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왜 이러는 걸까? 일본이 이상한 것일까, 일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문제가 있는 걸까? 이 궁금증을 풀어보고자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권혁태 교수를 만났다. 권 교수는 일본 히토쓰바시(一橋) 대학에서 일본 경제사 연구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주요 논문으로는 <재일조선인과 한국 사회>, <교과서 문제를 통해 본 일본 사회의 내면 읽기>, <일본의 헌법 개정과 한일 관계의 비대칭성> 등이 있고, 대표 저서로는 <일본의 불안을 읽는다>, 역서로는 <히로히토와 맥아더>가 있다. 논문과 저서·역서 제목만 보더라도 그의 폭넓고도 깊이 뻗쳐 있는 일본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인터뷰는 11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평화네트워크 이제영 간사, 김유승 인턴이 진행했다.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권혁태 교수는 열정적으로 일본과 한일관계, 그리고 한국 정부의 대일 정책에 대한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최대 관심사인 일본의 우경화에 대한 얘기부터 꺼내보았다.
많은 이들이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하고 있다. 일본의 우경화 현상, 적절한 진단인가?
▲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 ⓒ평화네트워크 |
일본의 최근 60년 역사를 봤을 때 자민당 장기집권을 포함해 어느 정부든 좌선회도 있었고 우선회도 있었다. 그렇지만 전체적인 흐름에서 보면 우경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1990년대 후반 이후로는 우경화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정당과 시민세력이 약해진 상태가 되었다. 1990년대에 사회당이 무너진 탓이 크다. 또 자민당과 민주당 사이에 정치이념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보기도 힘들다."
2009년 민주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했을 때에는 분위기가 다르지 않았나?
"2009년에 민주당이 집권 했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한국의 미디어는 대체로 일본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으니 한일관계가 잘 풀릴 것이고 동북아 정세에도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평가를 했다. 당시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과 자민당 사이에는 유의미한 차이가 없고 민주당의 승리를 선택한 유권자의 심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의 자민당 정권을 지탱했던 그것과 그다지 차이가 없다. 그러니 민주당에 지나친 기대는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지금 상황을 보면 내 우려대로 흘러왔다. 우경화에 대한 제어장치가 사라진 1999년을 보통 우경화 원년이라고 하는데 이후 그 흐름이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자민당 정치인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도 2000년대 들어서 고이즈미 시대에 일본정부가 취하고 있는 우경화 정책을 보면 심히 걱정스럽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또 일본에서 '어디를 봐도 우경화 일색'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한국에서만 쓰는 표현은 아니다. 우경화는 흐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일본에서 우경화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궁금하다.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말하는 것인가?
"우경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여러 가지 설명이 나올 수 있다. 내셔널리즘은 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 등으로 번역되는데 굳이 말하자면 국가주의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를 제외하면 고립주의적인 외교노선이 눈에 띈다. 과거하고 달라졌지만 기본적으로 외교안보군사상의 존재감(presence)을 아시아에서 키워나가는 것이 일본에서 강하게 지지받고 있다. 그것은 1990년대 정도까지 약 50년 동안 지켜왔다고 하는 '평화주의'라는 명분조차도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이미 그 전부터 많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말이다."
사회당 등 우경화를 제어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소멸은 일본 우경화의 '조건'이지 않은가? 보다 직접적인 '원인'과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것은 긴 답변이 될 것이다. 굳이 거슬러 올라가면 1945년에 전쟁을 끝내는 방식, 처리하는 방식에 이미 지금의 상황이 깃들어 있었다. '평화주의'의 내용은 무엇이며 왜 그것이 1990년대 이후 부정되었는지 보아야 한다. 일본의 '평화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는 평화, 민주주의, 경제성장이다. 이를 지탱한 가장 큰 조건 중 하나는 보수-혁신의 균형이다. 1980년대 말, 정확히 말하면 1993년도까지는 그것이 작동했다.
자민당은 헌법 개정을 정강정책에 담고 있던 정당이다. 1955년 이후로 자민당은 연립을 포함해서 의회에서 항상 과반을 차지했지만 3분의 2 이상을 차지한 적은 없다. 내각책임제에서 이 사실은 중요하다.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면 헌법 개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위대 폐지와 미일안보조약 폐기를 내건 제1야당 사회당은 단 한 번도 과반을 넘은 적이 없지만 항상 3분의 1 이상은 차지했다. 이러니 헌법 개정도 불가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당 정권이 들어서 자위대를 폐지하고 미일안보조약을 폐기하지도 못했다.
헌법 개정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헌법 9조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체를 규정하고 있는데 일본헌법에는 그에 상응하는 것이 없다. 국호를 보면 대한민국은 ROK(Republic of Korea)이고 북한 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DPRK(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인데 일본은 그냥 Japan이다. 그것은 정체를 규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인지 공화제인지 어중간한 상태에서 전후 체제가 출범했다. 9조는 기본적으로 무장을 금지하고 있다.
