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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AG '싹쓸이 작전'이 비극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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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올림픽-AG '싹쓸이 작전'이 비극 불렀다"

[정세현의 정세토크] <3> 냉전기 남북대결 에피소드

지금 내가 입고 있는 정장은 평양에서 만든 양복입니다. 108불 주고 맞췄어요. 그만큼 세월이 많이 바뀌었어요. 작년 6.15 행사 때 평양에 갔던 한나라당 의원들도 하나씩 맞춰 왔다고 하던데, 옛날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죠.

1990년 여름에 일본에 갔을 때 북한에서 임가공해온 양복을 하나 입어보려고 도쿄역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정도 후쭈라는 데까지 가서 옷을 사온 적이 있었어요. 냉전이 국제적으로는 이미 끝났다고 선언되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남북간에는 남아 있었기 때문에, 조총련계 기업이 평양에서 바느질한 옷을 사 입고 다닌다는 건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한나라당 의원도 입고 다니는 시대입니다. 사소한 거지만 냉전 때는 꿈도 꿀 수없는 일들이 지금은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식은 아직도 냉전시대의 사고를 뛰어넘지 못하는 이중성. 그런 걸 보면 씁쓸합니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이 양복이 평양에서 108불(약 11만원)에 맞춘 것이다. ⓒ프레시안

나는 77년에 통일원에 들어갔는데, 당시는 분명 냉전시대였습니다. 그 후로 국제적으로는 탈냉전이지만 남북간에는 냉전이 남아있던 시절, 남북간에도 탈냉전 무드로 넘어가는 시절까지 30년 정도 현장에서 있었던 거죠.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남북관계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아, 저건 내가 통일원에 처음 들어갔던 70년대 말과 같은 방식이 아닌가, 아니면 저거 한 80년대 중반 방식 아닌가 하는 그런 느낌을 지울 수 없는 대목이 자주 나타나요. 그래서 오늘은 한숨 돌린다는 차원에서, 옛날 얘기를 좀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싶어요.

지금 남북관계가 너무나 꽉 막혀 있는데, 70년대나 80년대는 통일원이 과연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문제를 풀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정부가 70~80년대 방식으로 하는 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선택이었다고 평가받을 것인지, '그때 그러는 게 아니었는데' 하는 후회를 남기는 선택으로 평가받을 지를 전망하기 위해서도 오늘은 옛날 얘기를 해봅시다.

'남북 이질화 실태조사'의 추억

당시 에피소드를 하나 얘기하겠습니다. 77년에 통일원에 들어갔는데, 76년을 기점으로 남쪽의 1인당 국민소득이 북쪽보다 1.5배 이상 앞서가는 시점이었어요.

남북의 1인당 국민소득이 대등하게 된 건 71년이었어요. 4.19가 나던 60년 남한의 1인당 국민소득은 87불이었고, 북쪽은 148불이었어요. 북쪽이 우리보다 1.7배 정도 잘살았던 거죠. 그렇게 북쪽이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게 연방제였습니다. 경제적인 합작을 통해 사실상 정치적인 흡수통일로 갈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제안이었어요. 그러다가 한국은 60년대 들어 수출주도형으로 나갔잖아요.

그런데 북한은 소련이 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미국한테 무릎을 꿇는 걸 보면서, '아 저거 못 믿겠다'고 생각해서 국방에서의 자주, 경제에서의 자립을 목표로 내걸면서 내부적으로는 경제와 국방의 병진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렇게 중공업 중심, 군수공업 중심으로 발전하다 보니까 70년대 넘어오면서 수출주도형 경제인 남한보다 뒤쳐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당시 나는 교수가 되고 싶어서 박사학위 코스워크를 다 끝내고 논문을 써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모택동 연구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자료를 마음대로 볼 수 있는 데가 중앙정보부하고 통일원 밖에 없었는데, 마침 통일원에서 연구관 티오를 23명을 늘려 석사학위 소지 이상을 특채한다고 해서 들어갔던 거예요.

