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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주일 미군 이동에 '사전협의'란 없다"

지난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미일 양국이 합의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발표했다.

국제정치학자인 조진구 도서출판 '전략과 문화' 대표가 외부위원회의 검토 보고서와 그간 한국과 미국이 공개한 외교문서를 분석해 미일간의 '밀약'이 한미동맹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기고를 보내왔다.

조진구 대표는 네 편의 글을 통해 미일 밀약이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와 관련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 볼 예정이다. 일본 도쿄대에서 1960년대 한미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조 대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의 한미관계가 60년대의 추이와 유사하다고 말했다. <편집자>


▲ 4월 20일 일본 오키나와에서 주일미군 기지의 현내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가 열리고 있다. ⓒEPA=연합뉴스

2010년 3월 9일 일본 외무성은 1960년 1월 미일안보조약 개정과 1969년 오키나와 반환 당시 일본과 미국 사이에 합의된 '밀약' 문제에 관한 외부위원회의 검토 결과를 공표했다.

도쿄대학의 기타오카 신이치 교수를 좌장으로 하는 유식자위원회(有識者委員會)는 저명한 정치학자 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미국과 오키나와에서의 자료 조사 등을 거쳐 총 108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이하, 보고서)를 오카다 가쓰야 외상에게 전달했다.

이 위원회가 조사한 밀약 문제는 (1)유사 시 핵무기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 (2)한반도 유사시의 미일 간의 사전협의, (3)오키나와 반환 후의 유사시 핵 재반입, (4)오키나와 반환과 원상회복 보상비 부담 등 네 가지였다. 여기서는 한국과 관련이 있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 보고서의 내용을 검토한 뒤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특히, 1960년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문제가 한미 간의 외교현안으로 부상했을 때 한국 내부에서, 그리고 한미관계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해 어떠한 논의가 있었는지 살펴본 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에 대해 어떠한 함의를 주는지 검토해보고자 한다.

미일 간의 미공개 <조선의사록>

보고서에서 한국 관련 부분은 제3장(47-56쪽)에 정리되어 있는데, 공개되지 않은 미일 간의 <의사록(Minute)>(일본에서는 <조선의사록>이라 부름)에 의해 한반도 유사시 유엔군의 지휘 하에 있는 주일미군이 일본 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주일미군 기지를 이용해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대일 강화조약과 동시에 미일안보조약이 체결되었는데, 그것은 일본의 주권을 침해할 요소가 많았던 불평등한 것이었다. 일본 국내에서 내란이 발생했을 때 주일미군을 동원하여 내란을 진압할 수 있었으며, 극동에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유지를 위해 미국은 일본의 동의 없이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 1월 미일안보조약이 개정되면서 전자는 조약에서 삭제되었다. 후자와 관련해서 미일 양국은 기시 총리와 허터 국무장관 사이의 교환공문을 통해 '사전협의' 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르면 유엔군의 지휘를 받는 주일미군이라 하더라도 일본으로부터 전투작전을 행하는 경우 일본 정부와의 사전협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합중국 군대의 일본국에의 배치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 동 군대의 장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 및 일본국으로부터 수행되는 전투작전행동(전기 조약 제5조의 규정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것을 제외한다)을 위한 기지로서의 일본 국내의 시설 및 구역의 사용은 일본국 정부와의 사전협의의 주제로 한다.

Major changes in the deployment into Japan of United States armed forces, major changes in their equipment, and the use of facilities and areas in Japan as bases for military combat operations to be undertaken from Japan other than those conducted under Article V of the said Treaty, shall be the subjects of prior consultation with the Government of Japan.


이것은 장래 한반도에서 제2의 한국전쟁이 발생할 경우 미군이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게 했던 1951년 9월의 '요시다-애치슨 교환공문'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1960년 1월 6일 후지야마 외상은 맥아더 주일대사(한국전쟁 당시 유엔군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장군의 조카)에게 한국에 있는 유엔군이 공격을 받는 긴급사태 발생 시의 예외적인 조치로서 유엔군이 즉각적으로 반격할 수 있도록 "유엔통일사령부 하에 있는 주일미군에 의해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 전투작전행동을 위해 일본의 시설·구역이 사용될 수 있다(may be used)"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달했다.

