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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의 고향에서 시작한 고대 그리스인의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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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워즈>의 고향에서 시작한 고대 그리스인의 철도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 그리스부터 오스트리아까지

고대 이집트를 떠나 새로운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던 시기로 점프를 해보자. (☞ 이전 기사 : 5000년 전 '피라미드 도로'와 KTX 선로의 놀라운 비밀)

이번에 도착한 곳은 서양 정신세계의 뿌리를 두고 있는 고대 그리스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말할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람들이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이다. 이 밀레토스는 오늘날의 터키 영토인 에게해의 소아시아 쪽 이오니아 지역의 제일 남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가장 비범한 그리스 종족이라고 불리 우는 이오니아 인들은 에게해 연안에 12곳의 도시를 번창 시켰다. 이 도시들은 동양과 서양이 만나서 용해되는 용광로 같은 역할을 했다. 그중에 동방에서 들어오는 관문 역할을 했던 밀레토스는 세계의 모든 것을 구경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국제도시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학문과 철학이 꽃 필 수 있는 자양분을 가지고 있었다.

<스타워즈>의 고향이 된 밀레토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인의 철도

실크로드의 종착지였던 밀레토스는 동방의 문화적 세례를 가장 먼저 받을 수 있는 도시였다. 천문학과 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달력, 수학, 계량법, 동전을 교류했으며, 이것들을 나르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밀레토스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도시였다. 온 세계의 사람들이 모여들어 날마다 진기한 광경이 펼쳐지는 무대였던 밀레토스를 상상할 때면 영화 <스타워즈>에서 우주의 여러 행성들에서 온 온갖 외계인들이 섞여있는 마을의 장면이 떠오른다. 밀레토스는 현재 터키 영토인데 이 밀레토스에서 동쪽의 내륙으로 조금 들어간 카파도키아라는 지역에서 스타워즈의 외계행성 장면이 촬영되기도 했다. 수많은 언어가 사용되고 다양한 종교가 숭배되며 낮선 인종들이 교류하는 곳에서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을 찾고자 하는 철학적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최초의 자연철학자 중에서도 첫 등장인물인 탈레스가 활동했던 시기가 기원전 6세기 전반이라고 전해진다. 탈레스는 철학자이기 이전에 이집트를 자주 왕래하면서 무역을 했던 상인이었다. 탈레스는 여행을 많이 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당대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정치와 수학, 특히 동방에서 전래된 천문학을 습득해 일식을 정확히 예측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한 과학자이기도 하다. 서양 고대철학의 첫 번째 인물인 탈레스가 살았던 기원전 6세기의 밀레토스를 비롯한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들은 에게해를 둥글게 품고 있는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밀레토스에 도착한 동방의 진귀한 물품들은 배를 이용해 아테네로 옮겨졌다. 아테네에 도착한 물건들은 그리스 전체에 퍼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시 다른 나라들로 수출되었는데 가까이는 이탈리아와 발칸반도의 여러 나라들에서 멀리는 아프리카까지 전달되었다. 그리스 남부의 지도를 유심히 보면 아테네를 중심으로 사람이 앞뒤로 양 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인데 이 한쪽 다리의 끝이 고린토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신약성서의 주요 저자인 바울이 이 고린토 지역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에게 사랑한다면 성질부터 죽이고 일단 오래 참아야 한다는 유명한 성경구절을 담아 보낸 편지 묶음이 신약성서의 고린도서다. 사람의 발뒤꿈치 같기도 한 고린토 지역 끝에 거대한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붙어 있는데 두 개의 땅덩어리가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다. 이 지형이 고대 그리스에서 선로를 깔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 그리스 지도 ⓒ구글 지도 화면 캡쳐

아테네 항을 출발한 무역선들이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서는 에게해 남단을 거쳐 지중해로 나아가 이오니아 해로 진입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끼고 도는 원양항해를 해야 했다. 고대의 선박 건조 능력과 항해 기술로 거친 에게해를 극복하고 지중해를 도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인들은 고린토 지역의 잘록한 허리에다 선박이 이동할 수 있는 길을 놓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고린토 땅 끝에 모인 그리스인들은 단단한 석회암으로 평행하게 선로를 깔았다. 궤도의 간격은 광궤로 알려진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궤도 폭보다 10여cm가 넓은 1.6m였는데 현재 철도의 표준 궤도가 1.43m이니 지금의 기준으로 하면 초광궤를 깐 셈이다. 폭은 3.4m에서 6m로 이 폭을 기준으로 그 위를 지나갔을 배의 크기를 생각해 보면, 한강 유람선 정도도 안 되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는 것인데 고대인들의 간은 상당히 컸을 게 분명하다. 고린토와 펠로폰네소스 사이의 잘록한 허리 사이를 관통하는 6~8.4km 길이의 그리스 최초의 철도인 디올코스(Diolkos) 라인이 기원전 600년 전 운행을 시작한다.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선로위에 바퀴가 달린 평평한 카트-이런 형태의 화차를 현대 철도에서는 장물차(flat-car) 라고 부르는데 수출입용 컨테이너나 탱크나 트럭 같은 군수물자를 운반하는데 쓰인다-가 준비되고 이 위에 에게해에서 이오니아해로 넘어갈 배가 올려 진다. 배라기보다는 보트 수준에 가까운 25t의 무게에 35m 길이, 5m 높이의 돛대를 장착한 삼단 노 갤리선이 운반 중 파손에 대비해 단단히 묶인 채 이동을 시작한다.