그리고 78년이 되니까 통일원에서 납북한 이질화 실태조사란 걸 했어요. 귀순자를 심층인터뷰 해서 해방 이후 30여년 만에 남북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는가를 연구하는 거였어요. 그때 우리는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솔직히 몰랐습니다.

그때만 해도 통일원이 언론 매체에 나올 수 있는 건 1년에 딱 한번이었어요. <남북한 경제력 비교>라는 책을 만들어서 인구, 경제성장, 부문별 성장을 비교하는 도표 한 장을 내고 우리가 북한보다 잘 살고 있다는 걸 홍보하는 게 통일원이 언론에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계기였습니다.

근데 왜 이질화를 따지는가? 통일을 하려면 동질화를 지향해야 하는데, 그걸 위해서는 이질화의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질화 실태조사를 했어요. 신참들이니까 열심히 했죠. 근데 지나고 보니까, 참, 그때 그게 어떤 점에서는 분단 이데올로기로 역이용될 수 있는 여지가 굉장히 많은 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슨 얘기냐. '북쪽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체제 유사성이 자꾸 멀어지니까 이대로 놔두면 통일이 된다한들 서로 남남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북한의 문화, 생활스타일이 바뀌었다, 우리와 너무 차이가 난다.' 그 조사는 그런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된 이유가 뭐냐? 역시 공산주의고 일인 개인숭배다, 라는 얘기. 그건 물론 원인이 될 수 있었죠. 그렇지만 결국 그러다 보니까 그게 반공 캠페인 비슷하게 돼버린 거예요.

북한 가야금에 다리가 달려 있는 걸 가지고도 시비를 걸었었어요. 전통악기를 이렇게 망칠 수 있느냐, 하면서. 남자들이 한복을 안 입는 것, 스님들이 가사장삼을 제대로 입지 않고 그냥 양복에 두루마기 걸치고 나타나서 머리만 스포츠로 깎고 외국 사람들이 오면 스님인 양 행세하는 것도 비판하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우리보다 문화적으로 저열하고 전통문화에서 많이 벗어나 있는데 그게 다 공산주의 때문이란 식으로 얘기를 하니까, 북한과는 다시 합친다고 해도 문제가 복잡하겠구나 하는 일종의 통일에 대한 거부감을 자극하는, 그런 부작용을 만든 거예요. 냉전시대 일종의 남북경쟁에서 빚어진 부작용이죠.

나는 박사과정이었던 76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었는데, 강의를 하면서 이질화 심층면접 조사에서 나오는 새로운 사실을 얘기해 줬는데, 그게 얼마나 신기해요. 그런데 그 얘기가 학생들의 머릿속에 어떤 독소가 되어서, 분단 이데올로기가 될 것인가에 대해 냉철하고 중장기적인 전망 없이, 그냥 가십거리로 재밌게 얘기했단 말예요. 난 그런 점에서 반성합니다. 반성해야 되고.

지금도 북쪽 얘기만 하면 북한은 완전히 전통문화에서 이탈해서 이상한 짓만 하고 있는 것으로 단정하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가끔 있죠. 그런데 나중에 북한 사회의 문이 열리면서 그 사람들을 접하고 하루하루 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면서, 평양을 간다든지 하면서, '아 그때 우리가 북한 사회에 대해 얼마나 엉뚱하게 국민들에게 이미지를 심어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전통 문화의 어떤 부분은 우리보다 훨씬 더 온존돼있는 대목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든 사람과 젊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우리 사회는 자식 이외의 젊은 사람들한테 대접을 받는다는 건 기대할 수도 없지만, 아직도 북쪽에는 전통적인 요소가 남아 있어요.

