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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문학, 한국 문학의 정중앙에 자리잡아야"

작가 박태순이 본 '시인 함석헌, 사상가 함석헌'

올해는 사상가이자 민권운동가이며 시인이었던 함석헌 선생(1901~1989년)이 돌아가신 지 만 20년이 되는 해이다. 때마침 한길사에서 30권짜리 <함석헌 저작집>이 출간되는 등 함석헌 사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지난 1일에는 '함석헌기념사업회' 주최로 그의 삶과 사상을 되짚어보는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발표된 글 중 소설가 박태순의 '시인 함석헌, 사상가 함석헌' 전문을 소개한다.

들사람 얼의 문학정신이 왜 중요한가

한국 국문학계를 비롯한 문학전문가들이 문필가로서의 함석헌, 아름답게 우리말과 글을 다듬고 사용한 시인으로서의 함석헌을 본격적으로 연구해주기를 요청하려는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시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라는 제목의 글에서 김경재 교수는 한국 국문학계를 비롯한 문학전문가들의 게으름을 나무라고 있다. 문인의 처지에서 살피면 함석헌은 대사상가이기에 앞서 분명코 대시인이자 대산문가임이 틀림없지 않은가.

함석헌은 문단적인 문학인은 아니었다. 소설을 창작하기도 했던 단재 신채호, 불교문학인의 차원을 뛰어넘었던 만해 한용운, 또는 중앙문단에는 관심을 두지도 않았던 윤동주, 문익환의 생애가 그러하였듯이, 그는 자신의 시문학을 일구기는 했어도 그것이 문단적인 문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자신이야 전혀 전업문학인의 길을 택하려 하지 않았을지라도 실제적으로 그는 시를 쓰고 시집을 펴냈으며 주옥같은 산문들에다가 방대한 저술업을 이룩해냈다. 환언하면 그는 남으로부터 문학인의 인정을 받느냐 하는 데에는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스스로 시인이었으며, 그의 문필업 전체가 실은 시인의 언어와 문장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 지난 1일 교보문고 문화이벤트홀에서 열린 함석헌 탄생 108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소설가 박태순이 함석헌의 글에 대해 발표하고 있다.

한국문학인은 협의의 범주와 광의의 범주로 규정해볼 수 있다. 좁은 쪽의 문인은 일단 문단이라는 사회적 공간에서 활동하는 자들을 가리키지만, 넓은 쪽의 문인은 사회적 공간과는 상관없이 그 자신의 실존적 공간에서 절실한 진정성에 따라 실천적으로 문학작품을 생산해내는 이들을 포괄한다.

한국문학은 전자의 사회적 공간의 문인만 아니라 오히려 후자의 실존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문필가들의 문학작품 성과들을 수렴해야 하고, 이를 통해 한국문학 자체를 확장시키고 풍요롭게 해야 한다. 한국문학은 함석헌 문학을 접수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김경재 교수의 지적처럼 본격적으로 연구해야만 한다. 한국문학 정중앙에 함석헌 문학을 자리매김해야 할 이유는 분명히 있다.

오늘의 한국 문단 문학은 참으로 초라하고 나약하고 어느 면에서는 변질되고 타락된 모습도 보이고 있다. 함석헌 문학정신을 통해 문단 문학 일반은 호되게 꾸중을 들어야 하고 야단을 맞아야 한다. 함석헌의 '들사람 얼', 곧 암혈과 황야의 야인정신(野人精神)이야말로 정당한 한국문학정신이 되어야 한다. 문단문학은 이러한 '들사람 얼 차리기'의 채찍을 받아야 한다.

▲ 함석헌(1901-1989년)

특히 시문학 중에서도 서정시의 경우에는 시를 쓰는 사람 자신의 절절한 진실 탐구의 몸부림이 있어야 하고, 정당한 세계정신(weltgeist)을 갖기 위해 두 눈을 무섭게 부릅떠야 하고 우주적 사색에 도달하기 위해 가슴에 불을 질러야만 한다. 이러한 내면 탐구와 외면 통찰 그리고 진리 추궁에서 함석헌의 시정신은 참으로 치열하였던 것임을 바로 그의 시문학이 여실하게 보여준다.

