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한 프레시안 애독자가 오늘(17일) 이메일을 보내왔다. 뉴욕타임스에 난 한국 관련 기사를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한국전쟁 당시 한 미국인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50여년이 지난 이제 한국인들이 보답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50년 12월말 흥남철수 당시 미국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가 위험을 무릎쓰고 피난민 1만4천명을 남으로 실어 나른다. 이 구조작전을 지휘했던 레너드 라루 선장은 4년후(1954년) 뉴저지주에 있는 한 수도원의 수도자(마리너스 수도사)가 된다. 자그마치 62만평의 대지 위에 1백명 가까운 수도자들로 한때 융성했던 이 수도원은 그러나 70년대 이후 수도자들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2000년 무렵 폐쇄될 운명을 맞게 된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한국의 가톨릭 성직자들이 이 수도원을 되살리는 데 앞장 서게 된다. 2001년 10월 12일 경북에 있는 왜관수도원이 이 수도원을 살리기로 최종 결정한 지 이틀후 마리너스 수도사는 87세를 일기로 선종한다."
북핵 문제, 주한미군 철수 문제 등으로 한국과 미국 사이의 파열음이 그 어느때보다도 크다. 또 한국 내부에서는 반미 대 친미, 자주 대 동맹 간의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라간의 관계와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니다. 비록 국익을 놓고 정부끼리 갈등한다 하더라도 사람간의 우정은 나눌 수 있다. 부시행정부가 미국'인'의 전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며 미국에도 선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어려운 때일수록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고,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작은 에피소드이기는 하지만 이 기사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 기사는 뉴욕타임스 뉴저지판 11일자에 실려 있다. 이메일을 보내주신 안재철씨는 현재 뉴저지주에서 개인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인으로 기사를 번역하는 수고까지 아끼지 않았다. 안씨는 또 흥남철수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원이었던 로버트 러니씨가 당시 상황에 관해 써낸 책 <기적의 배>를 지난해 한글로 번역해내기도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활동에 관한 보다 자세한 사항은 안씨가 만든 홈페이지 www.meredithvictory.com에 상세하게 나와있다. 안씨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어떤 구원**
3년 전 성 바오로 수도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 있었다.
뉴저지주 써섹스 카운티에서 전원풍의 북서쪽 한 모퉁이, 500 에이커 (약 62 만평) 의 광활한 대지에 자리잡은 수도원 건물에서는 한 때 80여명에 이르는 수도사들이 아름다운 성가를 부르고 있었고, 고등학교, 여름캠프, 크리스마스 농장을 운영하면서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기도와 노동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속세를 등진 종교생활에 헌신하려는 사람의 수가 감소하게 되었고, 성 바오로 수도원은 자취가 사라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런데 2년 전 한국에서 구조대가 도착했다. 목격자에게 그 광경은 반 세기 전에 베푼 인도주의적 헌신 -- 나중에 수도사로 입문한 한 선장이 수천의 한국인을 구조한 일 -- 이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되돌아오는 것으로 보였다.
"이제 우리가 무엇인가 돌려줄 때라고 믿습니다," 한국의 한 수도원 지도자들 중의 한 명으로, 성 바오로 수도원의 부흥을 위해 돕고 있는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가 말했다.
현재의 수도원의 부흥을 통해서 그 보답을 받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도주의적인 사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개월이 되는 1950년 12월 혹한의 어느 날 밤에 일어났다. 미국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남북한을 가르는 38선으로부터 135마일 북쪽의 흥남항으로 진입하였다.
수천의 중공군이 북한군을 지원하기 위해 밀려 들어왔고 북한주민은 산길과 지뢰밭을 뚫고 탈출하였다. 사람들은 흥남항의 해안으로 몰려들어 출항할 것으로 보이는 아무 배에나 올라타기 위해 기뢰가 부설된 동해 바다로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시가지는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고, 포성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갑판은 심하게 흔들렸다. 아이젠하워 행정부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상구조 작전이라고 찬양한 이 구조작전에서,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가 수송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우겠다고 다짐하고 항구로 진입하였다.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배의 밑창에 300톤의 제트연료를 실은 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승무원들은 14,000명의 피난민을 승선시켜 화물 엘리베이터로 내려보내 화물칸을 빽빽하게 채웠다. 신발도 신지 않은 피난민들이 힘닿는 대로 가재도구와 아이들을 데리고 승선했고, 배는 12월 23일에 출항하였다.
