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 있는 코리아소사이어티 사무실에서 만난 에반스 리비어 회장은 당시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던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의 미국 방문설에 대해 손사래를 쳤다. 코리아소사이어티 관계자 누구도 북한으로부터 그런 의사를 전달받은 바 없고 전달한 적도 없다는 것이다.
리비어 회장은 "지금은 추측이 아니라 미국과 북한 모두에게 서로의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며 "다양한 채널의 북미간 접촉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리비어 회장을 비롯해 필자가 최근 미국을 방문하며(14―20일) 만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 박한식 조지아대 교수 등 한반도 문제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북미대화를 통한 한반도 비핵화를 강조했다.
대북정책, 연장인가 변화인가
오바마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미국 내에는 북미대화에 대해 두 가지 기류가 형성되어 있는 듯했다.
첫째는 부시 행정부 2기의 대북정책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안이다. 즉 크리스토퍼 힐 전 국무부 차관보가 남겨 놓은 정책 유산인 2.13 합의 3단계 '검증 가능한 폐기' 협상을 6자회담의 틀 안에서 지속하는 것이다.
둘째는 2000년 클린턴 행정부가 당시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을 대북 특사로 보내고,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풀려고 했던 것과 같은 '통 큰' 대북 협상을 하는 방안이다. 2000년 10월 '조(북)미공동선언(코뮈니케)'에 기초해 북미관계와 한반도 비핵화 문제를 일괄 타결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오바마 행정부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북정책의 기조는 차기 행정부에서도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표명해 전자 쪽에 가까운 기류를 보이고 있다. 실제로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지난 13일 상원 외교위원회 인준청문회에서 "나와 오바마 당선인은 6자회담이 북핵 문제를 종식하는 데 있어 장점이 있는 틀(framework)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기류에 대해 문정인 연세대 교수는 "미 국무부 관료들이 선호하는 6자회담틀에 매달릴 경우 복마전 같은 워싱턴 관료정치의 희생물이 되기 쉽다"며 "이럴 경우 또 다시 미국은 관료적 타성에 젖은 주고받기(tit-for-tat) 식의 지루한 협상을 일상화할 것이고, 북한은 이에 '살라미 전략'(협상카드 키우기 전략)으로 대응해,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제2의 핵실험과 같은 또 다른 위기국면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빠르면 2월 말까지 대북정책 재검토를 끝내고 북한과 다시 대화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아직까지는 오바마 행정부도 6자회담의 틀 안에서 북한의 핵 개발 계획 검증체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계속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러나 오바마 행정부가 비핵화를 위한 북한과의 직접 외교를 여러 차례 거론함에 따라 6자회담과는 별도로 올 상반기 안에 북미 사이에 고위급 회동이 성사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고위급 특사 교환은 6자회담 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6자회담의 진전에 결정적 돌파구가 될 수 있다. 커밍스 교수는 "2000년 북미간 고위급 특사 교환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미국 내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고위급 대북 특사 파견을 위한 정지작업의 일환으로 미국 의회 관계자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조만간 평양을 방문할 가능성이 조심스럽게 점쳐지고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의 한 북한 전문가는 "빠른 시일 안에 의회 차원의 대표단을 평양에 보내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의 외무성보다 국방위원회, 즉 핵 폐기에 대한 북한 군부의 정확한 입장을 타진하길 원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 빌 클린턴 전 대통령, 그의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 현 국무장관, 클린턴 시대 국무장관이었던 매들린 올브라이트(오른쪽부터). 이들은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강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대북 특사설까지 나오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북한의 입장은 '관계 정상화와 핵폐기 병행'
미국의 한반도정책과 대북정책이 아직까지 확정되지 않은 가운데 북한은 '통미통중'(通美通中)의 정책방향을 시사하며 경제 재건을 위한 대외환경 조성에도 적극 나설 의사를 밝혔다.