한 사회의 문화를 이념문화, 행위문화, 용구(用具)문화로 나눈다고 하면, 용구면에서는 남북이 큰 차이가 없습니다. 행위문화에서는 유사성이 아직도 굉장히 많고. 이념문화에서는 차이가 있지요. 이념적으로 차이가 있고 저 사람들이 자나 깨나 남조선 해방만 생각하고 있다고 몰아붙이는 분들도 있지만, 그 이념문화란 것도 그 위에 올라선 정치체제가 유지되는 동안만 북한 사회의 행위문화를 규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거예요. 그러나 자기들의 선택에 의해서건 또는 중국이나 베트남처럼 국제사회의 흐름에 적응하기 위해서건, 어쨌든 정치체제의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이 온다면 그 이념문화도 굉장히 많이 바뀌고, 저쪽 사람들의 행위문화에 심대한 영향을 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일제시대 후반부로 오면서 일본이 조선 사람들을 황국신민화 하려고 얼마나 강한 사상교육을 했습니까. 조선말 못쓰게 하고 절도 일본식으로 하게 하고, 말투도 그렇게 하게 하면서, 실제로 일본화된 사람들이 상당히 있었어요. 친일파는 말할 것도 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사고방식 자체가 세뇌됐죠. 그렇지만 해방이 되고 황국신민화를 강요하는 체재가 없어지면서, 그런 사람들이 곧바로 다시 조선 사람으로 돌아왔었다는 사실. 그걸 생각하면 북한의 정치·경제체제가 바뀌면 이념문화 차원에서의 이질성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그런데 70년대 말 그때는 이념문화, 행위문화, 용구문화 모두에 대해 시비를 걸려고 했단 말예요. 그게 심하게 나와서 반북, 반통일, 분단 이데올로기가 되는 겁니다.

새 정부 들어서 북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려고 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럴 때 한번 쯤 30여년 전에 우리 정부가 북한과 관련해 국민들에게 보내려고 했던 메시지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 됐는지를 따져 봐야 합니다. 지금도 북쪽에 대해서 비판적으로만 얘기하는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 때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그럴 거예요. '나쁜 놈들, 전통문화 다 버려놓고, 완전히 김일성 중심으로...' 이런 식이죠. 물론 김일성 중심의 역사서술을 한 건 분명해요. 그러나. 그게 나중에 동질화되는데 큰 장애요소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좀 인식하고, 그렇게 돼있는 북한을 우리가 앞으로 통일될 때까지 어떤 식으로 동질화시켜 나갈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는 겁니다. 분단된 상태지만 교류협력을 통해서 얼마든지 동질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 교류협력이 활성화되면서 상당부분 동질적인 요소들이 나타나고 있고, 정서적인 면에서 공감대가 많이 생겼어요.
▲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1988년 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발표되자 박용수 서울시장(가운데)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이 환호하고 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은 86년 아시안게임까지 '싹쓸이'해 올 것을 지시한다. ⓒ연합뉴스

'작전의 시대'…싹쓸이 작전이 하달되다

두 번째는 80년대 얘긴데, 신군부 시절. 그 때는 모든 게 작전의 시기였어요. 작전. 박정희 대통령하고는 또 다릅디다. 박 대통령은 군인 출신이면서도 전투적인 마인드보다는 종합적이고 전략적으로, 미국과의 관계에서도 일정한 정도 각을 세울 때는 세우고, 안보적으로 독립을 하려고 했어요. 자주국방이란 걸 그때 내세웠죠. 지금은 없어졌는데 국방부 건물 앞에다가 자주국방이라고 한글로 써서 걸어 놓고 하던 시절에, 미국 미사일 들여온 걸 분해해서 다시 조립해서 발사하는 실험하고, 그러다가 미국하고 불편해지고, 심지어 핵무기 개발까지 하려다가 미운털 박히고 해서 말년에 가까워질수록 한미관계가 불편해졌어요. 미국은 미군 철수한다고 겁주고, 이쪽에서 강하게 어필했던 게 79년 상황이었는데, 79년이란 시점은 미소 경쟁에서 소련의 대미 위협도가 상당히 줄어들었을 때입니다. 헬싱키 프로세스가 심화되면서. 박 대통령 말기에는 한국이 만만하지 않았어요. 미국이 다루기 버거운 상대였습니다.