이 열차를 운행하기 위해 112명에서 142명의 사람들이 동원됐다. 시간이 촉박한 화물을 위해 급행열차도 운행되었는데 이때에는 180명 정도의 인부가 열차를 끌었다. 디올코스 열차의 속도는 시속 2km였는데 전체 구간을 이동하는데 세 시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디올코스라인이 가동되자 해상 무역의 신기원이 열렸다. 목숨을 걸고 거친 바다에서 수백km를 우회해야 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온 철도였다. 영국 과학사학자 M.J.T 루이스에 따르면 디올코스 라인은 궤도위의 바퀴가 이탈하지 않아야 한다는 철도의 모습을 정확히 구현한 고대 철길이라고 말한다. 공공적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이용자에게 통행료를 받아 해상 무역 과정에서의 이익을 챙긴 디올코스 노선은 서기 1세기 까지 약 650년 정도 유지됐다. 현대의 모든 철도노선을 포함해서 가장 오래 동안 이용된 노선이 디올코스 철도다.

탈레스에 이어 자연철학자 중에 이 디올코스 노선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기원전 525년 출생했다고 알려진 파르메니데스다. 이탈리아 남부의 엘레아에서 태어난 파르메니데스는 태어난 곳의 지명을 딴 엘레아학파의 사상가였다. 파르메니데스는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는데 이런 연유로 후대 사람들이 떠돌이 음유 시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플라톤이 쓴 <대화>편에 파르메니데스가 그의 두 제자였던 제논과 청년 소크라테스와 이야기하는 광경이 나오는데 장소는 아테네였다. 이탈리아 남부에서 아테네로 가기 위해서는 이미 운행되고 있던 디올코스 철도를 이용했음이 분명하다.

서양 철학의 주요 논제가 된 존재와 무, 있음과 없음에 대한 최초의 문제제기자로 불리는 파르메니데스는 이곳저곳을 방랑하면서 여행하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을 얻는다. 어느 한 지역이나 사회에서 절대화된 가치가 또 다른 지역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직접 보면서 우리가 눈앞에 숭상하는 가치들이 허구 투성이임을 일깨워준다.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얼굴이 담긴 포스터가 비에 젖는다고 어쩔 줄 모르는 북한 사람들과 명문대 입학이라는 목표만 제시한 채 아이들을 수년간 학교와 학원이란 감옥에 수감시켜놓고 고문하는 남한 사람들이 절대시하는 가치란 게 파르메니데스의 입장에선 하찮은 거짓과 위선일 뿐이다.

파르메니데스는 밤의 나라를 떠나 빛의 나라의 여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말했다. 진리와 이성이 한편이고 가상과 억지가 한편인 싸움에서 참된 앎은 순수한 이성의 인식으로 획득된다고 말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 할아버지 같은 포스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는 곳곳마다 열변을 토했을 이 노회한 시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파르메니데스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허구성을 깨닫고 없어야 할 것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위 학력, 허위 주소, 허위 봉사, 허위 농지 소유, 허위 부동산 거래, 허위 재산, 허위 병역, 허위 상속, 허위 공약 등 허위로 가득 찬 세계를 없애는 게 파르메니데스에게는 진리의 여신에게 다가가는 길이다. 아테네로 향하던 파르메니데스는 진리와 정의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은 디올코스 노선의 기차를 끄는 수 백 명의 인간 기관차들처럼 스스로의 헌신과 노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았을까?

이 고린토 해협은 19세기에 와서야 프랑스 자본에 의해 운하가 건설되어 배가 직접 수로를 타고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운하의 가장 적절한 이용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멀쩡한 내륙의 강바닥을 파내어 시멘트를 들이 붙고 뱃길을 만드는 황당하고 어리석은 일에 비하면 고대 그리스 문명이 건설한 디올코스 철도라인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사회 기반 시설이다.