헌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평화주의'의 기초를 부정하고 자주국방을 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사회에서는 한쪽에서는 사회당을 중심으로 평화헌법을 지키자고 하고 한쪽에서는 개정하자고 하는 양상이 지속되어 왔다. 물론 자민당은 헌법을 개정해서 군대를 갖는 것이 그다지 유리하지 않다고 판단을 하고 있었다. 국방비도 들고 주변지역에 군사적 긴장을 가져와서 군비경쟁의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주일미군에 외교안보를 맡기고 자위대 전력으로 보조적 역할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미일동맹체제이다. 그 구도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1946년에 일본에게 헌법을 만들게 해놓고 곧 후회했다. 일본이 일정한 군사적 역할을 해주길 바랬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냉전 해체 후에 이 구도가 깨진 것이다."
평화헌법 제정 당시에 일본 국민들이 반발하지는 않았는가?
"현행 헌법은 일본 국민의 선택이 아니다. 미국이 강요한 헌법이다. 하지만 개정하는 길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전쟁의 기억과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성장해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헌법 조항대로 완전한 비무장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자위대와 미일안보조약은 지지했다. 그래서 일본의 평화헌법을 평화주의로 읽어내는 것에는 무리가 있지만, 일단 한정적인 의미에서 '평화주의'라는 용어를 쓴다면 그 평화주의가 작동된 조건을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일본사회는 평화주의가 특수한 조건 하에서 작동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고 평화주의의 과실만을 따먹은 측면이 있다. 일본인들은 자위대는 군대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미일안보조약이 일본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군사력을 부정하는 헌법9조를 미군이라는 거대한 군사력이 지탱해준 것이다. 또 일본에는 비핵 3원칙이 있다. 핵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보유해서도 안 되고, 들여와서도 안 된다는 세 가지 원칙인데 이 얼마나 훌륭한 내용인가.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일본사회의 평화에 대한 의지가 강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미국의 핵우산 하에 작동된 것이 바로 비핵 3원칙이다. 만약에 비핵 3원칙과 평화주의가 일본사회의 내면적 철학이라 한다면 비동맹외교를 하든가 해야지 미일동맹체제에 들어가 있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미국 군대도 들어와 있고 미국의 핵우산 속에 있으면서 비핵 3원칙과 평화헌법을 내세운다. 그 구도 속에서 평화, 민주주의, 경제성장의 과실을 1980년대 말까지 누리고 있었다. 그걸 지탱하는 국내 조건이 보수와 혁신의 절묘한 동거였다."
자위대는 군대가 아닌가? 이미 평화헌법은 유명무실했던 거 아닌가?
"그건 헌법 해석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미국은 일본에게 군대를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일본도 군사주의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헌법상 군대는 만들면 안 된다. 그러면 자위대는 무엇인가. 아시아의 일반적인 수준에서 보면 자위대는 엄청난 군사력이다. 그런데 일본사회는 군대가 없다고 하면서 자위대가 실제로 군사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헌법과 자위대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헌법해석을 바꾼다. 규정을 바꾸긴 힘드니까 해석을 바꾸는 해석개헌을 한다. 미일안보조약에 규정된 주일미군은 헌법이 금지한 무장에 해당하는가도 논쟁이었다. 하지만 '외국군대는 해당되지 않는다,' '자위대는 전수방위를 한다,' '집단적 자위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해석으로 1990년대까지 버틴 것이다."
'평화주의'가 유지되게 하는 국제적인 상황은 없었는가?
"물론 있다.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중요하다. 한국의 징병제는 냉전의 구도 속에서 보면 세계 자본주의의 전투부대로서 배후에 있는 일본과 미국을 지키는 역할도 한다. 만약 한국의 징병제가 없거나 남북한이 통일이 되어 일본에 적대적인, 혹은 비동맹적인 정부가 들어섰다면 일본의 평화헌법이 존립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군대를 갈 수밖에 없는 남한의 현실과,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는 일본 젊은이의 현실 사이에는 아주 긴밀한 상관관계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평화주의'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한국은 군사독재의 나라이고 일본은 민주주의와 평화의 나라라고 생각하며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간과했다. 1960~1970년대에 다들 그랬다. 그것에 대한 자각이 나온 것은 후일의 일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말해서 한국의 민주화가 일본의 우경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뜻인가?
"남한에는 징병제가 있고 일본에는 징병제가 없다. 일본의 '평화주의'는 한국의 징병제와 미일안보조약, 미국의 핵우산에 의해 지탱된다는 역설적인 구조에 놓여 있다. 그게 없으면 작동을 못하는데 일본사회는 그 상관관계에 대한 자각이 약했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지탱하는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이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독재정권과 일본정부는 일종의 공범관계라 할 수 있다.