북한은 우선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수호"하겠다는 대외정책을 표시했다. 지난해 미국의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오바마 행정부와 더욱 적극적으로 관계 정상화와 비핵화 협상을 진전시켜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미국에 내세우고 있는 협상 방식은 신뢰 구축이 담보된 '행동 대 행동'원칙이다. 그러한 북한의 입장은 1월 13일 나온 외무성 대변인의 담화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담화를 통해 북한은 우선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에서 비롯됐으므로 비핵화를 통한 북미관계 정상화가 아니라 "관계정상화를 통한 비핵화"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외무성은 "서로 신뢰가 없는 조건에서 9.19 공동성명을 이행할 수 있는 기본 방도는 '행동 대 행동' 원칙을 준수하는 것이고, 검증 문제에서도 이 원칙이 예외로 될 수 없다"며 "'행동 대 행동' 원칙에 따라 비핵화가 최종적으로 실현되는 단계에 가서 조선반도 전체에 대한 검증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국내 언론들은 일제히 북한이 '선(先) 관계정상화 후(後) 비핵화' 입장을 밝힌 것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지난해 평양을 방문했던 미국의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의 입장은 북핵 문제가 미국과의 불신과 대결에서 발생된 만큼 미국과의 관계가 풀리면 핵을 폐기하겠다는 것으로 선 관계정상화 후 핵포기가 아니라 두 과정이 병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현실적으로 보면 북미간 신뢰구축과 실무회담 과정이 병행되겠지만 북한은 다양한 방식의 접촉과 교류를 통해 신뢰를 쌓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실무회담을 진행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북한은 고위급 특사 교환을 통해 큰 틀(회담의 원칙)을 확정한 뒤 '행동 대 행동'의 원칙에 따라 실무회담을 진행하는 방식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도 "오바마 대통령이 아예 취임 초기에 클린턴 전 대통령을 대북 특사로 보내 역사적 반전을 모색해야 할 것"이라며 "클린턴 특사가 검증 가능한 핵 폐기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북미 적대관계 해소는 물론 북미 국교 정상화를 위한 기본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는 오바마 행정부의 메시지를 전달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북쪽의 화답이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북미간 고위급 특사 교환, 여전히 유효한 카드
북측도 '클린턴 전 대통령의 특사 방북'에 긍정적 입장인 것으로 전해진다. 일본의 한 북한 전문가는 "북한은 클린턴 전 대통령이 방북할 경우 북핵 검증 및 2.13 합의 3단계 협상에 적극 나선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구상의 성사 여부는 클린턴 특사가 방북했을 경우 미국이 원하는 수준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북측이 오바마 대통령과 외교안보팀에 어떻게 심어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현재로선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확정되기 전 북미간 실무접촉을 통해 북한이 북핵 포기 의사를 명확히 하고, 이에 호응해 클린턴 전 대통령 또는 고위급 대북 특사가 전격적으로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하는 방식이 북핵 문제를 푸는 최선의 수순으로 보인다.
북한이 먼저 군 고위 인사를 워싱턴에 특사로 보내거나 오바마 대통령의 측근 인사를 초청해 미국의 '의구심'을 해소하고 특사 교환을 위한 사전 조율을 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최근 보여주는 북한의 행보는 좋은 징조다. 지난 23일 방북한 왕자루이(王家瑞)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유관 당사국들과 평화적으로 함께 지내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특히 그는 "한반도 정세에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라며 "중국과 협력과 조화를 이뤄 6자회담을 부단히 진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합니다"라고 발언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방중 초청도 수락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발언은 대미협상에 나서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2000년대에 들어 적극적인 대미협상에 앞서 정상회담 또는 고위급 특사 교환을 통해 중국과의 전통적인 우의를 확인해 왔다. 북핵 문제에서 중국과 미국의 이해가 일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과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미국과 협상을 촉진하려는 북한의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또한 '6자회담 진전'을 언급함으로써 북한이 6자회담을 무력화시키고 북미관계 개선에만 주력할지 모른다는 일각의 우려를 완화하고, 한반도 정세에 추가로 긴장을 조성할 가능성을 일정 부분 낮췄다.
로버트 우드 미 국무부 대변인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발언을 "좋은 일(good thing)"이라고 논평한 뒤 북한이 6자회담에서 이뤄진 핵 폐기 합의를 지킬 것을 촉구했다.
▲ 지난 23일 왕자루이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만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밝힌 입장은 '통미통중'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뉴스 |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고 있는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의 적극적인 행보에 어떤 방침을 내놓을지는 한 달 정도 더 기다려봐야 할 것이다. 6자회담의 현안인 북핵 검증 문제을 비롯해 북미 양자간 입장 차이는 앞으로의 북미협상이 녹록치 않을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힐러리 국무장관이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선택하는 시기와 장소에서 어떤 외국 지도자라도 만날 의향이 있다"라고 밝힌 것처럼 북미대화는 부시 행정부와는 다른 차원에서 시작될 것이 분명하다.
오바마 행정부가 북한을 협상 상대로 인정, 적극적인 양자대화를 하면서 비핵화 진전 상황에 따라 부분적인 관계 정상화도 진척시켜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이뤄지고 있는 북미간의 성명전은 탐색전에 불과하다. 새로운 차원의 6자회담과 북미 직접 협상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떼려 하고 있다. 그 첫걸음이 북미간 고위급 특사 교환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다.
미국인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면서 미국의 통합과 재건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국의 한인동포들도 인종 간 화합과 이념·계층·세대의 대통합을 통해 한인동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희망했다. 미국과 세계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오마바 행정부의 한반도정책과 대북정책도 갈등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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