함석헌 시문학을 새롭게 살펴보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창작시편들이야말로 방대하기 그지없는 함석헌 사상체계로 들어가는 들머리 입구가 되기 때문이다. 그의 시편들은 참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한 고뇌와 고통의 종교 각성시라고 우선 살필 수 있지만, 그러함에도 그 차원에서만 논의될 수는 없다.

함석헌의 생애는 시인-종교인-사상가의 각 단계를 참으로 험난하게 전개시키고, 자신의 고난사상 변증법으로 자신을 변혁시켜 초월해나간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그의 시문학은 실존인 함석헌과 종교인 함석헌 사이에 놓인 시대적 암울함, 사회적 방황, 인간적 고뇌, 종교적 시련과 갈등, 하나님 영접에 이르기까지의 상황을 감동적으로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살피게 된다.

그런데 21세기의 오늘날 우리가 논의하는 함석헌은 그의 씨
사상이 20세기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사유체계의 한 봉우리라는 것에 관한 것인 만큼 그의 시문학도 이러한 열린 지평에서, 그리고 종합적인 시각으로 살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참인간-참사회-참세계 찾기의 대장정을 어떻게 구현해나갔는지 살펴보고자 할 때에야 바로 그의 창작 시편들이 실마리를 풀어주게 한다는 점이다.

함석헌 사상의 핵심인 씨
사상, 고난사상의 고갱이는 그의 시문학 속에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의 수상록·회고록·사상서·시사평론 등은 그저 미문, 명문인 것이 아니라, 그의 시문학의 확장이며 산문 평론으로 써놓은 거대담론의 시어들이라 살피게 된다.

함석헌 사상대계의 씨
이라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시문학이었다. 시인 함석헌이야말로 종교인 함석헌, 사상가 함석헌의 씨
이었다.

지성소(至聖所)의 언어와 세계성의 탐험

나는 시인이 아니다.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 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수평선 너머>, '머리말').

함석헌의 시집 <수평선 너머>는 1953년 3월 피난지 부산에서 처음 발간되었다가 절판되었는데 한국사회가 4·19와 5·16으로 요동치던 1961년에 개정판이 나온다. 그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8·15해방정국의 혼란 속에서였다고 한다. 쉰 날(50일) 동안 신의주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썼던 옥중시 300여 편을 모아 '쉰 날'이라는 제목의 육필시집을 꾸몄는데, 월남을 하는 도정에 거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고 말았다 한다. 6·25전쟁의 피난 생활 와중에도 그는 줄기차게 시를 쓰면서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나섰는데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가 쓴 시들을 등사하여 열독하였다고 한다.

그의 시집 「머리말」은 그의 시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솔직담백하게 진술하고 있는데 그 자체로 특성 있는 문학론이자 시론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그는 전업작가로서의 시인을 자신의 시 창작에서 거부하고 있다. 이는 3·1운동 직후의 신채호의 문학주의 문학에 대한 비판을 상기시킨다. 의사·미술·교육·농부·역사·성경 연구 등에 두루 몰입되어왔음을 밝히면서 얼핏 자기 비하발언을 하고 있는 듯싶지만, 실은 정반대이다.

절대가치를 찾기 위한 기나긴 고난의 도정, 종교인으로서 '천로역정'과도 같은 줄기찬 영혼의 편력 끝에 마침내 다다른 궁극적인 경지를 알리고자 한다. 그것은 그냥 지고지순의 높은 차원이 아니라 '성령의 언어'로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지성소'의 신비스러운 체험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시는 결코 세속적인 언어의 주택일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맘에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라는 결론 부분의 문장에서 그가 시 창작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작가-작품-독자의 만남을 통상적으로 문학이라 하지만, 그는 이를 부인한다. 그는 독자를 설정하지 않는다. 내 맘에 칼질을 한 것이 그의 시문학의 출발지가 되고 님 앞에 다 바칠 뿐인 것이 그 시문학의 도착지가 된다면 이는 절대경지에서 이루어지는 절대문학의 완성이 된다. 오도송(悟道頌)의 차원이 아니며 그보다도 윗길로 올라간, 비유컨대 불립문자 유형으로 이루어지는 '진실문자'의 난해한 표현이 되고, 표층구조로 드러낼 수 없는 심충구조를 비상수단의 방법으로 드러내는 미학표현의 시어가 된다.