식민지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분출한 것이 언제부터인가? 1990년대 이후부터이다. 한국의 과거사 관련 단체들 대부분이 1990년대 이후 결성된 것이다. 왜 일제 지배가 끝나자마자는 거의 없다가 1990년대 이후 터져 나왔겠는가. 일본제국주의의 피해자들이 밑에서부터 목소리 내는 걸 한국의 독재정권이 일본정부를 대신해서 막아주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로 정치적 공간이 열리면서 모순 속에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냈다. 일본열도를 지켜줬던 남한이 변화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일본에서 일부 사람들은 평화, 민주주의, 경제성장의 과실이 진짜 우리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공간에서 지탱된 결과물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들이 위안부 배상 문제 등에 뛰어든 것이다. 다른 일부에서는 한국에서의 과거사 문제의 분출을 내셔널리즘 일반의 문제로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탈국가주의 경향을 보였던 1980년대 지식인들은 한국과 일본 사이의 내셔널리즘의 충돌을 지적하면서 내셔널리즘을 자제하자고 했다.
또 햇볕정책을 통해서 남과 북이 '사이좋게' 지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본의 안전보장에 있어서 새로운 변화요인이었다. 그걸 관리하는 건 미국인데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반미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미국의 허수아비 정권은 분명 아니었다. 과거의 군사독재정권처럼 한일관계를 위해 피해자 단체의 반발을 물리적으로 막는 일도 없어졌다. 그리고 한국이 북한과 대립하면서 일본 열도의 군사적 완충 역할을 해줘야 하는데 그것도 하지 않았다. 일본 내에서 외교안보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고 중국위협론과 북한위협론이 대두했다.
그러자 스스로 지키거나 미국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는 언설이 나타났다. 스스로 지키자는 것은 자주국방론이고 후자는 미일동맹강화론이다. 이 두 가지 노선이 합쳐지면서 1990년대 이후의 우경화를 이끌었다. 걸프전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파병요구를 했지만 일본은 헌법상 자위대를 내보낼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처음에는 금전지원으로 대신했다. 국제사회에서 비난여론이 들끓었다. '일본에서도 돈 말고 사람으로 보내자,' '평화는 피로 쟁취하는 것이다,' '일본도 국제사회에서 군사적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분출했다. 그러려면 헌법을 바꿔야 하는데 명문개헌은 어려우니 해석개헌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이 1990년대 이후로 일본의 군비 증가를 요구했다는 것인가?
"미국이 요구한 지는 굉장히 오래됐다. 다만 요구한 방식이 좀 바뀌었다. 처음엔 주일미군 주둔비를 부담하거나 동북아에서 일정부분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미국은 세계 군사전략의 일환으로 자위대를 위치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내부의 욕망, 50년 동안 자주적인 군대를 못 가졌다는 불만이 1990년대 미국의 요구, 주변국의 민주화로 인한 위기감과 맞물리면서 분출한 것이다.
주변지역과의 비대칭성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19세기 이후로 지속된 것이다. 비대칭적 구조를 해결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하기 어렵다. 이쪽의 평화가 저쪽의 평화를 지탱하는 구조여야 하는데 이쪽의 평화가 저쪽의 불평화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그래서 나는 동아시아 연대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한다. 연대가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1990년대 이후 사회당은 헌법 개정을 반대하고 자위대 철폐와 미일안보조약 폐기를 주장했던 기존의 자기 입장을 바꿨다. 현실화 정책을 취한 것이다. 자위대를 인정하고 미일안보조약 폐지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하자 자민당과의 차별성이 줄어들었다. 이것은 집권에 대한 의지를 밝힌 측면도 있지만 결국은 사회당의 '평화주의'가 온실 속에서 작동했던 사실을 안팎으로 자기 고백한 사례이기도 하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정권교체는 무방하나 자민당을 대신하는 정부가 사회당이 되어서 미일안보조약을 폐기하면 어쩔 것이냐는 우려가 있었다. 미국이 바라는 건 미국식 공화당-민주당과 같은 보수-리버럴(liberal) 양당체제이다.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라는 사람이 그것을 구상했었고 결국은 그것이 실현된 것이다. 지금 외교안보정책에 있어서 민주당과 자민당 간에 유의미한 차이는 없거나 혹은 있다고 해도 '오른쪽'과 '더 많은 오른쪽'의 차이일 뿐이다."
평화헌법 개정이 초미의 관심사이다. 그 가능성은 어떻게 보는가?
"물론 헌법 개정은 쉬운 일은 아니다. 국민투표법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 때 만들어졌지만 9조뿐만 아니라, 1조, 인권개념 등등에서 이런 저런 차이가 있어 하나의 안으로 타협안을 만들어내기 매우 어렵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정당체제가 유동화되면서 특정 정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기 힘든 구조가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헌법 개정을 공약으로 내걸면서도 실제로 하나의 헌법안을 내걸고 국회 3분의 2 찬성을 얻는 형태의 명문 개헌은 매우 어렵다. 아마 해석개헌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거나 대체입법을 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980년대까지 작동했던 자위대 폐지론, 자위대 위헌론처럼 '평화주의' 안에서 작동하던 것들이 지금 다시 쟁점이 되는 일은 없어졌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과거에는 자위대 폐지냐 유지냐가 쟁점이었다고 한다면 1990년대 이후는 자위대 유지냐, 자위대의 군대화냐가 쟁점이 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평화헌법의 존재 의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미 누더기가 되었지만 평화헌법이라는 형식과 명분이 더 많은 우경화를 막아주는 마지막 보루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평화헌법이 동아시아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에 부정적인가?