보고서 제3장을 집필한 하루나 미키오(春名幹男) 나고야대학 교수는 지난한 교섭을 거쳐 사전협의를 이끌어낸 일본 측이 기시-허터 교환공문의 국내적 효과를 약화시키는 <조선의사록>은 "용인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협의할 시간적 여유가 없는" 경우의 긴급조치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미국 측의 주장에 더해 한반도 정세가 "일본 자신의 안전에 미치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합의하게 되었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미일 간의 교섭 과정에서 <조선의사록> 초안은 1959년 11월 24일 및 11월 28일자, 12월 14일, 15일 및 18일자, 그리고 최종적으로 합의된 1960년 1월 6일자(내용은 같지만 다른 2개의 복사본) 등 7통이 발견되었지만, 한반도 유사시 주일미군의 사전협의 없는 출격을 인정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교섭의 처음부터 끝까지 일본 측에 변화가 없었다.

안보조약의 개정은 '화장 고치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미 신시대'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등장했던 기시 총리에게는 정치적인 의미가 적지 않았다. 조약의 개정을 통해 일본이 미국에게 기지를 제공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 방위를 약속한다는 의무의 상호성을 높임으로써 일본 국민들도 형식적으로는 대등한 신 조약을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전협의(prior consultation)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밀약

안보조약 개정 시 일본 측은 좌파와 야당의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의 반입과 극동 유사시의 전투작전행동을 사전협의의 대상으로 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지만, 주일미군 장비의 '중요한 변경'이나 '전투작전행동' 또는 '협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둘러싸고 미일 사이에 명백한 합의가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일본과의 조약 개정 교섭을 시작하기 직전인 1958년 9월 9일 맥아더 대사는 미 국방부와 군부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일본과의 사전협의는 '협의(joint consultation)'와 '합의(agreement)'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협의(joint consultation)'할 뿐이라고 설명했다. '협의(consultation)'가 '동의(consent)'를 의미한다면 그것은 국제법상의 거부권과 같은 효력을 갖지만, 일본 정부도 그런 거부권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사전협의에서 일본이 반대해도 사실상 효력이 없게 되는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비판을 피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60년 1월 19일 기시-아이젠하워 공동성명을 통해 "미국 정부가 일본 정부의 의사에 반해 행동할 의사가 없음을 보장"했다*. 기시 총리도 1960년 2월 26일 중의원에서 연방의회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법률안 거부권이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과는 다르다고 선을 그었지만, 일본 측이 '노'라고 말할 경우 미국이 일본의 의사표시를 무시하고 행동할 수는 없다는 의미의 거부할 권리가 일본에게 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적어도 일본 정부는 미국의 일본 내 기지 사용에 대해 일정한 발언권을 확보함으로써 형식적으로라도 주권국가로서의 체면을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坂元一哉, 『日米同盟の絆: 安保条約と相互性の模索』有斐閣, 2000, 제5장)

*The President assured him that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has no intention of acting in a manner contrary to the wishes of the Japanese government with respect to the matters involving prior consultation under the treaty.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 보면 조약의 개정을 통해 사전협의를 약속하고, 사전협의에서 표명된 일본 정부의 의사에 반해 행동하지 않겠다는 것을 대통령이 약속한 이상 일본 내의 기지 사용은 크게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핵무기의 일본에의 반입이 불가능해져 미국의 전략적 이익이 크게 훼손될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가 되었던 것이 당시 여전히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의 기지의 자유로운 이용이었으며, 핵무기 탑재 함선의 일시 기항을 사전협의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미일간의 '밀약'이었던 것이다. 핵무기 탑재 함선의 기항은 '장비에 있어서의 중요한 변경'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전협의의 대상이지만, 일본 정부가 사실상 사전협의 없는 기항을 묵인함으로써 양국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을 회피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보고서 제2장 참조)

실제로 1960년대 미국이 베트남에 대한 개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일본 내의 미군기지는 전투작전만이 아니라 후방지원과 장비 수리, 정보와 교육 훈련기지로서는 물론 장병들의 휴양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시정권 하에 있었던 오키나와의 가네다 기지는 3,750미터의 활주로를 보유하고 있어 3분마다 한 번꼴로 미군기가 이착륙할 정도로 중요했으며, 1966년 4월 6일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 군사위원장이 지적한 대로 요코스카와 사세보가 없었더라면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은 일본과의 사전협의 없이 일본 내 기지를 자유롭게 이용해 전투작전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미일 간의 사전협의가 유명무실한 것이었음을 의미했다.

