다. 이는 냉전 붕괴 이후 인권과 같은 보편 규범이 국가주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새로운 국제여론이 실제 국제정치 현실에서 관철된 사례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적지 않다 하겠다. 안보리 결의와 그에 따른 조치는 조직적으로 인권을 침해하면서 정권안보를 위해 국민보호의 책임을 저버리는 정권에게는 강력한 경고로 작용할 것이다.
이상주의 시각에서 볼 때 보편 가치가 국가이익을 압도해야 하겠으나, 최소한 국가이익이 보편 가치를 부정하지 않거나 그 실현을 지지할 경우를 차악의 선택으로 인정하는 것이 너무 현실주의적인가? 여기서 R2P 규범을 국제공동체로 끌어올린 '인간안보(human security)' 담론이 국가안보를 대체하지 않고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임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 지난 9일 리비아 타미나에서 열린 친 카다피 세력의 시위. 서방의 군사 공격은 리비아 정권의 강화로 이어지고 있다. ⓒAP=연합뉴스 |
R2P의 실험 혹은 시련
그러나 유엔 안보리의 결의 자체가 리비아에서의 R2P 달성을 보장할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인간안보 달성을 위해서는 일단 생존의 위협에 처한 시민을 보호하고(protect) 나서, 이들이 공포와 빈곤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는(empower)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안보는 정치적 자유와 함께 지속가능한 발전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R2P는 그 필수조건이라 말할 수 있다.
2001년 캐나다 주도의 '개입과 국가주권에 관한 국제위원회(ICISS)'가 작성한 R2P 보고서(RTPR)는 인간안보를 목표로 하는 군사적 개입의 6가지 전제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그것은 정당한 권위, 정당한 명분, 정당한 의도, 마지막 호소로서 군사적 개입, 비례적 수단, 합리적 전망 등이다. 이 조건은 이후 국제문제에 대한 군사적 개입의 판단 기준으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를 이용해 유엔 안보리의 대리비아 결의 1973호와 그 이행을 잠정 평가해보자.
'정당한 명분'과 '정당한 의도'의 측면에서 안보리 결의를 옹호할 수 있다고 앞에서 말했다. 물론 의도면에서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작용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제공동체의 R2P 의지를 막지 못한 점도 인정해야 한다. '정당한 권위' 측면에서는 안보리의 대리비아 결의가 만장일치가 아니고, 나아가 안보리가 인간안보 관련 사안을 결정할 유일한 권위체인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인간안보'는 르완다, 코소보-헤르체고비나, 동티모르, 수단 등지에서의 집단학살, 인종청소, 반인도적 범죄 등에 대한 국제공동체의 비겁하고 뒤늦은 대응의 실패로부터 나온 대안 담론이다. 그런 점에서 금번 안보리 결의는 과거에 비해 덜하지만 그래도 늦었고 조기경보 시스템과 같은 예방 노력이 부족해 민간인 희생을 막지 못한 문제를 안고 있다.
'마지막 호소'로서 군사적 개입에 대해서는 일부 긍정적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이미 안보리 결의 제1970호를 통해 비군사적 조치가 취해지면서 카다피 정권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다. 다만, 유엔의 보다 적극적이고 선제적으로 유혈사태 중단을 위한 압력과 협상 노력이 부족했다. 물론 그런 노력이 있었다해도 잔인하고 기만적인 카다피가 전임 튀니지, 이집트 집권자들처럼 순응했을지는 의문이다.