"솔직히 그렇다. 2005년도에 아베 신조 내각 때 헌법 개정 문제가 현실화 됐을 때 피스보트(Peace Boat, 세계의 평화와 인권 증진, 지구 환경의 보호 등을 목적으로 1983년 설립된 일본의 국제적인 시민단체.) 중심으로 헌법 개정에 반대하는 연대 조직체를 만들었고 나도 협력했다. 잘 되면 좋을 것이다.
평화헌법의 아이디어는 매우 뛰어나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특정한 조건 하에 작동된 것이고 특히 일본에게만 이익이 된 제도였다. 일본의 평화헌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동북아에 새로운 평화질서를 가져다 줄 수 있는 새로운 최선의 비전을 가져서가 아니라, 일본의 더 많은 우경화라는 최악을 형식과 명분에서 최소한으로 막아줄 수 있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북아 평화문제는 일본 문제이기도 하다. 평화헌법 하에서도 일본은 세계적인 군사대국이 되었다. 만일 이 제동장치가 없어진다면 일본의 우경화는 걷잡을 수 없어진다. 따라서 일본이 헌법 개정을 하지 못하도록 돕는 것은 의미가 있다."
후쿠시마(福島) 사태 이후 원전반대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고무적이다. 어떻게 보는가?
"원전반대운동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상황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후쿠시마 이후 일본에서 원전반대운동이 거세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존의 정치지형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가 중요하다. 우파 중에도 탈원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의 원전 집회를 보면 히노마루(일장기)를 들고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한국에서 태극기가 갖는 의미와 일본에서 일장기가 가지는 의미는 다르다. 일본에서 반정부 운동하는 좌파에게 일장기는 금기와도 같다. 원전반대 집회를 주도하는 사람에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돌아오는 답은, '지금은 왼쪽 오른쪽 따질 때가 아니고 원전폐기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정책적 연대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정말 이래도 괜찮은지는 의문이 든다. 이것은 새로운 형태의 내셔널리즘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피폭을 경험한 '일본'이라는 주체를 끌어내고, 조상대대로 물려준 땅에 서양이 만든 원전이 가당하냐는 식으로 생태주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변해나갈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원전을 폐기할 것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그런 흐름을 기존의 진보적 담론이나 평화주의와는 다른 맥락에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국가의 재구성의 차원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폐허에서 복구로'라는 슬로건이 보여주듯 '일본인은 하나'라는 선전이 사회 곳곳에 퍼져있다. 이건 지난 50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1923년 관동대지진과 1945년 패전 당시와 비슷한데, 폐허를 통해서 '일본'이라는 아이덴티티를 다시 부활시키는 흐름이 커지기 시작했고 그 흐름이 잘못하면 이상한 생태주의가 천황주의와 결합하면서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이게 좋은 방향으로 진행되려면 노조나 정당이 흐름을 제어하는 측면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매우 걱정스럽다. 3.11 이후 약 1년 반 동안의 흐름을 보면, "더 많이 오른 쪽으로!"라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면 후쿠시마 사태가 정치사회지형 변동에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뜻인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서 두 번이나 피폭을 겪은 일본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반핵국가로 해왔다. 그런데 원전을 54기나 가동했다. 후쿠시마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둘 중의 하나여야 했다. 민중반란이 일어나거나 정권교체가 일어났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간 나오토(菅直人)에서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로 수상이 바뀌었는데 그것도 사고가 난 지 꽤 오래된 후의 일이다.
바뀌는 과정도 반드시 이것과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고 다른 이유가 더 컸다. 3·11이란 재난에도 불구하고 정치상의 진보적 변화는 전혀 없었다. 10만 명이 원전반대 집회에 모이면 뭐하겠는가. 원전에 반대하는 후보들이 지방선거에서 단 한명도 당선되지 않고 원전지지 후보들이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후쿠시마에서조차도 도쿄전력 후보가 당선됐다.
3·11 이후 기존의 질서가 변화해야 한다는 생각은 많아졌지만 집회에 10만 명이 모이든 아니든 간에 구체적인 정치행위로 드러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 흐름이 왼쪽으로 가지 않고 반대로 가고 있고 그 위에 덧씌워지는 건 국난극복의 내러티브이다. 계속 상기되는 것이 1945년 패전 상황이다. 내셔널리즘의 내러티브가 재구성되고 있다.
물론 다행스러운 건 잠자고 있던 사람들이 데모를 한다는 사실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일본이 데모하는 사회로 바뀌어야 한다고 했고, 데모를 해서 무엇이 바뀌는지 보다는 데모 그 자체가 중요하다고 했다. 나도 그것까지는 인정한다. 그런데 그 흐름이 기존의 정치적 우경화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다."
