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장관 후보자들이 위장 전입 등의 비리 문제로 3명이나 낙마했고, 고위 공직자의 자녀 특별 채용 비리가 외교통상부 수장을 필두로 고구마 뿌리를 캐듯 딸려 올라오고 있다. 공정, 즉 '저스티스'(justice)나 '페어니스'(fairness)가 대체 무엇이냐는 질문이 회자되기 적절한 시기다.
마이클 샌델 하버드 대학교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펴냄)가 인문·사회과학 서적의 불모지인 한국에서 올해 최장기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이 책의 인기는 지난 17일 서울 동숭동 일석기념관에서 열린 '2010 인문 주간 사회적 독서 토론회-<정의란 무엇인가> 읽기'에서도 입증됐다. 이 토론회에는 10대부터 노인까지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다양한 연령대의 참석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날 토론회에 앞서 사회를 맡은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는 "이 책은 (한국 사회와는 달리) 미국 사회가 어떤 문제를 법제화할 때 학교나 언론에서 이만큼 사회적 훈련, 즉 토론을 거치고 있다는 것을 생생히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번 토론회는 이 책이 보여주듯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함께 얘기하는 과정 속에서 나온다'는 취지에서 열렸다.
▲ '2010 인문 주간 사회적 독서 토론회-<정의란 무엇인가> 읽기' 행사에 모인 시민들. ⓒ프레시안(최형락) |
<정의란 무엇인가>…왜 돌풍인가?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패널로 참석한 정태욱 인하대학교 교수와 김명준 성균관대학교 강사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반향을 일으키는 이유를 따져봤다. 정태욱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무엇이 정의인가에 대한 절실한 논의가 없었다"라며 "논의가 있더라도 개인적 이해관계에 따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정의, 윤리에 대한 논의가 풍부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명준 강사는 "과거 도덕 논리를 강조하는 사회로부터 현재 자유를 강조하는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겐 공적이든 사적이든 '자유'를 확보하는 문제가 너무나 시급했었다"고 진단했다. 그 과정에서 정의, 윤리에 관한 문제는 "구시대의 유물, 개인의 예절에 속하는 문제"로 절하되고 논의의 대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 정태욱 인하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이를 이어 받아 김명준 강사는 촛불 집회처럼 시민들의 의견이 활발히 나오기 시작한 상황에 주목하면서, 최근 '정의 돌풍'의 원인을 찾았다. 그는 "노무현 정부 들어오면서 다양한 정치 집단들이 정부 정책에 대해 발언하기 시작했다"면서 "인터넷이라는 물리적 기반 하에서 자기 견해의 표출 가능성이 높아지다 보니 많은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게 됐고, 그러면서 정말 '올바른 것'이 무엇이냐 하는 관심이 거세졌다"고 말했다.
이런 진단을 놓고 청중들은 "정의에 대한 궁금증은 원래부터 있었지만 근래 와서 자유의 공간이 넓어지면서 더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 같다"(한아름 양), "경제적 성장에서 한계를 발견했기 때문에 여태껏 논의되지 않았던 것들이 다시 논의되고 있다"(고민균 씨)고 나름의 의견을 덧붙였다.
공리주의와 '물에 빠진 아이 구하기'
청중 고민균 씨는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이 가진 자에게 성토하기 위한 것인지, 가지지 못한 자를 위로하기 위한 것인지도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논의는 자연스럽게 재화와 부의 분배 문제로 넘어갔다. 김명준 강사는 "정의라는 개념은 경제적 문제를 포함해 각각에게 어느 정도의 몫이 돌아가느냐 하는 분배의 문제"라고 응수했다.
분배의 문제는 샌델 교수가 <정의란 무엇인가>의 2장에서 설명하는 공리주의와도 이어진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요약되곤 하는 공리주의는 정의를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초점을 여러 명의 행복('최대 다수')에 두느냐 행복의 총합치('최대 행복')에 두느냐에 따라 선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 김명준 성균관대학교 강사. ⓒ프레시안(최형락) |
정태욱 교수는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국민총생산(GNP)를 올리는 등 전체적인 경제적 부, 즉 파이를 키우는 작업이 계속됐었다"고 지적했다. '최대 행복'에 더 중점을 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가까운 인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나 파이가 커지면 모두가 공리를 누릴 줄 알았더니 그러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공리의 총합에 집착하기보다는 개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하는 피터 싱어 식의 개량화된 공리주의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사회자 김민웅 교수는 "(피터 싱어가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기부라는 방식은 능력 있는 사람들의 선의에만 의존한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태욱 교수도 "그런 지적이 존 롤스의 사회정의론에 기초한 비판"이라면서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서 사회 전체적인 체제 변화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 교수에 따르면 롤스는 각 사회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처한 사람도 기본적인 조건 하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한국의 법이나 제도에 실제로 손을 댄다면, 가장 대표적인 방법으로 부유세 도입을 거론할 수 있다고 정태욱 교수는 덧붙였다. 그는 "부유세를 어떤 식으로 걷을지,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해선 여러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어쨌든 도입 자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 김민웅 성공회대학교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공동체주의는 위험하다?
한편, 분배의 정의를 위해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는 비판에 부딪칠 수 있다. 자유와 평등, 개인과 공동체 중 어느 것에 중점을 둬야 하는가의 문제는 오래된 화두다. 이날도 자신이 사교육 종사자라고 밝힌 청중과 10대 고등학생 한 명이 자유 발언 가운데 정부의 사교육 제한 정책을 예로 들면서, '자유를 침해한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교육이 '공적인' 문제를 낳고 있다는 지적에 항상 따르는 반박 논리다.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져 있는 샌델은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정태욱 교수는 "사실 샌델 자신도 공동체주의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분명 이 말을 사용하고는 있다"면서 "센델의 공동체주의는 흔히 생각하듯이 '개인의 자유보다 공동체의 세계관이나 종교를 따르자'는 얘기와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정태욱 교수에 따르면, 샌델은 "개인의 자유, 평등의 가치를 공동체의 덕목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의 무책임한 개인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누릴지에 대해 우애나 박애 차원에서 고민한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의 가치가 강조되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자유를 억압할 수 있는 기제로 악용될 수 있는 위험이 크다"고 우려했다.
김명준 강사는 과정적인 측면에서 공동체주의의 긍정성을 강조했다. 그는 "예컨대 젊은이들의 주택 문제처럼 누구에게나 문제의식은 있지만 공론화하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는 것들이 있다"며 "누구나 자신도 공동의 문제에 처할 수 있다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문제가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활발한 토론이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정태욱 교수 역시 "가정이든 동문회든 학교든, 토론이 있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고 거들었다.
▲ (왼쪽부터) 김명준 강사, 김민웅 교수(사회), 정태욱 교수. ⓒ프레시안(최형락) |
마지막으로 한국사회가 이명박 대통령이 주문한 대로 '공정사회'로 가려면 어떤 체질 개선이 필요하겠느냐는 질문에 정태욱 교수는 '헌정 질서의 공정성'을 강조했다. 그는 "국가의 법질서가 그대로인 상황에서는 아무리 공정성을 얘기해도 나아지지 않는다. 공정한 법질서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김명준 강사는 개인의 겸양 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샌델은 '재능도 은총이다'라는 입장이다"라며 "재능이나 자신의 환경이 우연적이라는 사실에 민감할 때, 우리는 우연적 요소를 덜 가진 이들에게 신경을 쓸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부를 독점하는 이들이 주로 내놓는 '어디까지나 내가 노력한 만큼의 대가'라는 항변에 대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건 그것들이 하나의 선물이라고 생각할 때 가능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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