1950년대의 무질서와 혼란, 지식인사회의 천박한 학문수준과 곡학아세의 구조 속에서 시인 함석헌의 시문학은 돌연하기도 하고 당돌하기도 하다. 절망의 상황을 비밀 코드의 희망 언어로 돌파하려는 그 자신의 인간혁명 결단과 각오를 읽을 수 있다. 그 출발은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만의 천상천하 문학이고, 득의환희의 비밀암호 문학이다.

시인 고은이 "모든 문인은 그 개개인으로서 이미 독립정부인 것"이라고 했지만, 함석헌은 그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었다. 시인 함석헌이야말로 세속적인 문학행위의 시문학 아니라 하나님의 성스러운 역사(役事)로서의 시문학이었다. 이 역사를 어찌 전달할까 고심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시 언어는 문학주의 문학과는 달리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따름이다. 그는 언어를 믿지 않으려 하지만 그의 절대체험을 실어낼 수 있는 다른 표현 방도가 없기 때문에 시의 언어를 채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그나마 논리적인 문장이나 학술적인 설명방식 따위보다는 시의 언어가 더 진솔하고 진실하다고 시의 표현법을 승인해주려 하는 것이다.

불교 언어에 "불립문자 일초직입 직지인심 견성오도"(不立文字 一超直入 直指人心 見性悟道)라는 표현이 있다. 문자를 세우지 아니하고 대번에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본성을 찾아내고 도를 깨우치도록 한다는 선문답 문자이다. 언어 기호체계는 표현의 한계와 불합리를 갖고 있으며 문자기록을 통한 진리의 전수 방식에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것이고 보면 이심전심과 염화미소의 득도가 중요할밖에 없다.

불교만 아니라 노자·장자의 도가사상에도 언어불신론은 제기되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은 "도가도 비가도"(道可道 非可道)라는 말로 시작되고 끝을 맺는데,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닌 것이 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공자의 '정명(正名)사상'도 기본적으로는 언어의 타락과 궤변가들의 공리공론 담론들에 대한 경고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세기의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과 구조주의는 담론언어의 표층구조와 심층구조의 분석을 통해 언어는 인위적 구성의 기호체계인 것이지 진실의 표현수단 체계로서는 타당한 것이 아님을 논증한다.

'시'(詩)라는 한자어를 파자하면 '말(言)의 사원〔 寺〕'이라는 뜻이 되지만, 함석헌은 '지성소'라는 지극히 성스러운 장소성에다가 언어의 사원을 예비하고 있다. 지성소에서 만나는 절대체험, 신비체험이 그로 하여금 시의 언어를 소환시키게 하는 것이다.

함석헌 시 언어들은 난해한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시어들의 입구와 출구가 폐쇄회로를 형성해놓고 있으니 대단히 난해한 문학성의 언어들이 된다. 감히 함부로 어정쩡하게 접근해볼 수 있는 시세계가 아니다.

함석헌의 시편들 중에서 일반인에게 가장 애송되는 작품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인데, 아무나 이런 시를 쓸 수는 없고 아무렇게나 이런 작품이 써지는 것일 수는 더더욱 없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마음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하는 구절을 반복하는 이 시는 대화체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독백형 자문자답 방식의 작품으로 읽어보는 것이 더 이해가 빠를 것이다. '그 사람'이라는 3인칭의 인간형은 선지자이고 의인이고 인자(仁者)인 데 대하여, '그대'라는 2인칭은 그냥 속인(俗人)이고 평범한 생활인이다. 시의 화자(話者)인 1인칭은 작품의 표면 아니라 내면에서 중재자 역할만 맡는다. 3인칭의 현인과 2인칭의 속인을 일일이 대비해가며 '가졌는가' 하는 질문을 반복하는데, 실은 추궁이고 다짐이다. 그의 다른 시,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소리」를 읽는다.

나는 빈 들에 외치는 사나운 소리/살갗 찢는 아픈 소리
나와 어울려 부르는 너희 기도 품고/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때면
그때는 이 나 소리도 없이/고요한 빛으로 오리라.