▲ 지난해 5월 일본 도쿄의 도쿄전력 본사 앞에서 열린 원전 반대 시위. ⓒAP=연합뉴스 |
주변국이 일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오해는 무엇인가? 우리가 일본에게 잘못된 기대를 하고 있는 부분도 있는가?
"일본에 대해서는 상반된 두 개의 오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일본이 민주주의국가, 평화주의 국가, 선진국이라는 오해이고 다른 한편으로 일본은 국가주의적이고 군국주의적이라는 오해다. 상반된 오해가 경우에 따라선 한 사람의 머릿속에 동거하는 경우도 있다. 일본에 대해선 한국인 4000만이 전문가다. 연간 100만 명이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관련 학과가 전국에 100개가 넘는다. 여기(인터뷰가 진행된 서울 합정동)만 둘러봐도 한 집 걸러 한 집이 일본식당이다. 젊은층이 거대한 군사적·정치적 사안과 관계없이 일본 대중문화에 심취한다고 해서 뭐라고 할 필요는 없다. 간단한 일본어를 할 수 있는 사람도 많고 전반적으로 일본에 대한 상식이란 것이 형성되어 있다.
그 상식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두 가지가 공존한다. 하나는 군국주의의 모습이다. 일본음식을 즐겨먹는 사람들도 정치 얘기가 나오면 군국주의, 민족성 얘기를 한다. 하지만 국민성, 민족성이란 말은 인문사회과학적 분석을 포기한 말이다. 문화란 변하는 것이고 그 안에도 다양한 사람이 존재한다. 반면 한국사회에는 광범한 일본 팬이 존재한다. 젊은 층에게 일본의 대중문화는 인기가 있다. 젊은층뿐만이 아니다. 내가 일본에 1980년대 중반에 처음 가서 느꼈던 것은 1960년대 중반에 내가 한국에서 본 만화가 다 일본에서 왔다는 것이다. 아톰, 황금박쥐가 다 실시간으로 왔다.
하지만 또 다른 일본을 봐야 한다. 일본에도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이 오랫동안 있어왔고 희생당한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잘 봐야한다. 일본이 걸어가는 주류적 흐름에 대항하는 사람이 많고 그들이 남긴 흔적도 크다. 그런데 우리는 지배질서의 감각에서만 파악하기 때문에 그 저류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잘 모른다.
만약 한국에서 일본 근현대사를 쓰게 된다면 두 가지 측면에서 다룰 수 있다. 첫째는 저항하는 흐름을 통해서 일본 근현대사를 재구성하는 것, 둘째는 오키나와(沖繩), 아이누처럼 주류역사에서 배제된 사람들로 재구성하는 것. 이런 일은 일본이 하지 못한다면 한국이 할 수도 있다. 일본이 가는 길을 한국이 갈 수도 있지만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에게 동아시아는 무엇인가? 가령 '탈아입구(脫亞入歐)'란 말도 있는데.
"나는 한일문제나 중국문제를 동아시아라는 범주로 접근하는 것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 미래지향적으로 동아시아로 무언가 하자는 건 알겠는데 마치 동아시아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는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탈아입구'는 시간차를 두고 아시아의 모든 국가에서 발견된다. 한국도 중국도 마찬가지다. 19세기 일본이 걸었던 길을 제3세계 국가들이 걷고 있다. 다들 서양을 향해서 전진하며 경쟁하는 구도이다.
그런데 19세기에 일본이 걸었던 선구적 위치부터 뭔가 잘못되기 시작했다. 나쁜 선례를 남겼다. 일본이 그런 것처럼 한국도 자신을 아시아로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생각한다 해도 매우 기능적으로만 생각한다. 원래 아시아란 말 자체가 서양이 본 범주이다. 타자로부터 강제당한 지칭이다.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적인 구도다. 다만 그걸 저항의 구도로 바꿀 수 있는지 고민했던 사람은 있다.
다시 일본 얘기로 돌아가면, 19세기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침략주의와 결합되었다. 19세기 일본의 아시아주의자들은 조선침략의 첨병이 된다. 일본의 아시아주의라는 것은 반(反)서양의 기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시아에서 일본을 맹주로 하는 위계질서를 뜻하는 것이고 19세기말에 일시적으로 실패했다가 후에 대동아공영권으로 흡수되었다. 역시 한국의 주류적 흐름도 '탈아입구'이다. 저개발, 빈곤, 야만으로 각인된 아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을 일본을 통해 흡수한 셈이다. 저항의 흐름으로 아시아를 재구축하는 건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일본에서 '아시아'가 그렇게 부정적인 뉘앙스로만 존재하는가?
"다른 차원의 아시아를 구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970년대 이후로 한일연대운동, 김대중 납치사건, 서승·서준식 정치범 구원운동, 한국민주화지원운동의 흐름이 등장한 건 사실이다. 1990년대 이후 위안부를 지원하는 그룹도 생겨났다. 대미일변도의 군사동맹이나 외교질서에 대한 대안으로서 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있긴 하다. 그러나 미래의 규범적 모습으로 아시아를 이해하는 것일 순 있는데 현재문제의 대안으로 거론하는 것에는 동의하진 않는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나오는 동아시아공동체나 경제공동체는 또 다른 맥락이다."
