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써 학생운동권 몰락에 결정타가 됐던 이 사건이, 실은 당시 공권력의 조작이었다는 주장이 더 힘을 받게 됐다. 아울러 당시 사건을 지휘해 강기훈 씨(48)를 범죄자로 내 몬 인물 중 상당수가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측 캠프 인사라는 점도 여론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먹칠 당한 청년들의 죽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지난 1991년 5월 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몸에 시너를 끼얹고 뛰어내려 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유서를 당시 전민련 총무부장이었던 강기훈 씨가 대신 써줘 자살을 방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야 단체의 도움으로 명동성당에 피신해 있던 강 씨는 이 해 6월 24일 검찰에 자진출두해 구속됐다. 결국 검찰은 8월 12일 강 씨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추가하기까지 했다.
오랜 시일이 걸린 싸움 끝에 법원은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강 씨에게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개월을 선고했으며, 강 씨는 1994년 8월 17일 만기출소했다.
이 사건이 발생한 1991년은 노태우 정권 후반기로, 사회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함으로써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목소리가 가장 크게 울릴 때였고, 3당 합당으로 민주화 정신이 퇴색했다는 국민들의 비판이 빗발칠 때이기도 했다.
부동산 투기열풍이 과열돼 빈부격차가 커지기 시작했고, 수서지구 특혜분양과 잇따른 국회의원 뇌물 사건으로 사회 지도층에 대한 성토의 목소리가 높았다. 국가보안법과 경찰법 날치기 사건과 잇따른 노동운동, 통일운동 탄압은 정권 말기 '공안 정국'을 조성했다.
특히 학생들이 잇따른 죽음으로 인해 민주화 요구가 크게 힘을 받던 때였다. '5월 민주화 시위'로 불리는 당시 운동 사태를 촉발시킨 건 강경대 쇠파이프 치사사건이었다. 4월 26일 당시 명지대에 재학 중이던 강경대 씨가 총학생회장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 도중 경찰의 무차별 구타로 사망하면서 노태우 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는 극에 달했다.
4월 29일 전남대 학생 방승희 씨가 강경대 사건 규탄집회 도중 분신했고, 5월 1일 안동대 학생 김영균, 5월 3일 경원대 학생 천세용, 5월 10일 노동자 윤용하 등이 연달아 분신해 이른바 '분신정국'이 조성됐다. 약 두 달 간 13명이 사망했고 2300회가 넘는 집회가 열렸다. 김기설 씨의 죽음도 이 과정에서 일어났다.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는 김지하 시인의 글이 파문을 일으킬 때가 바로 이 당시다.
이 시기에 일어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학생운동에 대한 지지를 무너뜨리는 결정적 계기였다. 학생들의 죽음이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일부 세력'의 선동에 따른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면서 정부에 대한 불만은 오히려 학생운동을 규탄하는 흐름으로 변했다. 반정부 시위로 인해 위기에 몰렸던 정부가 민주화 세력을 꺾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리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1991년 5월8일 서강대 건물 옥상에서 전민련 사회국 부장 김기설 씨가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며 분신하자 검찰이 김씨의 전민련 동료였던 강기훈(48)씨가 유서를 대신 써주며 자살을 방조했다고 기소한 사건이다. 사진은 필적 감정 분석자료. ⓒ연합뉴스 |
이번엔 진실 밝혀질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한 때는 사건 16년 뒤인 지난 2007년이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는 분신한 김 씨의 낙서장을 확보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사설 필체감정원 7곳에 필체 감정을 의뢰했고, 이 결과 두 사람의 필체가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과거사위는 이를 근거로 국가에 사과와 함께 재심을 권고했다. 강 씨는 2008년 1월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등법원은 2009년 9월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검찰이 즉시 항고해 지난 3년 간 대법원 심리가 진행됐으며, 이제야 재심 개시가 결정됐다.
대법원 재판부는 강씨의 유죄 근거가 된 필적 감정결과에 대해 "재심대상 판결 당시 국과수 소속 문서감정인들의 증언 중 일부가 허위임이 증명됐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형사소송법 438조 1항에 의해 서울고법에서 재심소송 절차가 진행돼, 유무죄 여부를 다시 판단하게 된다.
▲1991년 6월 22일, 당시 농성중이던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검찰에 자진출두하겠다고 말하는 강기훈씨. ⓒ연합뉴스 |
가해자와 피해자, 엇갈린 인생 역정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당시 사건 관계자들의 엇갈린 삶의 역정이다. 억울한 옥살이까지 치르고 폭압적 정부에 의해 가해자로 둔갑한 희생자 강기훈 씨는 현재 간암으로 투병 중이다. 강씨의 변호를 맡은 송상교 변호사는 <뉴스타파>와 인터뷰에서 "(강 씨의) 마지막 소원이 법정에서 단 한번이라도 자신이 얼마나 억울한지, 자신의 진실을 한 번쯤 호소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강 씨를 파렴치한으로 내 몬 당시 검사 중 상당수는 지금도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상당수가 당시 학생운동 세력과 대척점에 섰던 3당 합당 정당의 후신인 새누리당 소속이며, 박근혜 후보의 측근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당시 9명의 검사 중 김기춘 검사는 현재 박근혜 후보의 측근인 '7인회' 멤버다. 강신욱 당시 강력부장은 대법관을 지낸 후 2007년 박근혜 대선캠프에서 법률지원특보단장을 지냈다.
광상도 검사는 박근혜 후보의 '싱크탱크'로 알려진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에 참여했다. 윤석만 검사는 올해 대전지역에서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출마했으며, 현재 박 후보를 지지하는 외곽 조직에 있다. 임철 검사는 2008년 총선 당시 한나라당 후보로 나섰다.
남기춘 검사는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 소위원장을 맡았고 현재는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 검사는 지난 19일 <뉴스1>과의 통화에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에 대해 "수사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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