6가지 개입 조건에 비춰볼 때 안보리의 대리비아 군사 개입에서 가장 큰 문제는 소위 비례성의 원칙과 합리적 전망과 관련한 문제이다. 비례성의 원칙은 군사력을 개입 목적에 부합하게 행사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안보리 결의 1973호는 리비아 반정부세력의 대표를 자처하는 국가과도위원회측이 요구해온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담았고, 지상군 투입을 배제해 과잉 개입의 우려를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다국적군의 트리폴리 폭격이 과잉 군사행동으로 비난받았다. 공습을 주도하는 일부 서방국가 지도자들이 공공연하게 언급하고 있는 카다피 축출도 안보리 결의를 벗어난 것이라는 지적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점들은 일부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처음에는 카다피 정권의 유혈 진압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온 것과 양면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보리 결의 1973호와 그에 따른 군사행동은 합리적 전망, 즉 향후 리비아에서 실천할 인간안보의 과제와 전략을 모색하지 않은 채 이루어진 점이 가장 큰 문제이다. 물론 카다피 정권에 의한 시민 학살을 중단시킬 긴급한 요구에 의해 군사행동이 결의된 것은 불가피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카다피 정권에 의한 R2P 실패의 결과를 파악하고 그 여파를 최소화 해 R2P 달성 이후 리비아 재건 전략을 준비할 다각적인 대응이 함께 추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유엔 안보리만 움직였고 사무국, 인권고등판무관실, 난민고등판무관실, 그리고 유엔개발프로그램(UNDP) 등 인간안보에 관련된 국제기구들은 손을 놓고 있었다. 관련 전문가들과 국제비정부기구들의 역할도 요청되지 않았다. 이처럼 안보리의 결의에 '합리적 전망'이 부재한 이유는 카다피 축출 이후 새로운 친서방정권이 등장해 서방 자본 및 국가의 이익에 알맞은 정치개혁과 사회경제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라는 지적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인간안보의 시각에서 볼 때 R2P는 그 출발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안보리 결의 제1973호와 그 실행은 R2P를 명분으로 이루어진 불충분하고 일관되지 못한 인도적 개입이지 인간안보 관여(human security engagement)라 말하기는 어렵다. R2P가 과거 강대국 정치에 휘둘린 인도적 개입을 정당화시켜주는 또 다른 외피로 작용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
R2P는 인간안보 실현의 필수조건이자 출발로 작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엔 개혁과 해당 국가의 시민사회의 참여를 바탕으로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를 병행 추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국제공동체와 리비아 국가과도위원회의 협력이 중요하지만 그 협력의 내용과 방향이 리비아 시민의 인권과 발전이어야 한다는 점이 더 중요할 것이다.
인간안보와 북한 문제
일부 성급한, 그리고 주관적 기대가 높은 사람들이 리비아 사태에 대한 국제공동체의 개입 방식을 북한에 적용하자는 제안을 하는 경우를 접하게 된다. 북한 정권이 주민들에 대해 광범위하고 지속적으로 인권을 탄압하고 생존을 위협해온 것은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유엔 안보리 결의를 거쳐 북한 최고지도자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하고 북한정권을 교체하자는 주장이 그 골자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남한 인사들은 자신의 주장을, 남한 주도의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북한을 흡수하자는 통일전략으로 연결짓기도 한다.
북한의 인권 침해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협정이 정의하는 반인도적 범죄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또 북한 정권이 나머지 3개 국제범죄를 자행해왔다는 보고는 제출되지 않고 있다. R2P 규범을 적용한 북한정권 교체라는 주관적 목표가 객관적 현실을 과잉해석 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반복하지만) 인간안보를 공포로부터의 자유로 한정함으로써, 광의의 인간안보를 침해하지 않도록 예방하고 침해됐을 경우 재건할 전략을 누락시키는 문제이다.
현실적으로도 북한은 리비아와 같은 경우가 아니다. 카다피 정권은 R2P를 할 의지와 능력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에 최후의 수단을 포함해 국제공동체가 개입했다. 김정일 정권은 어떠한가? 현재 국제공동체가 북한에 리비아와 같은 방식의 개입을 한 상황인가? 국제공동체가 R2P를 명분으로 북한에 군사적 개입을 할 근거는 부족해 보인다. 그보다는 인도적, 외교적, 경제적 방법 등 다양한 평화적 수단을 적절히 조화시켜 북한정부와 협력해 북한 스스로 인간안보를 달성할 수 있도록 지원, 격려하는 노력이 우선이다.
무엇보다 북한이 국제규범을 준수하고 이행하는 행동 변화가 있어야 하고, 관련국들도 북한에 대한 제재와 압박을 풀어 R2P를 포함한 인간안보를 촉진하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당면 과제일 것이다.
리비아는 500개의 부족으로 사회가 분산되어 있는 반면, 민족주의 정서로 정치권력과 시민사회가 통합되어 있지 않다. 북한은 그 반대이다. 단, 하나 공통점이 있다. R2P를 명분으로 한 일부 서방국가들의 대리비아 군사행동과 북한 정권 교체론자들은 리비아/북한 주민들의 인간안보 달성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십자군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자기만족적 태도는 인간안보를 위협하는 정권의 입장을 강화시켜 주는 대신 인간안보를 추구하는 해당국 시민의 역량 조성 노력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점이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작금의 리비아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제일의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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