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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EBS 문제집이 점령한 교실, '절반의 진실'은?

['사교육 중독', 이젠 빨간불] 목적 실종된 EBS 중심 수능 정책

경기도 수원 A고등학교. 이 학교 3학년 국어 수업시간은 오직 EBS 연계교재로만 진행된다. 정규 교과 과정이 있지만 학생들은 교과서를 펴지 않는다. 교사도 이를 안다. 아니, 아예 교재 중심으로 수업을 진행한다. 3학년 과정 1년 내내 이 학교 국어 수업은 EBS 교재 풀이로만 진행된다.

EBS에만 의존하는 수업…'공교육 살리기'라는 목적은 사라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다른 과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수능을 앞둔 고교 3학년의 경우 국어, 영어, 수학 등 대입수능시험 전략 과목의 수업은 철저히 EBS 연계교재 중심으로 진행된다.

서울 강동구의 B고등학교에서 3학년 영어 수업을 담당하는 김진영(41, 가명) 교사는 "3학년 수업은 백퍼센트 EBS 연계교재로 진행된다"며 "정규 교과에 3학년은 영어 두 과목을 배우게 돼 있지만, 각 선생님이 범위를 나눠 교과 수업 대신 EBS '수능특강' 문제집 한 권을 한 학기에 모두 나간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수업풍경이 펼쳐지는 이유는 대입 수능시험의 EBS 연계율이 갈수록 높아지기 때문이다. 사교육 의존증을 줄이겠다는 취지로 시작한 제도이지만, 오히려 이 때문에 공교육 현장이 더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지적도 만만찮다. 정부가 '사교육 의존증' 완화를 위한 정책을 개발하는 이유는 '공교육 살리기'를 위해서다. 그런데 '사교육 의존증' 완화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되면서, '공교육 살리기'라는 진짜 목적은 실종됐다는 것.

수업 시간에 EBS 교재 안 쓰면 학부모들 반발

▲2012학년도 수능 9월 모의평가가 시행된 지난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배화여고에서 학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음. ⓒ뉴시스
A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는 유지혜(32, 가명) 교사는 "학기 초에 EBS 연계교재가 확정되면, 이 문제집들을 중심으로 수업 진도를 짠다"며 "수업 시간에 EBS 연계교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당장 아이들은 물론, 학부모까지 반발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학교 구성원들이 EBS 연계교재에 집중하는 이유는 '쉬운 수능'을 위해 정부가 EBS 연계교재 중심으로 수능 문제를 출제키로 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1월 정부는 수능연계 강화 정책을 발표하고, EBS와 연계율을 높이기로 했다.

정부는 올해 수능에서도 문제의 70%가량을 EBS 수능 강의와 교재에서 연계해 출제할 예정이다. 교육과정평가원의 방침이 수험생이 연계율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실제 9월 모의평가 결과는 이 비율이 거의 정확히 지켜졌다는 게 현직 교사들의 분석이다. 유 교사는 "신기할 정도로 겹쳤다. 언어영역의 경우 예시 지문마저 10개 중 7~8개 비율로 교재에서 나올 정도"라며 "다른 문제를 많이 푸는 것보다, EBS 연계교재를 꼼꼼히 공부하는 게 수험에 더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정규교과 과정을 충실히 따르던 학교도 3학년만 되면 수업시간 풍경이 달라진다. 매년 3월 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하는 '수능시험 연계 대상 EBS 교재 목록' 자료에 따라 그 해 수업시간에 공부할 수험서가 사실상 최종 결정되기 때문이다. EBS는 매년 1월부터 5월 말까지 수능 대비 수험서를 직접 제작한다.

올해의 경우 언어영역에 6권, 수리영역 '가'형 8권, '나'형 4권, 외국어영역 6권, 사회탐구영역 22권(이하 모두 선택과목 포함), 과학탐구영역 16권, 직업탐구영역 34권, 제2외국어/한문영역 16권이 지정됐다.

EBS가 공교육 망친다?

이처럼 EBS 의존도를 높인 이유는 분명하다. 강남의 유명 입시학원을 가지 않는 학생도 EBS 위주로만 충실히 공부하면 수능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려는 의도다.