말이 끄는 형태의 철도도 고대 그리스의 몰타에서 시작됐고 돌을 깎은 레일을 이용한 노선들도 고대 로마제국의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고대에 이어서 중세 유럽에 다시 철도의 흔적들이 발견된다. 독일 서쪽 프라이부르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도 궤도가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1350년경으로 추정되는데 대성당의 유리창에까지 등장할 정도면 궤도를 이용한 수송이 적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산악용 열차의 원조, 라이쓰쭉 철도

라이쓰쭉(Reisszug) 철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철도 시스템이다. 1515년 마테우스 랑 추기경에 의해 기록된 문서에 처음 등장한다. 나중에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대주교가 되는 마테우스 추기경은 잘츠부르크에 처음 등장한 이 새로운 형태의 교통 수단에 대해 기록을 남긴다. 라이쓰쭉 노선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논베르크 수도원 광장에서 호헨잘츠부르크 성으로 운행되는 궤도 교통수단인데, 산 위에 있는 성 위까지 산등성이에 레일을 만들어 운행했다. 높은 산을 오르는 수단인 만큼 삼으로 엮은 로프를 연결해 승객들을 태워 끌어 올렸는데 케이블을 연결한 산악용 열차의 원조 격이라 할 수 있다.

▲ 잘츠부르크시 잘자흐 강변에서 보이는 호헨잘츠부르크성 ⓒ박흥수

라이쓰쭉 노선의 출발지는 동쪽 성벽 아래에 있는 논 베르크 수도원 광장이었다. 이곳은 역사상 한 번도 적에게 함락된 적이 없는 요새화된 성으로 오르기 위해서 65도의 경사를 갖는 꽤 가파른 노선이다. 성을 지키기 위해 성채의 중심으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다섯 개의 방벽이 둘러싸고 있었고, 열차는 육중한 나무문으로 만든 다섯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만 산위의 성 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썰매 형태로 운행되다가 곧바로 나무로 만든 레일과 바퀴가 도입되어 철도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이 열차는 1910년경까지 사람이나 동물의 힘으로 움직였으니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연력으로 400년이나 운용된 산악열차이다. 이후 몇 번의 개조와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1988년에서 1990년에 현재의 모습을 갖춘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쇠로 만들어진 선로가 깔리고 삼을 엮어 만든 로프 대신 강철 케이블이 연결되어 전기 모터에 의해 열차가 끌어올려진다.

폐쇄회로 모니터가 달린 산뜻한 차체가 검은 망토에 깊게 모자를 눌러쓴 수도사들 대신 선글라스와 디지털 카메라를 든 관광객들을 태운 채 운행되고 있는 500년 된 철도.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호헨잘츠부르크 산악 열차는 잘츠부르크 시내를 내려다보며 오늘도 달린다.

여행을 하다 보면 끊임없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를 먼저 볼지,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 고민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놓치는 게 있으면 두고두고 한이 되기도 한다. 디지털 카메라가 도입되기 전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여행을 다닐 때 넉넉히 준비를 한다고 해도 항상 예상보다 일찍 필름이 동이 났다. 24컷이나 36컷의 필름 통들이 거덜 나고 마지막으로 장착한 필름 표시창의 숫자가 점점 줄어 들 때의 조바심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참호 속의 공화국 병사가 파시스트 군대의 총공세를 눈앞에 보면서 몇 발 안남은 탄약을 만지작거리는 심정과 다를 바 없으리라. 평소 같으면 당연히 셔터를 눌렀을 상황에서 아끼고 아끼다 결국 여행이 끝날 때 필름 맨 뒤의 서너 컷은 남겨오는 어리석은 일을 반복했다. 불가피한 선택을 해야만 할 때,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은 두고두고 가슴 속에 회한을 남긴다.

고대하던 잘츠부르크에 가다

6개월 전 고대하던 잘츠부르크에 갈 기회가 있었다. 공공운수연맹 국제부와 철도노조 정책팀이 프랑스 연대노조의 초청을 받아 기획하게 된 유럽 철도 실사팀의 마지막 일정이었다. 물론 잘츠부르크의 라이쓰쭉 철도 탐방은 계획에 없었다. 오스트리아 국철과 민영 회사가 빈-잘츠부르크 노선에서 경쟁을 통해 효율화되고 있다는 국토부 주장의 타당성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국철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경쟁이 도입되었다는 노선의 열차를 시승하는 게 목적이었다.

실사팀은 빈에서 오스트리아 국철을 이용해 잘츠부르크로 간 다음 돌아올 때는 민간회사의 열차를 타고 빈에 도착하는 여정을 계획했다. 편도 약 3시간, 왕복 6시간의 여정으로 숙소에서 역으로 오가는 시간까지 더하면 하루를 꼬박 투자하는 일정이었다. 안개가 낀 알프스 자락을 달리는 잘츠부르크 경유 취리히행 오스트리아 국철이 운행하는 특급열차에 앉아 있으면서도 마음속은 만 갈래의 상념으로 갈라졌다. 12시, 막 점심시간이 시작돼 사람들이 음식점으로 서서히 모여들기 시작하는 시간에 잘츠부르크 중앙역에 도착했다.