그런데 80년으로 넘어오면서 정권 출범 과정에서의 문제 때문에 신군부는 다시 미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어요. 안보가 위험하기 때문에 군인이 계속 통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펴야 했기 때문에, 북한은 멀리하거나 압박하면서 미국한테 완전히 협조하는, 그야말로 한미동맹 지상주의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미동맹 지상주의, 그리고 한미관계를 모든 것의 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은 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관련해서 나왔던 대안입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 정부는 전체 유권자에서는 30%라고 하지만, 어쨌건 유효투표의 56%를 얻었기 때문에 정권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대미관계를 긴밀하게 해서, 그리고 일종의 북풍을 이용해서 정권을 유지할 필요가 없는 상황인데 이상하게 지금 한미관계를 모든 것의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그건 시각과 인식의 문제인 것 같아요.

다시 80년대 얘기로 돌아와서, 우리가 81년에 88올림픽을 따왔는데, 우리가 그러니까 북쪽에서는 86아시안게임을 유치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때 우리 통일원에서는 우리가 올림픽을 하니까, 아시안게임만은 북한이 할 수 있도록 암묵적으로 밀어줘서 동반 발전하도록 하면 어떨까, 북한이 그렇게 해서 개방효과를 좀 내게 하면 어떨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물론 80년대 초에는 북한에 개방개혁의 의지가 있다는 조짐은 없었어요. 84년에 합영법이란 걸 만들고 했었지만...어쨌든 우리가 북한을 완전히 따라 잡았으니까 우리가 올림픽을 하는 만큼 북한도 아시안게임을 할 수 있도록 해서 북한 사회에 개방효과도 가져오고, 어떤 식으로 처신해야 국제사회와 무리 없이 어울릴 수 있는지 그 코드를 좀 익힐 수 있게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생각했어요. 그게 남쪽에서 말하는 점진적 단계적 통일의 길이었어요.

마침 그때 북쪽에서 80년 10월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내놨는데, 거기에 대해 우리의 대응 방안을 한참 연구하고 있을 때예요.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이란 게 그때 나왔죠. 그걸 내가 실무 책임자를 하면서 호텔에서 작업을 했는데, 그때 나랑 같이 통일원에 들어갔고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작업을 같이했던 동료중에 구본태라고 있었어요. 당시 북한정치외교연구관을 했는데, 그 사람은 아이디어가 굉장히 많고 순발력이 참 좋아요. 그렇게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을 만들면서, 우리 젊은 사람들은, 북한에도 어떻게든 기회를 주어야 동질화도 시킬 수 있고 그러니까 20세기의 흐름에 동참하게 하려면 아시안게임 같은 거라도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무 힘없는 젊은 사람들이었지만.

그런데 88올림픽을 따오고 난 다음에 전두환 대통령이 86아시안게임도 몰아오라는 작전 지시를 내린 거예요. 그건 뭐냐? 그것도 체제경쟁 개념으로 보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명분은 88을 잘 치르려면 86에서 예행연습을 해야 한다는 거였지만, 실제로는 싹쓸이하자는 거였고, '능력도 없는 사람들한테 주긴 뭘 줘. 우리가 경제도 잘 되니까 본때를 보여서 기를 죽여야 해'하는 생각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86까지 가져왔죠. IOC나 AOC에 미국의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미국의 힘을 빌려서 다 가져올 수 있었어요. 그래서 북한이 대안으로 뛰기 시작한 게 89년 평축(세계청년학생축전)이예요. 그 결정권은 소련이 가지고 있었죠.

어쨌든 그 싹쓸이가 그 이후의 많은 불행의 씨앗이 됐다고 생각해요. 남북간 경제력 경쟁에서 뒤진 후에 국제무대에서 남북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서 북한이 매번 졌단 말예요. 올림픽을 가져간 사람들이 아시안게임까지 몰아가면서 얼마나 좌절감을 느끼고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그렇게 해서 북한이 느꼈던 패배감이나 경쟁심, 그런 것들과 83년 랑군 테러(아웅산폭파사건)는, 직접적으로 관련은 없지만,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너무 코너에 몰아붙이니까...승승장구하는 남조선의 기세를 꺾으려면 무리수라도 둬야 한다는 판단을 북한이 했다는 거죠. 비극을 만들었고 문제가 많은 생각이었지만...코너에 몰리다 보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북한을 상대할 때, 남북간에나 국제무대에서 그냥 뭐든지 싹쓸이 하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게 남북관계나 한반도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는데 좋은 것인지, 남북관계에서 위기를 자초하는 게 아닌지를, 항상 두 수 세 수 생각하면서 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 좀 적어줘. 각하를 설득해 볼게"

