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강도' 논쟁의 핵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강도' 논쟁의 핵심

[김민웅 칼럼]<50> 정작 강도가 든 집은?

누가 강도일까?

난데없는 "강도논쟁"이 설 정국을 달구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라는) 강도가 들이닥치고 있는데 왜 집안 식구끼리 싸우고 있냐?"는 것이 세종시 문제에 대한 여권내부의 반발을 염두에 둔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이었고, 이 발언이 자신을 겨냥했다고 여긴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식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 강도로 돌변하면 어떻게 하겠는가?"라고 반박한 것이 이 정치 드라마의 전개다. 이젠 사과하라, 못 하겠다, 하면서 다른 수준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자, 이걸 어떻게 봐야하겠는가? 누가 강도이고 누가 싸움을 먼저 걸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통상적으로는 강도라고 하지 않을 것 같은데 강도라는 말이 붙은 경우를 하나 보자. 매튜 조셉슨이 1934년에 쓴 <강도귀족(The Robber Barons)>은 1861년에서 1901년까지의 미국의 역사를 다루었다. 남북전쟁과 그 이후 이른바 재건기에 등장한 철도재벌 등의 독점대자본과 이에 기초한 미국의 제국주의 체제 전환을 파헤친 저작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벤더빌트 등의 이름들은 오늘날까지 그 위력을 발휘하는 미국 자본주의 중심세력들의 원조다. 철도와 철강, 육류유통과 은행 등에 대한 독점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고 부자들이 된 이들은 귀족이 없는 미국사회에서 귀족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강도귀족"이라는 대중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모든 것을 독차지하고 있는 자들에 대한 대중들의 규정이었다.

매튜 조셉슨이 이 책은 쓴 시기는 미국이 대공황에 처해 있을 때였다. 1920년대의 이른바 "위험한 번영기(period of perilous prosperity)"를 거친 후 맞닥뜨리게 된 경제위기는 그동안 미국의 부를 주도해온 자들에 대한 대중의 경이로움을 비판으로 바뀌게 한다. 증시에 대한 대자본의 투기행위가 민초들의 삶을 위기로 몰아놓은 원인이라는 사실, 그래서 경제위기의 책임이 다름 아닌 이들 대자본들에게 있다는 진상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매튜 조셉슨은 바로 이 경제위기의 주범들이라고 지목된 미국 대자본가 세력의 역사적 연원을 추적하면서 "강도귀족"의 정체를 밝혀간다. 알고 보니 이미 1860년대를 넘어가면서 이들 대자본의 조상들이 "강도"와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은 것이 확인된 것이다.

귀족의 자리에 앉아있는 강도들

▲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대통령 ⓒ손문상 화백

강도는 남의 것을 부당하게 강탈해서 자기 것으로 삼는 자들이다. 이들 미국의 대자본가들이 남북 전쟁 이후 "강도귀족"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미국의 정치권력, 경제 권력을 모두 독점해서 시민들의 권리와 재산을 제한하고 침탈했기 때문이다. 겉모양은 귀족처럼 위세를 부리고 있지만 그들은 따라서 강도에 다름이 아니라는 이 논리는 다만 미국의 역사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강도는 누군가의 정당한 권리와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자들이 다. 그 강도의 외모가 아무리 출중하고 지위가 대단하고 재산이 많다고 해도 강도는 강도다. 이것이 "강도귀족"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개념의 본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은 우리가 겉으로 보면 강도가 아닌 것 같은데 강도인 자들을 식별하는 기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과, 그들이 한 사회에서 때로는 귀족의 자리에 앉아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강도인 줄 몰랐는데 강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면 안 된다는 거다. 순진하게 상대가 귀족인 줄 알았다가 그만 당할 수 있고, 이런 경우엔 그 강도짓은 권력과 하나가 되어 하고 있기 때문에 경찰을 불러도 잡지 못한다는 것도 아울러 깨우치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이들 "강도귀족"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았고 강도귀족들의 강도짓을 규탄한 사람들은 경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그러니 이럴 때에는 경찰이 강도와 한통속이 된 격이니 그 경찰을 부리는 권력을 바꾸지 않으면 강도는 계속 여기 저기 당당하게 출몰하기 마련이다.