과거사 문제, 특히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책임이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화해를 가로막는다고 보는데 일본은 과거사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는가?
"없다고 본다. 물론 해결이 아니라 타협이나 봉합의 시도는 있었다. 아시아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려 했던 게 1970년대 이후 생겨났다. 1995년 국민기금이 만들어질 때 일부 지식인들이 그 흐름에서 이탈했다. 국민기금은 아주 안 좋은 타협, 혹은 봉합의 사례를 남겼다. 위안부를 끌고 간 것은 일본 정부인데 국민기금이란 것은 국가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사회당 연립정부 하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오늘날은 그것조차도 부정되는 것이 주류적 흐름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고노 담화, 무라야마 담화 같은 기초조차도 부정되고 있다. 나는 일본정부의 사죄가 법적 책임을 회피할 수 있는 가장 비용이 적은 방법이라고 비판했던 적이 있다. 역사문제가 사죄의 문구로 응축되고 그 수위를 둘러싸고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 불만스럽다. 피해자가 광범위하게 있으니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해야 하며 이를 계속해서 요구해야 한다."
▲ 지난 9월 서울에서 반북단체 활동가들이 주최한 반일시위 장면. ⓒ로이터=뉴시스 |
보통 전범국으로서 일본과 독일을 비교를 많이 한다. 차이가 많은 것 같은데.
"일본의 리버럴 진영에서도 그렇게 얘기하고 한국에서도 일본과 독일을 많이 비교한다. 쉬운 구도로 비교하고 싶은 것은 이해하지만 양국의 조건이 너무 달라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독일의 전후처리 과정을 보자. 독일의 경우는 독일이 피해를 입힌 나라와 독일을 점령한 나라들이 일치한다. 독일은 연합국과 전쟁을 했고 그 연합국들이 전쟁 후에 점령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에 피해를 입혔지만 점령은 미국이 했다. 피해를 입은 나라들이 점령을 한 독일의 전후처리 방식과, 피해를 입은 나라들에게 전혀 발언권이 없었던 일본의 전후처리 방식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전쟁종결 방식이 사죄 여부,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을 갖는지 여부를 결정한 것이다.
두 번째는 전쟁책임과 식민지배책임의 차이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결정적 차이인데,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피해를 입었다. 도쿄재판은 식민지배에 관한 것이 아니라 1928년부터 1945년까지의 중국을 포함한 침략행위에 대해서 처벌한 것이다. 한국 등의 식민지 지배 책임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식민지지배를 당한 국가가 식민지배국가로부터 배상을 받은 사례는 없다. 그래서 한국의 배상요구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야스쿠니(靖國) 문제를 제기할 때도 중국과 한국은 같은 입장으로 보이지만 결정적으로는 스탠스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중국에서는 A급 전범 합사만 문제 삼으면 된다. 중국은 전쟁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A급 전범 합사 문제를 포함해 약 2만 여명의 조선인 합사 문제 등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국은 식민지배 피해국이기 때문이다."
독일도 식민지를 보유했던 것은 일본과 마찬가지 아닌가?
"독일의 식민지는 1차 세계대전으로 거의 소멸했다. 그래서 제2차 대전이 끝나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식민지문제가 중요한 쟁점이 되지 않는다. 물론 1차 대전 이전에 독일의 지배를 당했던 나미비아가 독일에 사죄요구를 했었고 독일은 배상금이 아니라 위무금을 지급한 사례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 독일과 일본은 다르다. 다만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배에 대해서 절대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건 선진국클럽의 공통사항이다.
2002년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란을 중심으로 노예무역과 식민지배에 대한 법적 보상을 결의하려고 했는데 이런저런 나라들의 반발이 있어서 문안이 완곡해졌다. 그조차도 미국 등 제국주의 국가들이 기권을 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일본에게 배상을 요구하는 일은 19세기 이래의 제국주의의 책임을 묻는 국제주의적 성격을 가진다. 세계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식민 지배를 받은 나라가 제국주의 국가의 법적 책임을 묻고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배상을 획득하게 되면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서 중요한 모델이 된다. 그래서 한국의 피식민경험을 다른 제3세계 국가의 그것과 공유해 한국의 경험을 보편화하는 일이 중요하다."
동아시아에서 영토분쟁이 빈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독도 문제에 대한 의견도 듣고 싶다.