함석헌의 종교시는 1인칭의 자기 다짐 시편들이 더욱 강렬한 메시지를 송출시킨다. 1950년대의 절망적인 사회상에서 한국의 모세가 되어야만 하는 그의 각오와 결의가 장엄하기보다는 비장하다.

1958년 <사상계> 8월호에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가 발표되고 필화사건을 당국이 만들어내어 20일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는 사태를 만난다. 그는 백색 독재사회 바깥의 빈 들에서 사나운 소리, 살갗 찢는 아픈 소리를 진정 뱉어낸 것이었다. 그것도 그냥 빈 들인 것이 아니라 '무한으로 갔다 내 다시 돌아오는' 영원 진리의 설교를 예비하고 있다. <사상계>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발표된 그의 산문들을 그의 운문과 대조하여 읽어보면 글맛이 완연 새로워지고, 대지성 함석헌의 인간적 풍모와 사회적 풍채가 입체적으로 부각된다.

고난의 역사를 처음으로 말할 때 내 심정은 약혼받은 거러지 처녀 같은 상태였다. 그에게 가진 것이라고는 부끄러움과 사랑과 곧음밖에 없는 모양으로, 아무것도 배우고 준비한 것 없이 역사를 가르치자고 교단에 선 나에게는 가진 것 있다면 믿자는 의지와, 나라에 대한 사랑과 과학적이려는 양심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다.(<뜻으로 본 한국역사>, 「넷째판에 부치는 말」)

'약혼받은 거러지 처녀'라는 표현은 역사서의 서문에 나오는 문장으로서는 참으로 이채롭다. 하지만 이러한 시적인 표현은 논리적인 이론 전개를 대번에 뛰어넘어 한 역사가의 절박한 역사 위기의식과 고난의식을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과학적이려는 양심'이라는 표현 또한 사회과학적인 설명방식은 아니지만, 근대과학문명과 종교사상의 갈등관계와 상충관계를 꼼짝달싹 못하게 압축시켜 짚어낸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던 책을 개정하고 보완한 것이었는데 원래 이 글은 1934년부터 다음해에 이르기까지 <성서조선>이라는 정기간행물에 연재되었던 것이었다.

'성서적 입장에서' 조선역사를 파악하고자 한다는 것은 1930년대의 조선 상황에서 대단히 벅찬 과제였음이 틀림없다. 1901년생인 그가 33세이던 때에 성서와 조선역사를 결혼시키고자 한 것은 곧 세계사의 보편성을 통해 한국사의 특수성을 판독하려는 것만 아니라, 또한 그 특수성 속의 보편성을 심층 탐문하고자 한 것이었으리라.

1930년대의 식민시대에 '성서적 입장에서' 보고자 한 조선역사가 1950년대 이후로 여러 번 개정 보완되면서 '뜻으로 보는' 한국역사의 콘텐츠로 개편되는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의 변화양상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뜻으로 살피지 않는 한국역사는 가치중립적인 실증주의 사관일 수도 있겠으나, 1950년대와 60년대의 긴박한 현실에서 '가치중립의 가치'는 함석헌에 의해 부인되고 있었다.

역사 진실의 해명, 곧 '뜻'은 한국사의 보편성과 특성이 어찌되며, 역사의 실천적인 동력이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밝히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곧 고난사관의 제출이고 씨사상의 확인이다. 한국사를 '씨의 고난'이라는 주어로써 풀어내려는 함석헌의 지적 모험은 21세기의 글로벌 스탠드 시대에 당연히 새롭게 계승되어야 한다.

'씨
'이라는 언어는 맞춤법의 '씨
'과는 다른 기호체계이다. 이 언어는 외국어로 번역될 수 없고 당연히 'ssial'이라고 표기할 수밖에 없는 한국사 및 한국인의 특성이 된다.

그렇다면 함석헌은 어떻게 씨
사상의 창시자가 될 수 있었을까. 곧 시인 함석헌과 사상가 함석헌의 적극적인 하나됨으로써 이룩해낸 '사상의 탄생'이라고 살펴보고자 한다.

미완성의 완성

1970년 4월 19일 함석헌은 언론인이 되는데, 곧 잡지 <씨
의 소리> 발행이 그것이다. 창간호의 권두언 「나는 왜<씨
의 소리>를 내나」라는 글에서 씨의 소리란 곧 민(民)의 소리임을 밝히면서 언론, 특히 신문이 제 역할을 못 한다고 질타했다.