세계경제 위기 대응이 우선이라면서 정작은…

이번에는 대통령의 발언을 점검해보자. "강도가 들었는데 집안 식구끼리 싸울 수 있는가?"라는 말은 그 말대로 보편적인 진실이다. 그러나 어떤 말이든 맥락과 연관되지 않고 발언되는 경우는 없으며 따라서 해석도 그 맥락에 얹어져서 진행되기 마련이다. 그냥 한 말이 아니고 그냥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서 강도는 일단 "세계경제 위기"라고 한다. 세계경제에 대한 언급이 있고 나서 한 말이니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런데 "세계경제 위기"가 강도인가? 그 위기가 닥치면 집안에 강도가 든 것 같은 재난이라는 의미라면 일단 이해해보겠지만, 세계경제 위기의 기습은 칼 들고 집에 들어오는 강도가 아니라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난이 들이닥치고 사회가 해체의 지경에 놓이게 되는 사태다. 그러니 경제위기를 강도라는 말로 규정하는 것은 출발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백보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자. 그러면 이 강도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국가의 역량을 경제위기 타개와 살림살이 개선에 두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이명박 정권은 그 일차적 우선권을 4대강 사업 토건정책과 세종시에 두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 타개와 하등 관련이 없다. 더군다나 이 발언은 세종시 원안 고수 논란에 대한 문제제기에 쐐기를 박는 과정에서 나왔다. 자신은 세종시에 주력하면서 경제위기 논란을 벌이는 것은 앞뒤가 맞는 것일까? 강도가 들어왔으면 이 강도를 잡는 것이 우선인데 강도 잡는 일보다 다른 일에 주력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이렇다면 강도가 들어왔는데 뭣들 하고 있느냐고 말할 자격은 없게 된다.

누가 먼저 싸움을 걸었던가?

싸우는 문제를 보자. 세종시 문제에 대한 싸움은 누가 먼저 걸었는가? 가만히 있는 사람 들쑤신 것이 누구인가? 누가 먼저 상대의 뺨을 올려 쳤는가? 싸움 유발자는 그대로 두고 그 싸움에 반응을 보인 쪽에 책임을 전가하고 비난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싸움 밖에 있는 사람의 경우가 이런 말을 했을 때에는 싸우는 양쪽 모두에 대한 질타가 된다. 혼자 자기랑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대통령의 발언은 이 싸움의 유발자의 문제는 내버려 두고 그 싸움에 대응한 쪽만 집중해서 겨냥하고 있다. 그러니 박근혜 전 대표 자신과 그 진영에서 가만히 있을 턱이 없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반격은 거침없다. 강도가 든 집안에서 또 하나의 강도가 나타난다면 하고 입을 떼었다. 물론 박 전 대표는 분명히 가정으로 말했다. 식구 중 한 사람이 강도로 돌변하면 어쩌겠는가? 라는 어법이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이라는 말이 청와대의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발언에서는 강도가 세계경제위기라고 이야기했지만, 박 전 대표의 발언에서는 누가 강도인가에 대한 규정이 없다.

박근혜는 누구보고 강도라고 했는가?

그러니 일단 그 강도가 대통령을 겨냥한 것이라는 논리를 무엇으로도 입증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강도라고 불렸다고 확신하는 모양이다. 대통령에 대해 금도를 넘었다, 사과를 해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논리상, 박 전 대표의 경우, 내가 언제 당신보고 강도라고 했어? 라는 반격이 충분히 가능하다. 어법이 가정이고 강도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럼 제발이 저린 건가? 하는 식으로 치고 나가면 대통령 이명박으로서는 더욱 할 말이 없게 되고 만다. 아무도 그렇게 말한 바 없는데 "왜 나보고 강도라고 해?" 하면 꼴만 더 우습게 되고 마는 것이다.

여기서 이 "한 사람의 강도"를 대통령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그 말을 듣고 있는 또 다른 이들의 입장에서 들어보면 어떻게 될까? 그 "또 다른 사람들"이란 세종시 원안 추진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세종시 원안 폐기로 인해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까? 만일 이들이 엄청난 박탈감과 분노를 느꼈다면? 그러나 상대가 권력이라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여긴다면? 세계경제 위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적어도 세종시 문제에 한해서, 집안에 강도가 들었다고 생생하게 느낄 사람들은 과연 누구이겠는가?

강도가 들면 그 강도하고 싸우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강도와 싸우는 일은 쉽지 않다. 상당한 용기와 담력, 의지가 필요하다. 그걸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세종시 원안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박근혜 전 대표를 바라보게 될까?

정작 강도는?

그런데 시선을 좀 달리 변화시켜보자. YTN, KBS에 이어 MBC까지 장악해내는 권력의 행태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사법부의 판결로 원위치가 가능해진 김정헌 한국문화예술위원장에 대해 직위는 인정하나 권한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이 권한 강탈 발언은 어떤 ~적(的) 발언일까? 민노당 압수수색에 대한 경찰의 태도는 또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국민에게 속한 방송을 권력이 탈취하고 정당의 명예와 정치적 위상을 앗아가고 노조의 권한을 박탈하고 공무원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훔쳐가려고 하는 자와 세력이 있다면, 이걸 우리는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강도가 들어왔는데 경찰이 그 강도를 도리어 옹호하고 신고한 사람을 잡아들이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강도가 귀족의 자리에 앉아 있기에 강도인 줄 몰랐던 역사는 미국의 과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귀족의 자리에 앉아 있기에 더욱 강도짓을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옛날의 역사만 아니다. 강도가 들어왔다면 이 강도를 물리치거나 잡아들여야 한다. 진보진영의 집안에는 강도가 들었을까, 아닐까? 그런데도 식구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일까, 아닐까?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