"굉장히 조심스러운 주제다. 독도문제에 대해서 한국에도 일본에도 냉소적인 시선이 있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영토라는 게 선긋기 아니겠는가' 같은 시선이 있다. 국가라는 건 자연공동체적인 성격이 없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근대적 개념이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말한 '상상의 공동체'까지 끄집어 내지 않더라도 일본이란 국가는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메이지유신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도가 누구 땅이냐고 묻는다면 근대 이후에 어떤 과정을 거쳐서 누구 땅으로 되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영토라는 것은 지배에 근거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나 중동을 보면 국경이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일직선이다. 그것은 자연공동체가 아니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그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전제가 굉장히 중요하다. 국가에 자연공동체적 성격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영토라는 것은 근대 이후에 제국주의 국가들의 질서구축과정에서 일방적으로 선긋기한 결과이다. 국제질서를 만들 때 일본이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으니 바다에 일본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 전근대 시대에 조선해·동해라는 명칭도 있고 일본해라는 명칭도 있는 것은 국제질서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자가 자국의 명칭을 붙인 결과이다. 지금 와서 동해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내셔널리즘의 성격이 강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식민지배 배상 요구와 마찬가지로 19세기 제국주의국가에서 만든 질서에 대한 이의제기의 측면이 있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대의 뜻이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식민주의 문제와 분리해서 영토문제로 보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 시각차이가 발생한다. 일본은 독도 편입이 1910년 '한일합방' 전에 이루어진 것이니 당연히 국제법상 '한일합방'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영토에 대한 권리를 포기를 규정한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런데 일본이 영토라 주장하고 있는 곳들은 전부 19세기 이래에 일본 열도에 한정되어 있던 영토가 차차 늘어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다. 홋카이도(北海道)가 일본으로 편입된 것은 1869년이다. 오키나와가 일본으로 편입된 것은 1872년이다. 그리고 1895년에 청일전쟁 이후에 대만을 삼켰다. 중국과 분쟁을 벌이는 센카쿠열도 문제도 거기서 발생했다. 일본은 대만을 병합할 때 펑후제도(澎湖諸島)도 같이 가져갔다.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조약에서 대만과 펑후제도의 영유권을 포기한다고 했을 때는 일본은 거기에 센카쿠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 때도 여순 반도, 사할린, 한반도도 집어삼켰고 그 다음이 만주였다. 이처럼 일본의 영토문제는 일본제국주의의 대외팽창과 분리할 수 없는 문제이다. 동아시아의 영토분쟁은 기본적으로 일본문제이고 일본 제국주의의 문제다."
영토분쟁의 다양한 국내정치·국제정치적 성격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보나?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 정리를 하면서 일부 섬과 열도로 일본의 영토가 축소 확정되었다. 그런데 센카쿠를 포함해 일부 섬에 대해서는 미국이 일부러 명문화시키지 않았다. 일본의 반대도 있었다고 하지만 최근에는 미국이 일부러 영토분쟁의 씨앗을 남겼다는 음모론적 해석도 등장한다. 주변국과 분쟁을 해야 일본이 미국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독도는 한국이 현재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일본에서는 독도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무관심했다. 잊을 만하면 일본당국자나 외교관이 한마디 하는 식이었다. 아까 말한 1990년대 이후에 우경화 흐름이 이루어지면서 독도문제가 부상했다. 영토분쟁이 국민국가를 재구성 하는 데 있어서 내셔널리즘을 고양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국경을 넘는 시민사회와 시민사회의 국제연대의 틀을 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최근 일본의 지식인들이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성명을 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 시민단체와 일본 시민단체가 연대를 할 때 핵문제, 평화헌법문제, 역사인식문제에 있어서는 의견 일치를 보아도 독도는 거론하기 어려웠다. 일본 시민단체에게 부담스러운 문제였기 때문이다. 일본정부가 독도 얘기를 하는 것은 뿔뿔이 흩어져있는 사람들을 영토를 매개로 재결집 시키는 데 효과적인 쟁점이었기 때문이고 지금도 그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은 이 프레임에 이용당한 측면이 있다."
역대 한국 정부 중에서 한일관계를 가장 잘 다뤘다고 평가하는 정부가 있다면?
"기본적으로 없다고 보지만 상대적으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잘 했다. 백점 만점으로 가정한다면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부는 마이너스 점수를 줄 수 있다. 그나마 낮은 점수나마 줄 수 있는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이다."
아까 남북관계의 개선이 일본에 부담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러한 개선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한일관계도 잘 다루었다는 것이 가능한가?
"남북관계의 개선은 국제질서의 변화를 전제로 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뜻한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개선이 일본에 새로운 변화요인으로 작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일본의 문제이다. 남북관계의 개선으로 일본이 외교안보상에 부담을 느낀다고 해서 한국이 일본에 부담을 안 주는 방향으로 외교정책을 펼 수는 없다. 기존 구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남북한이 대립하고 이에 대한 부담을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온전히 다 짊어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해방 후 50년 동안은 그래왔다. 남북관계의 개선은 그런 의미에서 획기적이다.