그러나 EBS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다보니, 정부의 이와 같은 정책이 오히려 공교육을 더 망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김 교사는 "성적이 좋은 아이들은 2학년 때도 교과서 진도를 빨리 끝내고 EBS 문제풀이로 수업 진도를 나간다"며 "교육과정을 준수하고 싶어도 당장 주변 학교들이 EBS에 의존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교사가 수업 준비 열심히 할 이유가 없다"

유 교사는 "교사가 직접 교재를 연구해 학생들에게 적합하다고 판단하는 수업방식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무조건 EBS 연계교재만 사용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심지어 일부 아이는 수업 시간에 '그냥 EBS 강의를 틀어달라'고까지 요구할 정도"라고 말했다. 교사의 수업 자율성이 심각할 정도로 침해되고 있는 셈이다.

아이들의 학습 효율을 높이는지도 의문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유 교사는 "아이들이 집에서 듣는 인터넷 강의를 다시 학교에서 같은 문제집을 두고 또 듣는 셈"이라며 "아이들이 수업에 집중할 필요성이 줄어드는 건 사실"이라고 언급했다.

당장 지역 교육청들도 수능 대비를 위해 "EBS 교재에 대한 철저한 준비가 필수(강원도교육청)"라는 입장을 내놓을 정도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고민해야 할 교육기관이 거꾸로 특정 문제집 위주의 학습을 종용하는 셈이다.

결국 EBS만 돈 번다

정부의 'EBS 중심' 전략이 낳는 부작용은 학교 바깥에서도 많다는 평가도 나온다. 국회 문방위에서 잊을만 하면 나오는 'EBS 돈벌이' 논란이 대표적이다. 강동원 문방위원(무소속)은 지난 달 27일 문방위에 참석해 "대입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누구든 사야하는 EBS 수능교재 가격이 수능시험 연계정책 발표 이후 9.8% 올랐다"고 지적했다.

실제 EBS의 수능 교재부분 매출은 지난 2009년 515억 원에 불과했으나, 2010년에는 751억 원, 지난해는 808억 원으로 급증했다. 수능교재 판매에 따른 매출 증가분은 전체 매출의 20%에 달한다. 이 기간 EBS 직원 1인당 평균 인건비와 수당은 큰 폭으로 상승해 모럴 해저드 논란을 낳기도 했다.

김승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실장은 "국가가 나서서 문제풀이 위주 교육을 시키는 셈"이라며 "EBS로 사교육을 잡으려하다 오히려 '유사 사교육'을 정부가 조장하는 꼴이 됐다"고 지적했다.
- EBS 중심 사교육 대책, 얼마나 효과 있나?

수능 난이도를 대폭 낮추고, 문제 대부분을 EBS 교재에서 낸다는 게 정부 대입 정책의 골간이다. 목적은 사교육비 부담 완화다. 실제로 효과를 거뒀다. 최근 부동산 시장에선 대치동 학원가에서 거품이 꺼지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권리금조차 포기한 학원 매물이 나올 정도다. 이는 학원 수강 수요가 준다는 뜻이고,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 완화를 위해서는 긍정적인 신호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대학입시가 수능만으로 구성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쉬운 수능'을 핑계로, 이른바 상위권 대학들은 본고사나 다름 없는 논술 문제를 출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4년제 대학들의 모임인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입시에 관한 자율권을 줬다. '시장 자율'을 강조하는 현 정부 교육정책 기조에 따른 조치다. 입시 자율권을 얻은 대학들은 '본고사형 논술' 난이도 높이기 경쟁에 들어갔다. 여기에 출제자인 교수들의 안이한 태도까지 겹치면서 '본고사형 논술'은 고교 교육 범위를 이탈하게 됐다.

사교육걱정없는 세상에 따르면, 서울대, 연세대, 한양대 등의 최근 수리논술 문제는 100% 대학교재에서 출제됐다. 이는 고교 수업으로는 수리논술에 대비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입시 자율권'을 얻은 대학들이 고교생들에게 사교육 의존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정부의 사교육비 대책이 온전한 효과를 거두려면, '본고사형 논술'을 출제하는 대학들에 대한 일정한 규제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는 현 정부가 출범 초기부터 내세웠던 '시장 논리'와 부딪히는 면이 있어서 쉽지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기사 본문에서도 지적했듯, 정부가 사교육을 문제 삼는 핵심적인 이유는 지나친 사교육이 공교육을 망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가 추진하는 사교육 대책이 '공교육 살리기'라는 목적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놓고 교육현장에선 회의적인 목소리가 높다.
-사교육 중독, 이젠 빨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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