"선장님은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당시 상급선원으로 근무했던 76세의 로버트 러니씨는 현재 뉴욕, 화이트 플레인즈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한 텔레비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무 간단했죠. 마음의 동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음식, 전기, 물이 없었지만 안전한 곳으로 가는 3일간의 항해에서 인명 피해가 하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날에 남해의 거제도에 도착할 때까지 5명의 아기가 태어났다.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승무원들은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 미국 정부의 용감한 선박 표창장, 미 상선단 최고 영예 공훈메달 등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명예의 세례를 받았다.
구조작전과 그 이후의 신병의 영향으로 확고한 신앙심을 얻은 라루 선장은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와 여생을 베네딕도회 수도사로 지냈다. 그는 독신, 종신서원 (베네딕도회 수도사가 평생 같은 수도원에 정주하겠다는 서원), 순종을 서약하였다. 선장은 마리너스 수사라는 수도자명을 받았고, 베네딕도 수도회의 '기도하며 일하라'는 전통에 헌신하였다.
1954년 라루 선장이 처음 도착했을 때, 그보다 30년 전 독일의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파견된 30명의 성직자들의 힘으로 번창하고 있는 공동체를 수도원에서 볼 수 있었다. 60여명의 수도사가 그곳에서 작은 기숙학교를 맡아 가르치고 있었다. 가톨릭 평신도들은 주말이면 성서공부와 기도의식을 위해 피정의 집에 모였고, 여름이면 수도사들은 수백 명의 남학생을 모집하여 성 베네딕도 캠프를 운영하였다. 수도사들은 또한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을 개발하여 뉴저지 주에서 가장 큰 농장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수도원 밖의 세상은 번영, 성의 혁명, 민권운동, 평화운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었다. 1962년 종교회의 (제2 차 바티칸 공의회) 에서 교황 요한 13세는 "교회의 창구를 개방"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고, 성찬식에 변화를 주었으며 타문화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완화하였다.
가톨릭 교회와 수도생활에 관한 글을 다수 발표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폴 윌크스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종교생활을 떠나기가 쉬워졌습니다. 60년대가 시작되자 세계 곳곳에서 봉합된 부분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수도사는 자신의 생활을 재점검하게 됩니다. 나는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조지타운대학교의 가톨릭 교회 사도직 응용연구 센터에 따르면 1965년에서 2000년까지 미국의 가톨릭 인구는 47퍼센트가 증가한 반면에 성직자와 수도사의 숫자는 33퍼센트 감소하였다.
성 바오로 수도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엄청난 비용이 드는 캠프의 운영은 1970년대 후반에 중단되었다. 2000년에 이르면 10명의 수도사 (그중 3명은 85세가 넘었다) 만이 남게 된다. 일부는 사회봉사 프로젝트로 자리를 옮겼고, 어떤 이들은 결혼을 했으며, 기도만을 일삼는 은둔생활에 모든 것을 바칠 수 없다고 결심하고 떠난 이들도 있었다.
1975년부터 2000년까지 25년 동안, 성 바오로 수도원의 수사직에 종신서원 (영구히 헌신)을 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새로운 삶을 위해 떠났죠," 열 네 살 때 학생으로 수도원에 들어온 조엘 메이컬 (올해 57세) 전 수도원장이 회고하였다. 떠난 사람들의 상당수는 수도원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돌이켜 보면, 우리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혹은 그렇게 보였다.
2000년 10월에 마지막 남은 수도사들은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지도부에 공동체의 해체를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고, 다른 수도원에서 새 보금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3개월 후 예레미야 슈뢰더 대수도원장이 수도원의 상황을 평가하기 위해 독일에서 건너왔다. 그는 성 바오로 수도원이 쇠잔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문을 닫도록 허가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수도사들이 수도원의 부흥을 위해 부질없이 고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슈뢰더 대수도원장이 말했다.
그런데 뉴저지주에 도착한 대수도원장은 수도원의 전원적인 풍경과 납작 지붕의 단순한 2층 건물들이 들어선 장엄한 구내의 모습에 놀랐다. 정교한 유럽의 성당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대수도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성 바오로 수도원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깊은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 곳을 잃는다면 마음의 짐으로 남았을 것입니다."
슈뢰더 대수도원장은 한국인들에 의한 성 바오로 수도원의 구조를 마리너스 수사의 선행에 대한 하느님의 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대수도원장은 그러한 관련성을 그저 어렴풋이 알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대수도원장은 미국의 다른 지역에 소재한 다양한 인종 구성의 가톨릭 공동체의 활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근방에 한국인들로 구성된 가톨릭 공동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주교는 18세기에 한국에 소개된 이래 남한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으며, 수도원 제도는 아직도 번성하고 있다. 140명의 수도자가 있는 왜관 수도원은 성 바오로 수도원을 회생시킬 수 있는 인력과 기술을 함께 보유하고 있었다. 마침 수도사들은 외국에서 선교사업을 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슈뢰더 대수도원장은 왜관 수도원의 원장인 김구인 요한 보스코 신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질의하였다. 2001년 10월 12일, 김신부는 사명을 받아 들였다. 이틀 후 라루 선장이었던 마리너스 수사가 87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2개월 후, 한국인 수도사들이 도착하였고, 수도원 복구작업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벽돌이 깔린 길을 따라 있는 수도원 성당에서 주일 오후 한국어 미사를 올리기로 하였다. 또 토마토, 무, 배추 등 유기농 야채밭을 만들어 가꾸었다. 식당에서는 치즈버거와 통조림 스프 대신 한국의 전통식품인 김치가 제공되었다.