한미관계에 있어서의 사전협의는 정치적 수사

한편 한미관계를 보면 조약상의 의미는 아니지만 '사전협의'라는 말은 여러 번 등장한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미국이 주한미군의 감축이나 철수를 할 때 한국 정부와 사전에 협의해줄 것을 미국 측에 요구했었으며, 국회에서도 논의되기도 했다.

(가)한국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하여 한국 정부와의 사전협의 없이 상당한 수의 주한미군을 감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To insure the security of Korea, no significant reductions in U. S. troop strength will be made without prior consultation with the ROK government.

(나)미국의 병력의 감소 또는 증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현지 UN군사령관과 여기에 대해서는 세밀히 제가 파악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 얼마가 들어오고 얼마가 나가고 한다는 것은 제가 알고 있습니다마는 장비의 출입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간에 여하한 규정된 사실이 없고 우리로 보아서는 미국이 대한민국 방위를 위해서 되도록 많은 장비를 대한민국에 가져오는 것을 희망하고 또 이것이 우리 국방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나가는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신경을 쓸 필요가 있겠지만 (중략) 이 장비까지도 가지고 들어오는 출입국문제에 관해서 미국과 꼭 어떠한 협정이 필요한가 안한가 하는 것은 추후에 다시 연구해서 다시 고려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는 1966년 1월 18일 비치 주한미군사령관이 김성은 국방장관에게 보낸 서한이다. 베트남 전쟁이 악화되면서 전투부대의 추가파병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는데, 비치 사령관은 서한을 통해 미국이 한국에 제공할 파병 대가를 제시하면서 한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주한미군을 감축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당시 significant라는 말이 '의미 있는' 혹은 '상당한' 등으로 해석되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나)는 1966년 9월 5일 개최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황인원 민중당 의원의 질문에 대한 김성은 국방장관의 답변 중 일부다. 1966년 8월 31일 미 민주당 정책위원회는 유럽 주둔 미군의 감축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상원에 제출했는데, 이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러셀 상원 군사위원장이 워싱턴 포스트 기자의 질문에 대해 주한미군 1개 사단의 철수에 찬성한다고 답한 것이 조선일보 9월 3일자에 실리면서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의 입출입 문제가 국방위원회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황인원 의원은 한국 정부가 모르는 사이에 1년 전부터 병력 교대를 통해 상당수의 주한미군이 감축되고 있다고 지적한 뒤 주한미군의 '철수, 이동, 교대 및 장비의 교체'에 관해 한미 양국 정부가 사전협의하는 것은 당연하다면서 이를 위해 대미교섭에 나설 용의가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김성은 장관은 주한미군의 병력에 대해서 주한미군사령관과 긴밀하게 협의하고 있으나 장비의 경우 어떠한 규정도 없어 무엇이 필요한지 검토하여 추후에 보고하겠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한미군의 병력과 장비의 현황을 한국 정부에 통보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했으며, 교대를 이유로 한국을 떠난 미군의 대체 병력이 오지 않아 주한미군은 기지의 경비를 민간회사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에 한국 정부는 미군기지 주변의 경찰서를 통해 출입 현황을 파악 보고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1966년 9월 주한미군의 주력을 이루는 미8군 병력은 1965년 12월부터 1966년 11월까지의 1년 동안의 평균(41,658명)을 훨씬 밑도는 최저수준(38,711명)을 기록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한국 정부와의 사전협의나 동의를 얻어 주한미군을 철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닉슨 정권 때에는 정상회담에서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주한미군 1개 사단을 일방적으로 철수하기도 했다. 1969년 8월 2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닉슨은 북한의 도발행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미군을 철수할 생각은 전혀 없"으며 미국 내 여론에 관계없이 "한국으로부터의 미군의 철수는 예외로 취급할 생각"이라고 박정희에게 말했지만, 끝내 미국은 제7사단을 본국으로 철수시키고 제2사단을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한국외교문서, 韓·美 頂上間 單獨會談錄 및 兩國 閣僚 會議錄, 『박정희대통령 미국방문, 1969.8.20-25 전3권』 V.1 기본문서철)

닉슨 대통령의 발언은 1969년 4월 15일 미군 정찰기가 북한군에 의해 격추되어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미국에 대한 박정희의 불만을 완화하기 위한 정치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박정희를 수행해 샌프란시스코에 온 포터 주한미국대사에게 닉슨은 조만간 주한미군 감축에 관한 훈령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이미 워싱턴에서는 닉슨의 지시에 따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 등이 주한미군 병력수준을 포함한 대한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수준의 주한미군을 감축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 감축 보류는 애초부터 미국의 선택지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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