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와중에 사실은 파묻혀 보이지 않고 있다. 특정 미래에 대한 바람으로 충만한 주술적 언사들이 사실에 기초한 고민을 구축(驅逐)하고 있다. 그 주술은 한반도를 한걸음씩 재앙으로 몰아넣고 있다.
모두들 한 마디 하고 있는 소위 북의 '권력세습' 논쟁은 가관이다. 한국 정부의 정보기관이 김정운 후계자론을 공식화함에 따라 그간 언론과 학계에서 유령처럼 떠돌던 설이 사실화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이 주장에는 사실이 없다. 김정운의 '현재'가 실종이다. 그가 차기 지도자라는 '미래'는 모두가 확신에 차서 얘기하지만, 그가 오늘 어디서 무엇을 하고, 그의 책임과 역할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현재를 모르면서 미래를 확신하는 것은 미신이다.
그 미신은 한 걸음 더 나간다. 북의 현재 행위를 '미래'에 비추어서 설명한다. "북한은 김정일 일가의 정권유지를 위해 핵보유를 하려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미신이 미신을 낳는 상황은 주술을 탄생시킨다. "북한이 핵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조치를 우리 5개국이 한번 모여 협의하자는 방안"이 나온다. 북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미신에 비추어 볼 때 그 바라는 바가 뻔한 주술이다.
이제 이러한 주술에 근거한 부적을 붙이고 한반도는 위기의 절벽으로 가고 있다. "적이 우리의 손 끝 하나를 건드리면 적의 손목을 자르겠다"는 주문이 공공연히 되뇌어진다. 죽음의 굿판이다.
남북관계에 덩달아서 북미관계도 절벽으로 치닫고 있다. 북은 현 상태가 "미 제국주의와 전쟁상태에 들어간 정세"라며 "만약 놈들이 사소한 도발이라도 걸어온다면 지체없이 선제타격의 권리를 행사해 미국의 급소를 일격할 것"이라고 주먹을 휘두르고 있다.
그들이 휘두르는 주먹은 어느새 '핵주먹'이 되어 있다. 한반도 비핵화를 향해 힘겹게 나가던 발걸음이 한순간에 핵의 죽음판으로 미끄러지고 있다.
미신에서 부적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일련의 내적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 기다림의 미덕을 과시하며 지속적으로 집요하게 집행되고 있다. 미신의 틀 안에서 핵의 죽음판은 구원의 세상으로 도착되어 기도의 제목이 되고 있다.
▲ 15일 오전 연평도 해병대 장병들이 짙은 안개 속에서 경계 근무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인가?
남북간의 문제는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한 바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기치를 들고 등장한 오바마 정부에 들어서 북미관계가 퇴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관성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에도 국무부는 한반도 정책을 책임질 라인의 인선이 지연되었고, 정책 검토도 시간을 끌었다. 그 과도기를 지배한 것은 관성이었다.
그 관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북의 조선국립교향악단 초청공연 문제이다. 코리아 소사이어티가 활발히 추진하던 이 사업은 올해 초 갑자기 중단되었다. 북한 선발대의 미국 방문 비자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는 것이 정설이다.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컨대 작년 말부터 북과 이견을 보이던 핵시설 검증문제에 진전이 없는데 대한 보복이었다. 부시 행정부 말기에 6자회담을 담당하던 인사들의 관성적 선택이었던 것이다.
이어 3월초에는 키리졸브/독수리 한미연합 군사연습이 실시됐다. 예년보다 기간이 2주로 늘어났다는 보도들이 있었지만, 이도 예전에 하던 연습을 계획에 따라 관성적으로 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성에 힘을 실어 준 것은 관료정치였다. 4월 5일 북의 로켓 발사가 결정적 계기를 제공했다. 미국 정부의 정보부서 16개를 총괄하는 데니스 블레어 미국 국가정보국 국장이 3월 10일 상원 청문회에서 "북한이 발사하려는 것은 우주발사체"라고 공언했으나, 정작 북이 로켓을 발사하자 오바마 대통령은 이를 "대포동 2호 미사일"로 규정했다.
로켓의 성격규정이 180도 바뀐 이유는 비확산 담당 관료들과 북에 대한 관성적 입장을 갖고 있는 관료들 연합의 승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들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대북정치라인은 정비되지 않아 북에 대한 정보를 직접적으로 정확히 파악할 통로는 없었고, 그 대신 북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서 광범위하게 유포되던 미신에 오염되었다. 오바마 정부로서는 유엔 제재로 가는 외통수만 남았던 것이다.
인선도, 정책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화를 하겠다는 스티븐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의 발언은 공허한 것이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채택에 임박해서, 북한을 침공하거나 무력으로 북한 정부를 전복시킬 계획은 결코 갖고 있지 않다는 그의 발언은 사태의 본질을 놓진 것이었다. 마치 고장난 축음기가 옛 노래를 계속 돌리듯이 부시 행정부 2기를 되풀이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북은 4월 로켓 발사 후 나온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자주권을 침해"한 것으로 규정했다. 북이 유엔의 제재 결의를 "자주권과 존엄의 문제"로 보고 있는데, 북을 전담하는 특별대표는 '전쟁과 전복'의 문제를 되뇌고 있다. 관성이 인식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관성이 지배하기는 북도 마찬가지이다. 2012년을 향한 북의 관성은 국제사회에 초래하는 파급효과와 반작용을 무시하면서 나가고 있다.
올해 초 왕성하게 벌인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현지지도를 '150일 전투'로 점화시키는 전환기에 '은하-2호'를 발사한 것은 내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로켓발사를, 더군다나 국방위원장이 참관한 발사를 유엔 안보리에서 규탄한 것에 강력히 반발하며 핵실험을 단행한 것도 내적 일관성을 갖고 있다. 하지만 외적 타당성을 외면한 내적 일관성은 한국을 횡행하는 미신의 일란성 쌍생아다.
이제 그러한 내적 일관성과 관성은 '결판'을 향해 치닫고 있다. 하여 북미관계는 바닥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 16일 한미 정상회담 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을 만난 이명박 대통령. ⓒ청와대출입기자단 |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미신은 현실과의 괴리에 부딪혀야 깨진다는 것이 경험적 지혜다. 관성은 힘에 부딪혀야 중단된다는 것이 뉴턴의 법칙이다.
둘 다 충돌을 예상한다. 단, 합리적 이성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충돌로 가기 이전에 미신에서 깨어나고, 관성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합리적 이성에 희망을 찾을 근거가 아직 있는 것인가.
E. H. 카의 <20년의 위기>는 국제정치학의 고전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이전의 과도기적 현실을 깊이 분석한 이 책은 국제정치에서 힘의 중요성을 강조한 현실주의적 저서로 편협하게들 이해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리고 그가 강조한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였다. 현실이 힘에 의해 지배된다면 그 현실을 냉철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현실이 미신과 관성에 의해 재앙으로 가고 있다면, 그 현실 또한 냉정히 직시해야 할 것이다. 희망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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