또 하나. 남북 이면사 비슷한 건데...83년 10월 북쪽은 아웅산폭파사건을 저질러 놓고 자기들이 저지르지 않았다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남쪽의 자작·자연극이라고 했는데, 국제사회에서 북한의 소행이란 건 정평이 나 있었죠. 그러다 보니까 북이 이미지 쇄신을 하려고 내놓은 게 84년 초 소위 미북-남북 투 웨이 톡스, 즉 양변 평화회담을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이 받으면 자기들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모양새가 좋지 않았어요. 정치·군사적 근본문제는 미국하고 얘기하고, 통일문제를 남한과 얘기하겠다는 식으로 분리해서 회담을 제안했으니까 받기는 어려웠죠. 1월에 연락이 와서 한 달 반 정도 주거니 받거니 편지하고... 그 때 내가 남북대화사무국 대화운영부장을 하고 있을 때니까 현장에 있었죠.

북쪽이 그렇게 해서도 면피가 안 되니까 4월인가 84년 LA올림픽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을 제의하고 나서요. 그래서 스포츠를 좋아하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그건 두말없이 받으라고 해서 체육회담을 세 번 했어요. 그런데 결국 깨지면서 정세가 좀 나빠졌어요. '단일팀 만들 생각도 없으면서 마치 관심이나 있는 것처럼 제의했다가 책임을 우리한테 넘겼다'라면서 북한에 대한 정서가 좋지 않게 됐어요.

근데 그해 84년 8월 30일 밤부터 비가 아주 엄청나게 내렸어요. 그때만 해도 술을 많이 마실 때였는데, 새벽 1시엔가 강남 어디서 술을 마시고 있었어요. 그런데 집에 갈 수 없을 정도로 비가 내렸고, 택시도 안 보였어요. 그래서 그냥 옷을 다 적시면서 걸어서 집에 갔는데, 그 비로 남측이 엄청난 수해를 입게 됩니다.
▲ 1984년 남한에서는 집중호우 피해를 입었다. 그해 10월 북한은 수재 물자를 남한에 보냈다. 10월 2일 평양에서 대남 수해물자를 싣고 있는 장면 ⓒ연합뉴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9월 8일 북쪽 적십자가 남쪽에다 수재물자를 주겠다고 제의를 해요. 그러니까 정부에서는 북한이 체제선전 차원에서 우리는 못살고 자기들은 잘사는 것처럼 대내선전을 하고, 동포들이 어려움 당했을 때 돕는다고 해서 친북분위기를 만들려고 한다고 생각해서 '노(No)'를 했어요. 그게 11일입니다. 거절하는 담화는 대한적십자사 대변인 명의로 나갔어요. 물론 실제 결정은 안기부가 했지만.

근데 그날 오후였나...당시 통일원 장관이 이세기 장관이었어요. 젊은 장관이었습니다. 나보다 7∼8년 위니까, 84년이면 40대 중반정도 됐죠. 장관께서 나를 좀 좋게 봤는지 여러 가지 정책적인 판단을 나한테 구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나를 찾는다고 그래. 그래서 가봤더니 "정 박사, 적십자에서 안 받는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글쎄요, 왜 안 받는지 모르겠네요. 이미 체육회담까지 했는데, 랑군 사건에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에 자꾸 저러는 것 같은데, 수해물자 인도인수를 계기로 적십자회담으로 발전시키면 이산가족 상봉사업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찬스 아닙니까? 왜 하나만 알고 둘은 계산을 안 하는 조치를 취했는지 모르겠네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이세기 장관께서 "좋아, 바로 그걸 좀 적어 줘"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디다 쓰시려고요?"했더니 "아니 좌우간 적어 주란 말야. 수재물자를 받아서 남북관계를 좀 뚫고 나가야 한다는 보고를 간단하게 적어 줘. 그럼 내가 안기부장 설득해서 같이 각하한테 가서 결심 받아낼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심야에 비밀작업을 해야 하니까 12일 날 늦게까지 남아서 육필로 보고서를 썼죠. 한자 잔뜩 써가지고. 그때는 높은 사람들한테는 좌우간 한자가 많이 있어야 보고서가 권위가 있으니까. 그래서 그 이튿날 아침 장관한테 드렸어요.