남북관계를 개선하되 일본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은 분명히 있었다. 김대중 정부가 그러했다. 그래서 위안부문제나 과거사문제에 있어서 김대중 정부나 노무현 정부는 강력한 문제제기를 삼갔다. 역사문제와 외교안보문제를 분리하려 한 것이다. 김대중 정권은 앞으로 과거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 얘기했고, 노무현 정부는 초기에 조용한 외교를 했다. 하지만 효과를 거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일본 사회에 대해, 혹은 일본의 시민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인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까 말한 것처럼 민주화를 기점으로 대일정책이 달라진 것이 있지 않은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이전보다 조금 더 나은 면이 있다면 그 점에 대해서 설명해 달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과거사문제에 대한 각종 위원회가 국내에 만들어졌는데 이게 중요하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5000~1만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그 숫자를 밝혀낸 것은 재일조선인들이다. 국가가 국가이기 위해서는 몇 명이 죽었는지, 누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일제시대에 끌려갔다고들 하는데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살며, 돈은 제대로 받았는가를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대한민국이 50년 동안 방치해둔 것을 김영삼 정부에서부터 조금씩 시작하기 시작하여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각종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민주화가 가져다 준 큰 성과였다. 일본의 우파 신문이 과거사 관련 위원회를 반일 위원회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데 반일인지 여부를 떠나서 국가가 국가이기 위해 해야 할 기초적인 작업을 해방되고 50년 이상이 지나서 겨우 하게 된 것이다. 반공군사독재정권이 못하게 한 일을 민주화 이후 겨우 시작한 것이다."
그럼 최근의 한일관계로 초점을 옮겨보자. 이명박 정부의 한일관계를 평가해본다면?
"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온탕과 냉탕을 왔다 갔다 해서 철학도 비전도 원칙도 없는 외교이기 때문에 과연 무얼 했나 싶다. 난데없이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얘기가 나와서 굉장히 우려했다. 물론 군사교류는 김대중 정부 때부터 했었다. 당시에도 문제는 있었지만 이명박 정부에서는 구체적인 형태로 발전했고 내용도 전혀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하려고 했다. 아마 미국의 의향이 크게 반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6월에 군사협정 체결을 단념하고 담당 비서관을 경질시켰는데 8월에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고 천황의 사죄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관계조차도 모르겠고 무슨 뜻으로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나 지나야 비밀이 밝혀질지는 모르지만 왜 갑자기 180도로 전환하게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이명박 정부의 대일정책이 어땠는지 묻는다면 평가할만한 재료조차 없다고 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명박 정부 들어서 민주화 이후 만들어진 과거사 관련 각종 위원회들이 해체되거나 방향이 틀어져 제도적 성과들이 부정되거나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문제는 매우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
마지막으로 차기 한국 정부의 대일정책에 대해서 조언을 해달라.
"상대가 있으니 대일정책은 쉬운 일은 아니다. 일단 새 정부가 들어선다면 기존에 민주정부에 있었던 위원회들을 온전한 형태로 부활시켜서 진상조사도 하고 보상체계도 만들어야 한다. 여전히 피해자가 있고 그 자손들이 있지 않은가. 또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내적인 정책은 대일관계와 관계없이 지속적으로 펴야 한다.
아울러 또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한반도가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디아스포라의 나라라는 것이다. 세계에서 이민 연구를 하면 인도나 중국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구비례를 보면 한반도처럼 인구 해외유출이 많은 나라가 없다. 거의 20%다. 가족 당 한 명 정도는 이산의 역사를 경험했다. 이산은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와 분단 때문이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을 예로 들어보자. 이스라엘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비호 아래 팔레스타인 땅에 인공국가를 만든 것 아닌가. 그때 귀화법이란 것을 만들었다. 해외에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 돌아오는 데 필요한 행정적 절차를 원스톱으로 제공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절차가 너무 복잡하다. 재외동포에 한해서라도 돌아온다고 하면 돌아올 수 있게 도와주고 정착할 수 있게 기구나 시설도 마련해주어야 한다. 돌아오느냐 아니냐는 그 분들의 결정에 맡기되 제도적인 정비는 마련해야 한다.
그리고 일본에 대해 요구하는 과거사 문제는 물론 외교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외교전술에 의해 바뀔 수 없는 어떤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실현 가능성 여부를 잣대로 삼아서는 안 된다. 왜냐면 이 원칙은 한반도 통일국가의 기본적인 이념이 되는 중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식민지배와 전쟁을 겪었다. 반제국주의와 반전 국가가 될 수 있는 역사적 토양을 갖춘 것이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왜소한 반일·반북(반공) 국가가 되어버렸다.
반제국주의와 반전이 우리의 역사적 아이덴티티이다. 이게 원칙이고 한반도의 기본 이념이 되어야 한다. 일본에 요구할 것은 계속 요구해야 하지만 동시에 베트남전쟁에 대해서 한국정부가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 문제들은 복합적으로 얽혀있지만, 식민지와 전쟁을 경험한 사회가 평화주의를 내실화·내면화하기 위해서는 식민지지배와 전쟁의 경험을 보편화하고 내면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일본과 한일관계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줘서 감사드린다.
나도 유익한 시간이었다. 좋은 기획해주셔서 감사드린다.
*시민단체인 평화네트워크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됩니다. 평화네트워크 바로가기(www.peace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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