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의 기적. 김수환 추기경을 애도하는 인파가 4일간 4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새벽 6시부터 자정 무렵까지 강추위에 떨며 4,5시간을 기다려야 추기경의 마지막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 것을 '명동의 기적'이라 불러도 좋을 듯싶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추기경에게 열광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자라면 장사를 해서 25세에 가정을 꾸리고 30세에는 어머니에게 인삼을 사드리겠다는 소박한 꿈을 지녔던 소년이 47세의 나이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어 그동안 걸어왔던 성직자로서의 큰 걸음이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나 개인적으로는 추기경의 인간적인 풍모가 가슴에 와 닿았다.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결혼해서 오순도순 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골 오두막집 풍경, 얼마나 정겨운 풍경인가." 추기경인들 어찌 인간적인 고뇌가 없었을까. 이런 인간적인 고뇌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분은 또 추기경 임명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의 감회를 이렇게 술회하기도 했다.
한국교회가 세계교회에서 인정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 …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망갈 길이 정말 막혔구나'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 일본 유학, 사제서품, 주교임명 등 신상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결국에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도망갈 방법이 없을까'라는 궁리를 떨치지 못했다
물론 '도망간다'는 것이 성직자의 길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이 얼마나 솔직한 고백인가. 이런 인간적인 면모 때문에도 사람들은 그에게 이끌렸을 것이다. 그동안 신문과 인터넷에 소개된 수많은 일화 이외에 비교적 덜 알려진 이야기 한 토막을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에서 추기경에게 심산상(心山賞)을 수여하기로 결정한 일이 있었다. 이 상은 독립투사이자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인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선생의 업적을 기려서 제정한 상인데, 수상자 선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내부의 진통이 있었다. 심산선생은 저명한 유학자이다. 유학자인 심산선생 이름으로 주는 상을 기독교인이 받아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수상자를 추기경으로 결정하고 추기경의 의사를 타진한 결과 추기경은 수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종교가 장벽이 되지 않은 사랑의 베풂
그런데 심산상을 수상한 사람은 심산선생의 기일(忌日)에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묘소를 참배하려면 유교식으로 절을 해야 하는데 추기경에게 그걸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추기경은 거리낌 없이 절을 했고 모두들 놀랐다. 후일 기독교계에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추기경은 "이 어른이 살아계셨다면 마땅히 찾아뵙고 절을 했어야 하는데 돌아가셨으니 묘소에서 절을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라 말했다고 한다. 참으로 감동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추기경으로부터 받은 감동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균관대학교의 심산사상연구회는 교수들의 자발적인 모임이어서 재정이 넉넉하지 못했다. 교수들의 회비와 기타 찬조금으로 운영하던 터이라 그 때 상금이 고작 7백만 원이었다. 이런 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 들으셨는지 추기경께서는 후일 사람을 시켜서 조그마한 상자를 보내왔는데 그 안에는 상금 7백만 원에 3백만 원을 더한 일천만 원의 돈이 들어 있었다.
추기경은 이런 분이었다. 그분에게는 유교와 기독교의 장벽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고 가셨기에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이 그토록 그 분의 선종(善終)을 아쉬워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 이 칼럼은 다산연구소(www.edasan.org)가 발행하는 <다산 포럼> 24일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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