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양측은 각각 워싱턴과 베이징을 무대로 외교전을 펼치며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무슨 얘기를 했을지가 중요한 변수가 될 전망이다.
MB 정부 '승리의 추억'
2008~09년 남북 외교전 1라운드는 핵 문제와 북미관계 정상화를 빅딜하려는 북한과 그 과정에서 동북아시아의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는 한국의 싸움이었다.
북한은 목표 달성을 위해 때로는 영변 원자로 냉각탑 폭파(2008년 6월) 같은 유화책을 쓰고 때로는 2차 핵실험(2009년 5월) 같은 강수를 두면서 미국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 들였다.
2008년 임기 마지막 해를 맞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해 주는 등의 조치로 더디지만 진전을 이뤄 나갔다. 2009년 임기 첫 해를 맞은 오바마 행정부도 북한이 핵을 포기한다면 평화체제·관계정상화·경제지원을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원칙을 천명하며 대화를 시도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를 평양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2년간의 북미 대화는 1보 전진과 2보 후퇴를 반복하는 매우 단속적인 양상이었다. 미국 내 강경파의 저항이나 북한의 상투적인 벼랑 끝 전술 등 다양한 요인이 작용했지만, 무엇보다 북미관계의 진전을 원치 않는 이명박 정부의 강력한 제동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고유의 반북적 성향과 북미관계가 성큼성큼 나아갈 경우 외교적 고립에 빠질 수 있다는 절박감으로 미국의 발목을 잡았다. 북한이 핵 신고서를 제출하면 핵무기에 관한 신고가 빠졌다고 투덜댔고, 북한 핵시설을 불능화하는 대가로 제공키로 한 에너지 지원을 중단했다. 핵을 먼저 포기하기 전까지는 북한과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이는 6자회담 프로세스를 지연·무산시켰고, 한국의 요구를 마냥 무시할 수 없는 미국의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이명박 정부의 어깃장 외교는 오바마 행정부 들어 예상 외로 더 효과를 발휘했다. 동맹국과의 협의를 중시하는 오바마 행정부는 한국의 요구를 뿌리치지 못했고, 북한 문제를 정책 우선순위에서 뒤로 뺄 수밖에 없는 국내·외 정치상황까지 겹치면서 한반도 문제에서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쾌재를 불렀다.
▲ 이명박 정부의 '어깃장 외교'는 오바마 미 행정부 출범 이후 예상 외로 더 효과를 봤다. 천안함 사고와 김정일 방중으로 마련된 2회전에서도 과연 승리할 수 있을까. ⓒ청와대 |
천안함-6자회담 연계냐 병행이냐…흔들리는 미국
그 후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한반도 정세가 천안함 사고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방북을 계기로 요동치고 있다. 남북 외교전의 2막이 열린 것이다. 일부 언론들은 '이명박 정부가 고립되고 있다'며 외교 전쟁의 또 다른 시작을 알리고 있다.
한국이 고립되고 있다는 진단은 천안함 사고 원인 규명과 후속 조치를 한 뒤에 6자회담을 해야 한다는 이른바 '연계론'과 천안함과 6자회담을 별개로 다뤄야 한다는 '분리 병행론'의 각축에서 비롯됐다. 한국의 연계론이 다른 나라들의 병행론에 밀린다는 것이다.
중국은 김정일 위원장을 불러들여 6자회담 재개 문제를 논의함으로써 병행론을 택했음을 행동으로 보여줬다. 이에 한국 정부는 주한 중국 대사를 불러 항의했지만 양국간 감정만 나빠졌을 뿐 중국이 가는 길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의 입장이 중국·러시아와 다르다고 해서 한국이 고립됐다고 하지는 않는다. 미국과 다를 때에만 그런 진단이 내려지는 것인데, 최근 미국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의 지난 달 23일 에스토니아 발언과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의 4일 브리핑 내용은 한국과 달리 '병행론' 쪽으로 기울어 보였다. 두 사람은 천안함과 6자회담을 연계하는 것 같았던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의 지난달 14일 발언과 다르게 북한의 6자회담 복귀만을 강조했다.
그러자 지난달 29일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클린턴 장관의 전화 통화가 재조명됐다. 전문가들은 그 통화를 계기로 미중 양국이 천안함과 6자회담을 별도로 다루자는 합의를 본 게 아니냐고 해석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남북간 외교전 2라운드를 맞은 이명박 정부의 외교 목표는 뚜렷해졌다. 1라운드 때와 마찬가지로 미국에 집중적인 외교전을 펼침으로써 미국이 천안함-6자회담 병행론의 '미망(迷妄)'을 떨쳐 버리고 연계론적 입장에 확고히 서게 하는 것이다.
4일 병행론적 발언을 했던 크롤리 차관보가 5일에는 "천안함 조사가 마무리되고 난 후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결론을 내리겠다는 입장은 분명하다"며 연계론으로 다시 돌아 선 것은 한국의 대미 설득 작전이 시작됐음을 추정케 한다. 미국은 흔들리고 있다.
김정일, MB 외교의 '승리방정식' 깰 수 있을까
일단 2라운드에서도 승산은 이명박 정부에 있어 보인다. 동맹국의 의견을 중시하고 우선순위가 앞서는 다른 정책들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1라운드 당시 미국의 입장이 이번이라고 해서 달라질 이유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가 최근 들어 한반도 정책을 새롭게 정립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는 방심은 금물이라는 태도로 미국의 발목을 더욱 더욱 강하게 잡아 승기를 낚아채려고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압박할 카드가 필요하다. 그게 무엇일까?
한국 정부가 지난달 2일 방한한 캠벨 차관보에게 북미 접촉을 미뤄달라고 요청했다는 <동아일보>의 보도와, 캠벨이 한국에 천안함과 관련한 군사적 대응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박선원 전 청와대 비서관의 전언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국이 군사적 대응을 자제하는 대신 미국은 북한과의 접촉을 연기하기로 거래를 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천안함-6자회담 병행 쪽으로 가려고 엉덩이를 들썩인다면 한국으로선 '너희가 약속을 깨면 우리도 깨겠다'며 미국을 압박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 모종의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신호를 미국 쪽에 보내는 것이다. 서해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는 5~6월 꽃게잡이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아는 미국으로선 무시하기 힘든 상황 전개다.
여기서 이명박 외교의 승리방정식을 깰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변수는 김정일 위원장의 전략적 결단이다. 한국이 아무리 발목을 잡아도 미국이 뿌리치고 협상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는 무언가를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 내놓는다면 미국으로서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간 6자회담 복귀의 조건으로 내걸었던 유엔 제재 해제를 이제 개의치 않겠다거나, 중국이 제시한 '6자 예비회담' 같은 중간 단계 없이 곧장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거나, 평화협정 협상에 대해 융통성 있게 접근하겠다고 하는 등의 결단은 미국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중국의 대미 설득도 하나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작년 7월 말 워싱턴에서 열린 중국과의 전략·경제대화에서 북한에 대한 변치 않는 중국의 입장을 확인 한 후 대북 제재 일변도의 태도를 접었다. 그리고 8월 초 곧바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을 평양에 보내 북한과의 대화에 나섰다.
그 미중 전략·경제대화가 오는 24~25일 베이징에서 또 열린다. 중국은 그 자리에서 김 위원장의 전향적인 메시지와 그에 대한 자신들의 지지 의사를 미국에 전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경우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라는 '선물'을 중국에 주는 대신, 중국으로부터 다른 것을 얻어 내려고 하는 거래를 시도할 수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