그러면서 14일 날, 다시 우리 적십자사 총재가 '좋다 받겠다. 실무접촉을 18일에 하자'는 제안을 하면서 수해 물자가 넘어왔죠. 또 그걸 계기로 10월에 우리가 적십자회담을 제안하니까 북쪽에서 받았어요. 그 결과 나중에 85년에 고향방문단 사업도 되고, 그 연장선상에서 남북경제회담이 성사됩니다. 84년 북한 합영법을 보고, '아 북이 누군가의 투자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가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도 우리 경제는 좋고 북한 경제는 나쁘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지만, 어쨌건 우리가 북쪽의 경제사정을 감안해서 이때 뚫고 들어가서 입지를 확보해야 민족화합통일을 위해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할 수 있다고 해서 경제회담을 했죠.

또 그 여세를 몰아서 국회회담도 이루어졌지만 그건 잘 안 됐어요. 어쨌든 그렇게 회담이 계속 새끼를 치거나 파급효과를 내고 자주 회담을 하다 보니까, 자연히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와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낸 총리회담으로 연결이 된 겁니다.

처음에 수재물자 제안을 거절했던 것은 냉전적 사고였습니다. 북쪽에서 제안했던 것도 사실은 냉전적이고 체제경쟁적인 개념이었을 겁니다. 물자 전달에 대해서도, 북한은 꼭 전달 사업을 직접 하려고 했어요. 현장에 직접 갖다 주겠다는 거예요. 공화국 깃발 나부끼면서. 마치 우리가 요즘 남쪽의 누가 보낸 쌀이라고 붙여서 보내고 싶어 하는 기분으로. 남쪽에 체제선전을 하려고 했는지, 아니면 남쪽에 전달하면서 고마워하는 사진을 하나 찍어서 북한 주민들한테 '이거 봐라 우리 체제가 이렇게 우월하다'고 선전하려고 했는지 모르지만...지금도 대북지원을 하면 항상 체제우월적 개념에서, 북에서 우리가 제시하는 조건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과연 지금 이 시대에 의미가 있는 건지 한 번 생각을 해봐야 되죠.

처음에 수재물자를 거절했던 건 체제경쟁적인 사고 때문이었지만, 젊은 이세기 장관의 생각은 상당히 전향적인 거였어요. 그 분이 나중에는 상당히 보수적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아직도 개인적으로 가까워요. 장관이 그렇게, 그야말로 새로운 발상을 해서 대통령을 설득해 받자고 해서, 냉전시대이지만 체제경쟁 개념을 뛰어넘어서 화해와 협력의 길로 갈 수 있는 단초를 지금쯤은 열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이제 우리가 월등히 잘 살게 됐는데 아직도 일대일 개념으로 싸울 수 없지 않느냐는 게 그 때 내가 만들고 장관이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의 기본 개념이었습니다. 장관도 거기에 동의를 하셨고. 허허.

그때로부터 20년이 넘은 상황인데 아직도 북쪽이 당시에 우리한테 했던 것과 같은 발상, 그리고 초기에 우리가 거절했던 판단 기준, 그런 식으로 북쪽을 보는 그런 경향이 살짝살짝 비치는 기미가 있어서 참, 이것 참, 걱정돼요.

- 지금 말씀을 들어봐도 그렇고, 임동원 회고록 같을 걸 보면, 냉전시대에도 몇몇 전향적인 사람들이 '내가 대통령을 설득하겠다'하는 장면들이 가끔 나오는데요, 이명박 대통령의 스타일을 보면 과연 이 정부에서 그렇게 '아이디어 써와, 대통령 설득하게'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전두환 대통령과 이세기 장관은 오랜 인연이 있었대요. 대학에서 가르치던 분이 대통령과의 인연 때문에 신군부 시절에 정치권에 진입을 했죠. 일종의 개인적인 친분과 신뢰가 있었죠. 얘기 잘 못 꺼냈다가 (대통령이) 화를 좀 내도 "아, 그거 뭐, 죄송합니다"라고 해도 되는 정도의 신뢰가 형성된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거죠.