신문이 무엇입니까. 씨
의 눈이요 입입니다. 그런데 씨
이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보여주지 않고,
이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말을 막고 못하게 합니다. ……무엇을 깊이 보는 것이 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저 달라졌다고만 떠듭니다. 못사는 씨
의 못사는 정도만 심해졌지, 씨
짜먹는 사람들의 심술머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 잡지의 발행인은 다시 「씨
의 울음」이라고 제목을 붙인 글에서 언론인을 맹공했다.

저 신문장이들을 몰아내라……. 그놈들 우리 울음 울어달라고 내세웠더니 도리어 우리 입 틀어막고, 우리 눈에 독약 넣고, 우리 팔다리에 마취약 놓아버렸다. 그놈들 소리한댔자 사냥꾼의 개처럼 짖고, 행동한댔자 개의 꼬리 치듯이 할 뿐이다. 쫓아내라. 돌로 부수란 말 아니다. 해가 올라오면 도깨비는 도망가는 법이다. 우리가 울어야 한다. 우리가 울면 우리 소리에 깰 것이다. 힘도 우리 것이요 지혜도 우리 것이다. 그것은 참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오늘에 이런 '씨
의 소리'가 있는지, 이런 '씨
의 울음'이 어찌 울려나오고 있는지 묻는다. 글쟁이 문인으로서 한없는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갖는다.

환경오염보다 언어오염이 더 심각한 것이 아닌지 일깨우기도 한다. 말장난이 정말이지 장난이 아니다. 거짓말이 정말이지 말씀이 아니다. 지난 1990년대로부터 '함석헌 읽기'의 독서회가 꾸준히 이어져 오고 있다. 환경이 너무도 탁하지만 그래도 맑은 공기는 마셔야 한다. 언어들이 너무 어지럽지만 그래도 고운 말을 해야 하고 참된 말을 찾아보아야 한다. '씨
의 시'를 새롭게 읽고 또 읽어야 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함 선생께서는 집필하였지만 그가 미처 하지 못했던, 아울러 할 수도 없었던 문필작업이 남아 있다. '함석헌의 뜻으로 본 한국현대사'라는 테마이고 텍스트가 된다. 환언하면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판독해야 하고 새로운 잣대의 어젠다로서 편집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함석헌의 뜻으로 본 현대한국'이 바로 그러한 준거의 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좌향좌 우향우 식의 잣대로서, 또는 독립이니 건국이니 하는 말다툼으로, 산업세력이니 민주세력이니 하는 편 가르기 따위로 살펴보는 한국현대사 자체가 참으로 지겹다. 한국현대사의 뜻이 제발 크고 넓고 높아야 한다. 현대한국은 함석헌의 '뜻'을 제대로 구현해오지 못하였으나 현재 한국사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문명사적 위기와 민중사적 고난이 새삼 그의 저술업을 되돌아보게 하고 그의 글을 새롭게 찾아 읽게 한다.

함석헌 시의 대표작으로는 '대선언' '미완성' '수평선 너머' 등을 꼽을 수 있겠지만, 독자들은 자기 노력과 투자를 하지 않은 채 이런 시편들의 깊은 맛을 안이하게 얻어내지는 못한다. 이것은 함 선생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도 하다.

'미완성'이라는 서사시에서 그는 질문한다.

"모든 시인의 이상 환상은 그 무엇을 노래하던가?/자연과 맘의 섞어 짜는 역사의 음악은 그래 무엇이라 아뢰던가? ……아아, 우주야 인생아 생명아 너는 영원한 미완성이더냐?"

마침내 이 모든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시인은 마련하는데 아무렴 그렇지 그렇고말고, '영원한 미완성'이라 한다. 완성된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이 실제로는 미완성이고, 미완성의 완성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발전하고 역사가 발전한다고 노래한다.

그칠 줄 모르고 닫는 인생아, 네 걸음걸음에 무한한 기쁨 있을지어다.

미완성에서 보다 나은 미완성을 향하여 그칠 줄 모르고 닫는 인생을 과연 내가 갖고 있는 것일까. 인생 축복의 세례를 함석헌 시로부터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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