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북핵 실험 이후 미국이 제재 일변도의 강경 입장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에게 무언가 원하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는 언급은 그 자체로 협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국내 언론은 이를 두고 기존의 단계별 대북 접근과는 다른 새로운 내용이라며 북한이 명백히 핵폐기를 하기 전에 단계를 나눠 살라미식으로 보상을 받는 방식은 이제 불가능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특히 청와대는 이 방식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제안된 것이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즉, 포괄적 패키지 전략을 지금까지 북미가 진행시켜온 단계별 협상 전략과 구분하면서 그동안 북한을 잘못 길들여온 단계적 보상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그간 북핵 협상을 잘못 오해했거나 혹은 캠벨의 패키지 전략을 보수적인 대북기조에 맞춰 자신의 입맛대로 왜곡한 결과이다.
'완벽한 출구' 찾다가 입구도 못 찾을라
▲ 커트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한국을 방문해 던지고 간 '포괄적 패키지'라는 개념이 묘한 파장을 낳고 있다. ⓒ뉴시스 |
북한의 핵 시설 동결에 대한 검증만이 아니라 북이 요구하는 경수로 제공과 북미관계 정상화 의제 등이 모두 한꺼번에 협상되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결국 1994년의 제네바 합의에는 북미간 상호 요구사항이 포함되었다.
2차 북핵 위기의 모범답안인 2005년의 9.19 공동성명 역시 오랜 진통 끝에 북미간 포괄적 일괄타결의 산물이었다. 미국이 요구하는 북한의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의 폐기, 그리고 북한이 요구하는 안전보장과 관계 정상화 및 경제에너지 지원 등이 망라되었고 한반도 평화체제까지 공동성명에 포함되었다.
하나의 이슈를 합의하고 그 다음 이슈를 논의하는 '이슈 바이 이슈'(issue by issue) 방식이 아니라 모든 이슈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한꺼번에 일괄 타결하는 포괄적 협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캠벨 차관보가 언급한 포괄적 패키지 전략은 이전 북핵 협상과 다른 새로운 것이 아니며 굳이 차이를 찾자면 각 이슈들의 합의가 서로 연계되어 정교하게 한 꾸러미로 묶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즉, 9.19 공동성명에 포함되어 있는 핵 폐기와 북미관계 정상화와 대북 경제지원과 한반도 평화체제 등의 합의가 최종의 목적지까지 진행되도록 상호 패키지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바람직한 이야기다. 모든 이슈를 일괄타결하고 나아가 그 합의에 최종 도달할 수 있도록 촘촘히 이행단계를 패키지로 묶어 놓는다면 훨씬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이 현안들을 포괄적으로 타결하고도 이후에 구체적 이행 로드맵과 관련해 별도의 합의들을 도출해야 했던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북한과 미국의 상호 불신이 극도로 높은 상태에서 서로 합의한 내용을 신뢰성 있게 이행하기 위해선 불가불 '행동 대 행동'이라는 단계적 실천 방안을 따로 논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핵시설 폐쇄와 중유 제공을 위한 2.13 합의, 불능화와 핵 신고를 위한 10.3 합의 등이 별도로 나와야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이다.
따라서 지금 캠벨이 언급하는 포괄적 패키지 전략이 북미간 모든 합의사항에 대해 핵폐기 최종 단계까지를 포함해 구체적인 이행내용을 담는 것이라면 이상적이긴 하나 현실에서는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동안 2.13 프로세스가 중단과 역진을 했음을 들어 아예 처음부터 북한의 최종 핵폐기를 강제하는 패키지가 철저히 합의되어야 문제를 풀 수 있다는 생각이라면 오히려 완벽한 첫 출구를 고집하다가 북핵 문제 해결이 영영 뒤로 미뤄지는 딜레마에 처할지도 모른다.
특히 캠벨 차관보가 포괄적 패키지 제공의 조건으로 언급한 '중대하고 되돌릴 수 없는 조치'가 북한의 추가적 상황 악화 방지와 2.13 프로세스 복귀 정도가 아니라 마치 전임 부시 행정부가 고수했던 선(先) 핵 포기 입장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일은 더더욱 어렵게 될 것이다.
오히려 캠벨의 포괄적 패키지 전략은 오바마 행정부 이후 강화되고 있는 대북 제재 국면이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는 모멘텀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더 완벽하고 더 까다로운 그래서 합의가 거의 불가능한 새로운 협상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 북미갈등으로 중단된 9.19 공동성명 이행을 재개하고 2.13 프로세스를 복원함으로써 보다 진전된 포괄적 협상이 가능하도록 노력을 하는 게 오히려 바람직할 것이다.
▲ 한반도 비핵화의 '출구'를 명시한 9.19 공동선언과 그를 이행하기 위한 '액션 플랜'은 2.13 합의와 10.3 합의의 산파였던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가운데)과 천영우 전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 크리스토퍼 힐 전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왼쪽) ⓒ뉴시스 |
'포괄적'과 '단계적'은 배치되는 말이 아니다
캠벨식 포괄적 패키지 전략이 마치 단계적 이행 방식과 배치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 역시 북핵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그동안 북핵 과정은 철저히 북한과 미국의 동시 행동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9.19 공동성명에 모든 이슈를 타결해 놓았지만 구체적 이행 과정은 각 단계마다 서로 연계되어 '행동 대 행동'으로 주고받게 해놓은 것이다.
미국이 30일 이내에 BDA 제재(북한 돈 2500만 달러가 예치된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 은행에 대한 제재)를 풀어야 북한이 60일 이내에 핵시설 폐쇄를 하게 되어 있었고, 북한이 핵 신고를 제대로 해야 미국은 테러지원국 지정을 해제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북한이 핵 불능화를 하는 조건으로 미국 등은 중유 100만 톤 상당을 제공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이다.
상호 동시 행동을 규정해놓은 만큼 일방의 불이행은 곧바로 다른 일방의 불이행으로 연결되었다. 2.13 합의 이후 30일이 넘어도 미국이 약속한 BDA 해제가 완료되지 않으면서 북한이 60일 이내 핵동결 조치를 계속 미루었던 것도, 우여곡절 끝에 북이 핵 신고서를 제출했지만 부시 행정부가 약속과 달리 테러지원국 해제를 미루면서 북한이 불능화 작업을 중단했던 것도 바로 그런 메카니즘이었다.
상호 불신의 북미관계에서 합의 이행을 위한 기한과 순서를 서로 연계해 정해놓음으로써 각 단계마다 행동 대 행동의 상호 강제성을 보장해놓은 것이다.
이는 지금의 북미관계 특히 서로가 서로의 선의를 믿지 못하고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의구심을 가진 상태에서는 불가피한 것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캠벨식 포괄적 패키지 전략도 결국은 모든 의제를 협상하고 그 이행을 패키지로 엮어 구성하되 실제 실천 과정은 단계별로 각자의 행동과 행동이 서로 연계되도록 할 수밖에 없다. 즉, 포괄적 협상 이후 동시 행동의 단계적 이행 방식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도외시한 채 마치 캠벨의 포괄적 패키지 전략이 이제는 더 이상 북한의 단계별 행동에 매번 보상을 제공하는 과거식의 행태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포괄적 패키지'와 '단계별 이행'이 마치 상호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몰아간다면 이것은 지금의 대북 제재 국면을 정당화하고 북한의 선 핵폐기를 협상의 전제로 환원시키는 것이 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협상으로의 신속한 전환이며 북미가 조건 없이 성실한 협상의 장에 다시 서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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