▲ 비엔나 발 취리히행 오스트리아 국철 레일젯 열차가 잘츠부르크 중앙역 승강장에 정차해 있다. ⓒ박흥수

빈으로 돌아가는 민간 회사의 열차는 1시간 20분 뒤에 있었다. 오스트리아 국철에 비해 열차 운행 횟수가 적은 베스트반이라는 민간 철도회사의 스케줄상 다음 열차를 타게 되면 잘츠부르크시에서의 체류 시간은 늘어나지만, 빈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을 수행할 수가 없게 되어 열차 시간을 늦출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일정은 2박3일이어서 언뜻 보기에는 시간 여유가 있을 것 같았지만 입국 첫날 오후에 도착해서 호텔 체크인도 못하고 캐리어를 든 채 오스트리아 국철 관계자와의 약속 장소로 가야했다. 미팅이 끝나고 호텔을 찾아 체크인을 마친 뒤 늦은 시간까지 여는 호텔 주변의 식당을 찾아 저녁을 해결하는 것으로 첫날의 일정은 끝났다.

둘째 날은 잘츠부르크까지의 왕복 열차 탑승 실사를 마치면 공식 일정은 끝나지만 개인적으로 비엔나 시내의 지하철과 광역철도 시스템을 돌아보기로 계획을 세웠기에 잘츠부르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만약 시간이 허락한다면 비엔나 공항에 내려 입국장을 통과하면서 안내 포스터를 본 비엔나 중앙역 근처의 벨베데레 미술관에서 열리는 구스타프 클림트 특별전을 단 30분 만이라도 볼 수 있었으면 했다. 클림트의 키스를 원화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공항에서부터 키스를 하기 전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호텔의 관광 안내 코너에서 구한 잘츠부르크의 지도를 열차 안에서 몇 번이나 숙지하고 시립도서관에서 대출해 가져간 잘츠부르크 여행 안내 책자를 반복해서 확인했다. 잘츠부르크 중앙역에서 잘츠부르크 시내까지는 트램을 이용해 15분 정도 걸린다. 왕복 30분, 교통 체증이 발생할지도 모르니까 10분 정도의 여유시간을 갖고 열차 출발 시간 5분전 까지 역으로 돌아온다고 가정하면 잘츠부르크 시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시간은 30분 남짓이었다. 함께 점심을 먹자는 일행에게 양해를 구하고 홀로 중앙역 앞의 트램 정류장으로 뛰었다. 다시 와볼 기회가 없는 곳을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점심 한 끼를 건너뛰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여러 번호의 트램들이 중앙역 정류장으로 들어왔고 트램을 기다리는 동안 현지인들에게 확인을 거쳐 몇 번 버스를 타야 하는지 반복해서 확인을 했다. 시간이 급할수록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버스는 7분을 넘게 기다려서야 탈 수 있었다. 설사가 날 때처럼 입안이 마르고 아랫배가 살살 당기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방문했을 모차르트 박물관을 지나 잘츠부르크 시내를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로 나누는 잘자흐 강을 건너 트램을 내렸다. 땀을 삐질 흘리며 논베르크 대성당 광장을 안내하는 이정표를 확인하며 뛰다시피 골목길을 걸었다.

▲ 논베르크 성당 입구 ⓒ박흥수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거리와 건물에서는 금방이라도 머리에 가발을 쓴 사람들이 유쾌한 목소리로 떠들며 나타날 것만 같았다. 모차르트가 수시로 들락거렸을 술집이며 상점들도 눈에 띄었다. 드디어 관광객들이 호헨잘츠부르크성으로 올라가는 리프트라고 부르는 라이쓰쭉 철도의 시작점이 되는 지점 바로 앞 수도원 광장 입구에 도착했다. 광장 한쪽에는 마차들이 중세의 포즈로 관광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광장의 복판에서는 행위 예술가들이 구경꾼들에 둘러싸여 공연을 하고 있었다.

이제 광장만 통과하면 성으로 올라가는 열차를 보거나 탈 수 있는 위치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누군가 연락을 해온 것이 아니라 중앙역으로 돌아가야 할 마지노선으로 정한 시간에 맞춰놓은 알람이 울린 것이다.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애인을 코앞에 두고 발길을 돌리는 심정이 이럴까? 냉정하게 돌아서 트램 정류장으로 뛰었다. 중앙역에는 예상보다 5분이나 일찍 도착했지만 5분이 더 주어졌더라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새로 운행되기 시작한 비엔나행 민영회사 열차가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여행자를 태우고 잘츠부르크 역을 출발했다. 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산악열차가 등 뒤에서 자꾸만 부르는 기분이 들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은 선택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들로 채워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커졌다.

▲ 잘츠부르크역에서 출발 대기 중인 베스트반 빈-잘츠부르크간 민영 열차 ⓒ박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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