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건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제대로 다루어진 적이 한번도 없다. 한 사업장에서 10년간 20명이 백혈병에 걸려 7명이 사망한 사건, 시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나 기자들이 관심이 없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삼성 반도체 노동자의 백혈병 집단 발병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해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등에 따르면 KBS, MBC, SBS 등에서 숱한 기자와 PD들이 취재를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뉴스에서 짤막한 단신으로 보도되는 것 외에 시사 프로그램 등은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대전 MBC의 경우는 제작이 80퍼센트까지 이뤄진 상태에서 사측의 중단 지시로 프로그램이 무산됐다. 그외 MBC <PD수첩>,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은 자체적으로 취재를 중단, 혹은 보류했다고 밝혔다.
대전 MBC 사측이나 그외 삼성 사건을 취재했던 제작진은 "삼성 등 외부의 외압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자체 중단'의 이유가 상대가 바로 '삼성'이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반올림은 22일 낸 성명에서 "도대체 언제까지 삼성이라는 권력 앞에서 번번히 침묵하는 언론의 모습을 보아야 하느냐"고 규탄했다.
▲ 삼성 반도체에서 일하다 백혈병을 얻어 지난 2007년 사망한 고 황유미 씨(왼쪽)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시사 보도 프로그램이 연거푸 무산되고 있다. ⓒ프레시안 |
"삼성에 대한 프로그램은 '제작'도 못하나"
대전 MBC의 시사 보도 프로그램인 <시사플러스>는 지난 12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집단 백혈병 발병 등 반도체 공장의 유해성 문제를 다루는 프로그램을 제작, 방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방송을 10일 앞두고 지난 3일 사측이 '취재 중단'을 지시해 이날 <시사플러스>가 결방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기획 단계에서 결재를 받아 제작 중인 프로그램을 두고 사측이 '제작 중단'을 지시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 대전 MBC 사측은 "불공정한 방송이 예상되고 방송이 나갈 경우 삼성 측으로부터 명예 훼손과 관련한 소송 제기 등 회사에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를 댄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제작진은 "제작 완료 후 결과물을 두고 '위험성' 등을 판단하자"고 제안했지만 역시 거부됐다. 대전 MBC 측은 노동조합의 요구로 열린 공정방송위원회에서도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대전 MBC PD협회는 성명에서 "사전 결재가 이뤄져 제작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내려진 취재 중단 지시는 이해하기 힘들다"면서 "회사가 제작진에게 철저한 취재와 완벽한 수준의 프로그램 만들기를 요구하기보다 위험성을 이유로 '취재 중단'을 지시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대전 MBC 노조에서는 "사측은 삼성으로부터 어떠한 압력도 없었다고 수차례 강조했지만 거대 자본인 삼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취재조차 중단해야 한다는 것은 공영 방송 위상에 걸맞지 않은 일"이라며 "삼성은 취재조차 불가능한 성역이냐"라고 반발했다.
"삼성에 대해 방송하려면…"
이 문제를 취재만 하고 방송을 내지 못한 것은 대전 MBC <시사플러스> 팀만이 아니다. '반올림'은 성명에서 "<시사플러스>는 이 문제를 취재하겠다고 나섰다 결국 방송을 하지 못한 세 번째 시사 방송 프로그램"라며 "지금까지 MBC <PD수첩>과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도 삼성 반도체 노동자들의 암 집단 발병 문제를 취재했지만 모두 방송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들 제작진은 "삼성이나 윗선의 외압 등은 없었다"고 밝혔다. 대신 삼성이 모든 정보를 쥐고 있고 환경부나 노동부 등 정부기관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상황에서 취재를 위한 접근 자체가 쉽지 않음을 토로했다. 게다가 삼성 측의 소송 가능성 등도 큰 부담이다.
<PD수첩>이 이 문제를 취재했던 것은 지난 2008년, 담당은 김보슬 PD였다. 그는 "삼성이 모든 정보를 쥐고 공개하지 않는 상황에서 인과 관계 입증이 쉽지 않았다"면서 "작업 환경 역학조사와 정확한 숫자, 통계 등이 필요한데 환경부나 노동부에서도 전혀 협조가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혐성을 경고한 <PD수첩> 방송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동시에 이명박 정부와 보수 진영의 타깃이 되어 온갖 소송 등에 휘말리게 된 것도 컸다. 김 PD는 "'반도체 공정은 영업기밀'이라는 논리 속에 공개가 전혀 안되는 상황에서 그 인과관계를 밝히는 취재는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최근 이들을 취재했던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에서도 비슷한 이유를 댔다. 이들은 지난해 12월 29일 경찰이 삼성반도체 백혈병대책위에서 활동해온 이종란 노무사를 체포한 이후 이 사건을 취재해 왔으나 역시 취재를 중단했다.
이 사건을 취재했던 이광훈 PD는 "당시 방송이 1월 말로 잡혀 있었는데 모든 정보를 삼성이 갖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 내에 삼성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방송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면서 "프로그램 책임PD에게 '이정도 의혹을 방송에서 제기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주장을 폈지만 '삼성을 꼼짝 못하게 할 만한 내용이 더 필요하다'는 지적에 보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PD는 "이러한 취재 내용이 프로그램 책임 PD 이상으로 보고된 것이 아니었기에 '윗선의 압력' 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며 "적어도 삼성에 대한 것을 다루려면 좀더 증거를 갖고 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지금도 해외 자료 조사 등은 하고 있다"고 말했다.
▲ "백혈병 어린이를 돕는 또 하나의 가족, 백혈병으로 죽어간 또 하나의 가족." 반올림은 성명에서 "삼성그룹 임직원 헌혈 캠페인이나 이건희 행보, 삼성그룹 창립 행사 등은 앞다퉈 보도하는 언론들이 산업 재해로 쓰러져간 삼성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이다지도 침묵을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규탄했다. ⓒ프레시안(여정민) |
"만약 이 문제가 삼성이 아니었더라면"
그러나 연거푸 거듭되는 방송 무산을 바라보는 '반올림' 등의 시선은 착잡하다. 이들은 "열심히 취재해준 제작진에게는 감사하다"면서도 "방송사들이 워낙 삼성 눈치를 보기 때문 아니냐"고 말했다.
삼성반도체 백혈병 대책위에서 활동 중인 이종란 노무사는 "만약 이 문제가 삼성이 아니었다면 <PD수첩>에서도 김보슬 PD 이후로 후속 취재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라며 "언론사들이 워낙 삼성 눈치를 보기 때문에 각 제작진들도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의 취재에 응했던 반올림 활동가이자 산업의학 전문의인 공유정옥 씨도 "KBS에서도 기자들이 와서 심층 취재를 많이 했는데 단 한 번도 뉴스 프로그램에 나온 적이 없었다"며 "아무리 안 되도 상반기 안에는 방송이 되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지역 방송도 입이 다 틀어막혀 버려서 답답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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