수도사들은 써섹스 카운티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영어수업을 수강하였고, 물이 새는 지붕을 보수하였으며, 느려터진 구식 인터넷 대신 초고속 광통신 DSL을 설치하였다.
수도사들은 또한 근방의 마을과도 교류하기 시작했다. 2002년 11월에 피정의 집이 다시 문을 열었고, 한국인 천주교 청년들이 수도원에 모여 축구와 배구의 혼합형인 족구시합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7월이면 성 베네딕도 캠프를 부활시킬 것이라고 수도사들은 전한다.
"나는 수도원 공동체가 미래로 뻗어 나갈 수 있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라고 김구인 신부 (62세) 는 말했다.
복구작업의 소식이 전해지자 멀리는 뉴욕시의 퀸즈 지역에서까지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이 뉴튼에 찾아와 일을 도왔다. 그 사람들 중에 1973년에 미국에 이민 온 이 막달레나 (한국명 이순자, 57세) 라는 신자가 있다.
이순자씨는 2002년 초부터 거의 매일 알파인 시의 집에서 한 시간 가량 운전하여 수도원으로 왔다. 이씨는 피정의 집에 쓸 침대보와 커텐을 설치하는 일을 도왔다. 이씨는 수도사들이 뉴저지주의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하는 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자재구입을 위한 쇼핑에 따라가 일일이 통역을 해주었다.
이씨는 수도원 미사에도 참석하였다. 자신의 신앙을 모국어로 섬길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없어서 자원봉사를 계속하였다. 이씨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느낌이 들어요."
슈뢰더 대수도원장은 성 바오로 수도원의 변신을 기뻐했다. 오틸리엔 성 베네딕도 수도회가 다른 수도원을 도와준 역사는 있지만 "이와 같은 구조작업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라고 대수도원장은 말한다.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구조작전 이야기는 계속 수도원 담장 밖으로 퍼져나갔다. 구조 작전은 2000년에 출판된 빌 길버트의 "기적의 배"의 주제였으며, 오레곤 주 벤드 시의 영화제작자 알 제이 맥해튼은 구조작전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지난 2년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건 미국인의 성향을 비추는 거울과 같아요. 어떻게 미국인들이 전시가 되면 사람들을 도와야겠다는, 순진하면서도 숭고한, 생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죠."
또 한 사람의 수도원 자원봉사자인 안 베네딕도 (한국명 안재철) 씨는 지난 한 해의 상당 부분을 흥남 구조작전을 기념하는 데 바쳤다. 안재철 씨는 6개월 동안 "기적의 배"를 한국어로 번역하였고, 책은 지난 7월에 출판되었다. 지난 달부터 안재철 씨는 수도원 경내에 메러디스 빅토리호 기념비를 세우기 위한 기금 모금작업에 들어갔다.
부친이 한국군 대령으로 예편한, 올해 47세인 안재철 씨는 미국상선이 한국인을 위해 치른 희생에 관한 이야기를 미국인과 한국인 모두에게 전파하기를 희망한다. 채탐시에 거주하는 안재철 씨는 "저는 미국인들이 미국의 인도주의 정신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은혜가 한 바퀴 돌아 성 바오로 수도원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이순자 씨의 신앙은 더욱 굳건해졌다.
"이건 일종의 기적입니다." 이순자 씨는 말했다. "50년 전에는 마리너스 수사가 한국인 들을 도왔는데 지금은 한국인 수도사들이 이 수도원을 도우러 오다니 대단한 우연의 일치 입니다. 나는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수도원은 몰락의 지경 까지 갔었죠. 하지만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느낄 수 있잖아요."
Copyright 2004 The New York Times Company
The New York Times
January 11, 2004, Sunday, Late Edition - Final
SECTION: Section 14 NJ; Page 1; Column 3; New Jersey Weekly Desk
LENGTH: 1782 words
HEADLINE: A Tale of Salvation
BYLINE: By JENNIFER GOLDBLATT
DATELINE: NEWT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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