그냥 관료는, 대부분의 경우, 함부로 말 못하죠. 아니 말 안하죠. 인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이건 옳은 거라고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관료중에 흔치는 않아요. 다만 전문성을 갖추었으면서 역사적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으면 관료 중에도 과감하게 말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죠.

그러니까 이 정부에서도 통일 문제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신주의로 나가지 말고 소신을 가지고 남북관계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건의를 하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대통령 자신은 지금 워낙 국내문제 때문에 이거저거 매일 사건이 터지니까 남북관계까지 생각을 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조금 상황이 풀리면...그래도 누군가가 얘기를 해야 될 거예요.

- 88올림픽 공동개최는 왜 안 됐죠?

88올림픽 공동개최 제안은 우리가 먼저 했을 겁니다. 그랬더니 저쪽에서 '좋다. 대화는 해보자'고 나왔지만, 우리가 아주 받기 힘든 조건을 내놨죠. 광고수입의 절반을 내놔라, 축구 결승하고 개막식은 북에서 해야 한다는 식으로 좋은 건 다 가져가는 조건을 제안했죠. 나중에는 주한미군 철수 같은 조건을 자꾸 내거니까 못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이쪽에서 제안한 것도 사실은 생색내기 차원이었고.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7.7선언이란 걸 내놨는데, 우리가 중국, 소련과 수교를 할 테니 미국, 일본도 북한과 관계개선을 하라는 게 7.7선언의 골자였는데, 그해 가을에 열리는 88올림픽을 성대하게 치르기 위해서 국제환경을 조성하려고 했기 때문에 북한에도 공동개최를 제안하게 됩니다.
▲ ⓒ프레시안

그런 일은 그 전에도 있었어요. 79년에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평양에서 열렸는데 단일팀을 만들자는 얘기를 북쪽에서 먼저 했어요. 당시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회담을 했는데 현장에 가서 보니까, '단일팀이 안 되면 남쪽은 평양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대화를 하자는 거예요. 소위 원칙의 굴레를 씌워서 상대방을 못 오게 하려는 거였지. 그래서 결국 못 갔지. 안 갔지. 우리는 단일팀 만들어도 좋고, 안 되면 탁구대회 참가를 보장하라고 했고, 저쪽은 '아니, 이 민족의 경사에 단일팀을 만들어야지. 우리가 두 개로 쪼개져 있다는 걸 자랑하려는 거냐'라는 되지 않는 논리를 폈어요. 남쪽은 갈 의향은 있었죠. 그 때쯤 되면 자신이 있을 때니까. 그러니까 북한이 우리를 결국 못 오게 하려고 그랬던 겁니다. 88년에도 냉전이 끝나기 전이니까 체제경쟁 개념, 생색내기 제안이 많이 있던 시절이에요.

- 공동개최는 못해도 북한을 88올림픽에 데려오겠다는 생각은 안 했나요? 중국, 소련도 다 왔었는데...

79년 아프간 사태 때문에 모스크바 올림픽이 반쪽이 되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LA올림픽도 반쪽이 됐지만, 88년 올림픽에는 소련과 동구라파가 다 왔단 말예요. 북한을 빼고. 그래서 대대적으로 성공이라고 하고, 7.7선언 덕이라는 식으로 정부에서 선전을 했죠. 북한은...안 오리라고 생각을 했지. 공동개최가 안 되는 마당에 왔겠어요?

* '정세토크'는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현 민화협 대표 상임의장, 김대중평화센터 부이사장)이 한반도 문제에 관해 자신의 경험과 견해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격주 화요일에 발행되지만, 이번 3회는 베이징 올림픽 남북 공동응원단 참여차 정 전 장관이 출국하는 관계로 하루 앞당겨 발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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